수행기

촛불이 타는 것을 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16. 17:34

 

촛불이 타는 것을 보면

 

 

초에 불을 켰다. 팔뚝만한 큰 초에 처음으로 불을 붙인 것이다.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구한테 받았는지 어떤 연유로 받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는 그렇게 거실 장식장에 몇 년 있었다. 시절 인연이 되어서일까 마침내 사무실 명상공간 한켠에서 불 밝히게 되었다.






 

2.8평 명상공간은 훵하다. 칸막이 쳐진 공간에 화분 네 개만 있었을 뿐이다. 작은 탁자를 하나 가져다 놓았다. 다목적으로 쓰기 위한 것이다. 손님이 찾아왔을 때 차를 마시는 용도로 쓰기 위함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촛불용 탁자로 사용하고자 했다.

 

명상공간에 불상이나 불화가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일장일단이 있다. 손님이 왔을 때 호불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나는 사람 상당수가 타종교인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수도 있다고 본다. 불교를 너무 내세우다보면 멀리 할 수 있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면으로 본다면 불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확실히 불이익이다. 불자들만 있을 때는 불교세상인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이유로 사무실에 불상이나 불화 놓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한달전에 사무실에서 향을 사른 적이 있다. 불교박람회 때 사온 향이다. 향을 사르면 특유의 향내가 난다. 담배 냄새 같기도 하다. 흰 연기를 내며 사그라 드는 것을 보면 덧없어 보인다. 자신의 몸을 태워서 사그라지기 때문에 사른다라는 말을 하는지 모른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나무가 타서 재가 되는 것을 사위다또는 사르다라고 한다. 타서 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향을 사른다는 것은 타서 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향을 사르면 유행가 가사에 있는 것처럼 인생은 연기처럼 재를 남기고라는 말이 연상된다. 그래서일까 향은 육법공양물 중의 하나에 들어간다.

 

향은 후각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상의 이치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향이 이처럼 무상의 가르침을 일깨워주기 때문인지 빈소에 가면 향을 사른다. 기독교인들은 꽃으로 대신한다. 현충원에 참배할 때도 향이 빠지지 않는다. 인생무상과 관련 있을 것이다.

 

한달전 사무실에서 향을 살랐을 때 몇 사람이 찾아왔다. 같은 층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혹시 여기서 담배 피우십니까?”라며 물어보았다. 당연히 담배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향을 살랐다고 말 할 수 없었다. 건물 전체가 금연구역으로 지정 되어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들이 닥쳤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담배냄새에 매우 민감한 것 같다. 이후로 향을 사르는 일이 없게 되었다.

 

명상공간에 촛불을 켜니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 같다. 낮이지만 늘 형광등을 켜 놓고 있다. 촛불을 켰으니 형광등을 꺼도 된다. 어두침침한 곳에 촛불이 더욱 빛나는 것 같다. 그런데 촛불은 재를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일곱개의 태양의 출현의 경을 보면 예를 들어 버터나 참기름이 불이 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듯”(A7.66)이라는 구절이 있다. 초가 타는 것도 그렇다.  

 






촛불을 켜고 입정했다. 목표는 한시간이다. 스마트폰으로 한시간 알람을 설정해 놓았다. 시작 버튼을 누르면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시간이 다 되면 알람소리가 난다.

 

요즘 좌선하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몸이 자루 같다는 것이다. 입구와 출구가 있는 자루를 말한다.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생명의 자루를 말한다. 먹으면 모두 똥이 되어서 나오기 때문에 똥자루라고도 볼 수 있다.

 

좌선하면 자세를 바꾸지 말라고 한다. 종 칠때까지 처음 자세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다리에 통증이 와도 자세를 바꾸지 말라고 했다. 호흡관찰하다가 통증이 나타나면 통증을 관찰하라고 했다. 주관찰 대상이 바뀌는 것이다.

 

처음 앉으면 가장 강한 관찰대상은 호흡이다. 특히 복부의 움직임과 관련된 호흡이다. 배의 부풂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라고 했다. 그렇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단지 지켜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앉아 있을 때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몸은 마치 자루처럼 움직임이 없다. 다만 숨만 쉬고 있을 뿐이다. 숨은 통제영역이 아니다. 숨은 생명기능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우리의 의도나 의지와 무관하게 생명유지기능의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될 뿐이다. 그래서 음식을 먹으면 세포분열을 하여 뼈도 되고 살도 되고 피도 된다. 이런 것에 의도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움직임은 다르다.

 

좌선을 하면 자세를 바꾸지 않고 한자세를 계속 유지한다. 오로지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만 지켜볼 뿐이다. 이때 손을 들고자 하면 어떻게 될까? 의도가 없으면 손을 들 수가 없다. 몸은 의도가 있어야 움직이기 때문이다. 단지 지켜만 보고 있는 입정상태에서는 손이 들려지지 않는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몸은 자루와 같다는 것이다.

 

몸은 자루와 같다. 입구와 출구가 있는 똥자루와 같다. 몸에는 구멍이 두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아홉 개의 구멍이 있다. 테라가타 게송에 따르면 우리 몸은 아홉 개의 구멍에서 부정한 것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그대의 몸에는 아홉 구멍이 있어, 언제나 부정한 액체가 흐른다.”(Thag.1157)라고 했다.

 

아홉 개의 구멍은 우리 몸의 감각기관과 관련이 있다. 눈구멍 두 개, 귀구멍 두개, 콧구멍 두개, 그리고 한개의 입구멍과 항문과 성기를 말한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코에서는 콧물이 나온다. 항문으로는 똥이 나온다. 어느 것 하나 깨끗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구멍 단속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는다.

 

좌선을 하면 구멍 단속을 할 수 있다. 앉아 있을 때 만큼은 자루가 되기 때문이다. 의도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똥자루 같은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정신과 물질로 구분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정신과 물질은 한덩어리라고 알고 있었으나 좌선을 해보면 이런 생각은 깨지는 것이다. 이를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라고 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첫번째 단계의 지혜에 해당된다.

 

앉아 있다 보니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평좌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개 좌선을 시작하고 삼십분 정도 지나면 온다. 선원에서 사야도는 통증이 와도 자세를 바꾸지 말라고 했다. 그대신 주관찰 대상을 복부에서 통증이 있는 곳으로 바꾸라고 했다.

 

호흡이 몸관찰에 대한 것이라면 통증은 느낌관찰에 해당된다. 신념처에서 수념처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라고 했다. 신념처에서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듯이, 수념처는 통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 주관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아프다고 하여 아파 죽겠네!”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아프면 단지 아프네.”라고 하면 그뿐이다.

 

오른쪽 다리가 점점 묵직해졌다. 예전 같으면 겁이 났을 것이다. 마치 불구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일어나서 자세를 바꾸거나 좌선을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불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종 칠때까지 가기로 했다.

 

흔히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라는 말이 있다. 다리가 아파도 한시간은 버텨 내야 한다. 통증의 발생과 소멸을 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은 오온의 생멸을 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신체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보는 것은 기본이다. 호흡은 본래 생멸의 현상을 지니고 있다. 통증은 느낌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느낌도 생멸한다. 마치 파도치는 것처럼 1파가 지나면 2파가 밀려온다. 이런 생멸을 관찰하자는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는 한시간 좌선에 한시간 행선을 기본으로 한다. 왜 한시간 좌선하라고 했을까? 한시간 동안 앉아 있어 보면 알 수 있다. 한시간 정도는 앉아 있어야 통증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통증관찰 단계를 지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한시간 원칙은 선종에서의 참선과 비교된다.

 

숭산스님의 선종계통의 종단에서 참선을 한적이 있다. 오래 앉아 있지 않는다. 40분 앉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10분 동안 몸을 푼다. 마치 체조하듯이 스트레칭 하는 것이다. 40분과 한시간은 차이가 있다. 10분 스트레칭 하는 것과 한시간 행선하는 것도 차이가 있다.

 

마하시전통에서 좌선을 한시간 하는 것은 통증을 관찰하기 위한 목적도 있을 것이다. 통증은 삼사십분 지나고나서 본격화되기 때문이다. 통증이라는 느낌 관찰을 하지 않는 선종계통의 명상센터에서는 굳이 한시간 앉아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러가지를 감안했을 때 40분이 가장 적당하다는 것이다. 아마 외국인 수행자들을 위한 배려도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마침내 종이 쳤다. 한시간을 버틴 것이다. 일을 하면서 종종 앉아 있어 보지만 이삼십분이 고작이었다. 일요일 오전 마음잡고 한시간 동안 앉아 있어 보기로 한 것이다.

 

촛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다. 검댕이 하나 남기지 않고 타고 있었다. 촛불을 앞에 두고 앉으니 마음 자세가 달랐다. 형광등 불빛은 항상 그대로이지만 촛불은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한시간 동안 태웠다. 그 결과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사람의 수명은 촛불 같은 것이다. 촛불이 자신의 몸을 태워 불꽃을 유지하듯이, 사람도 자신의 몸을 태워 삶을 유지하고 있다. 촛불은 언젠가 다 타고 말 것이다. 사람도 수명이 있어서 언젠가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촛불이 타는 것을 보고서 수명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이다. 촛불을 보면서 절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향을 사르면 타고 남은 재를 본다. 무상의 이치를 알게 해 주는 것 같다. 촛불을 켜면 검댕이 하나 남기지 않고 줄어든다. 인간의 수명이 줄어 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향과 초가 왜 육법공양물에 속하는지 알게 해 준다.

 

 

2020-02-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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