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세상을 떠나고 싶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3. 19:34

 

세상을 떠나고 싶다면

 

 

오랜만에 한시간 앉아 있었다. 스마트폰 알람을 설정해 놓고 앉았다. 앉을 장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장소를 마련해 놓으니 자주 앉게 된다. 마치 책상 뒤에 책장이 있어서 의자만 돌리면 니까야를 꺼내 볼 수 있는 것처럼, 칸막이 너머에 앉을 자리가 있어서 자주 앉게 된다.

 




앉아 있으면 편안하다. 잠자는 것 보다 더 낫다. 잠을 자면 무의식 세계로 가지만 앉아 있으면 의식은 또렸하다. 비록 눈을 감았지만 앞을 보는 것처럼 훤하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 중에 눈 하나만 막아도 이렇게 편한 것이다. 귀는 막을 수 없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때로 전철이 지나는 가는 소리도 들린다. 시계 초침이 똑딱이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방해받지 않는다. 눈 하나만 감아도 세상이 편하다.

 

열린 것은 오로지 의식의 문 하나뿐이다. 의식의 문까지 막으려면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간순간 치고 들어오는 생각을 막을 수 없다.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드라마가 펼쳐진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허공에 집을 짓는 것이다. 알아차리면 무너진다. 그것도 한순간에 허무하게 무너진다.

 

좌선하며 앉아 있으면 생각의 무게를 느낀다.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 들어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는 늘 생각하며 산다. 또 순간순간 선택해야 한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해결해야 한다. 머리가 복잡하면 할수록 과도한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래서 급박한 일이 생겼을 때 몹시 배고픈 것은 머리속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앉아 있으면 그럴 일이 없다. 단지 관찰만 하면 된다.

 

앉아 있다 보면 이곳이 피난처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달리 피난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앉은 그 자리가 피난처인 것이다. 난리가 났을 때 피난 간다고 하는데 앉아서 눈을 감으면 그 자리가 피난처인 것이다. 요즘처럼 난리가 아닌 세상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다면 조용한 곳에 가서 눈을 감고 앉아 있어야 한다.

 

앉아서 복부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싹 잊어버린다. 그럼에도 치고 들어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다. 왔으니 손님으로서 맞이해야 한다. 알아차림 하여 내보내는 것이다.

 

좌선시간 한시간은 긴 시간이다. 알람을 설정해 놓았는데 한시간이 너무 긴 것 같다. 처음 삼십분가량은 날아 갈 듯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 진다. 체력이 되지 않으면 앉아 있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노년출가가 어렵다고 했을 것이다.

 

한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서 시간이 길다고 느껴졌다. 반면에 눈 뜨고 있을 때는 시간이 무척 빨리 가는 것을 느낀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즐기는 대상을 찾기 때문이다. 눈으로 귀로 끊임없이 즐거운 대상을 찾아 헤매기 때문에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사람의 목숨은 길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지 말라. 우유에 도취한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일은 결코 없다네.(S4.9)라고 속삭인다.

 

요람에 있는 우유를 먹으면 잠을 잘 잔다. 사람들은 즐거움에 취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술을 마시면 취기에 의하여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술집에서 밤새 놀고먹고 마시다 보면 날이 새는 것도 시간이 금방 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밤샘 좌선한다면 어떨까? 아마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픈 사람은 일각이 여삼추인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Dhp 60)라고 했다.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그는 걸어서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 그러나 가도가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에게 얼마나 남았습니까?”라고 물어본다. 그 사람은 저 산 너머 조금만 가면 나옵니다.”라고 말한다. 그 말에 힘을 받아서 달려 가듯이 가보지만 보이지도 않는다. 이번에도 오는 사람에게 물어본다. 다들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한다. 날은 어두워지고 허기는 져서 이제는 걸을 힘도 없다. 모두다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하는데 조금 간다는 길은 왜 이렇게 먼 것일까? 갈 길 바쁜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은 먼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 세상을 잘 모른다.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가르침을 접해 보지 못한 어리석은 자는 무지하기 때문에 윤회의 수레바퀴를 종식시킬 수 없다. 부처님이 설한 37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지만 그것들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왔다고 한다. 요즘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서는 유전자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디서 왔는지 따져 본다. 족보를 보고서 계속 올라가 보지만 금방 한계에 이른다. 그래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놓고 ‘이 분은 나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으로 헤아려 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어머니’식으로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빠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 버릴 것이다.(S15.1)라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왔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어머니어부터 온 것이다. 이렇게 무한소급하다 보면 어디에 이를까? 하나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창조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다. 이 세상에 자기원인을 갖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이 아버지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디엔에이에 따른 생물학적 윤회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라고 했다.

 

내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은 무명갈애때문이다. 무명으로 인하여 여기에 있게 되었고, 갈애로 인하여 다음 세상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은 즐기기에 바쁘다. 끊임없이 즐길거리를 찾는다. 즐기다 보면 마치 요람에 있는 아기가 우유에 도취되어 잠을 자는 것처럼 시간은 잘도 갈 것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아는 자들은 즐기는 삶을 살 수 없다.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S4.9)라고 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사람은 가르침의 길을 가는 사람이고, 또 한사람은 윤회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두 가지 길은 아득하다. 가르침을 아는 사람은 힘들어도 길을 알기 때문에 계속 그 길로 간다. 그러나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은 길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윤회한다. 윤회의 길은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Dhp 60)라고 했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여기가 내집 같다. 여기야 말로 피난처 같다. 여기야말로 내가 있을 곳 같다. 세상사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리니 세상을 떠난 것 같다. 미동도 않고 앉아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만 관찰했을 때 이 길 외 다른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강제로 삶을 중단시켜 버리는 것인지 모른다.

 

한번 맛을 들이면 자주 찾게 된다. 한번 앉게 되니 틈만 나면 앉는다. 앉아서 이득이 되기 때문에 앉는다. 힘들고 괴로우면 앉을 이유가 없다. 조금이라도 복잡한 일이 생겼을 때 앉는다. 마음이 심란할 때 앉는다. 앉아 있으면 동굴에 있는 것 같다. 나만의 비밀 아지트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앉아 있는 자리가 내 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 라훌라에게 다시는 세속에 돌아 가지 말라.”(Stn.339)라고 말했나 보다. 세상을 아주 싫어 하여 떠나라.”(Stn.340)라고 말했나 보다.

 

부처님은 세상을 떠나라고 했다. 그것도 아주 떠나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 중생세상을 떠나라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 중생들이 사는 세상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싫다고 하여 심산유곡으로 도망가듯이 신선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 속에 살되 세상에 물들이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 물 위로 솟아올라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라고 표현했다. 연꽃이 진흙탕속에서 피지만 오염되지 않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이 세상을 떠나라고 한 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떠나라는 것이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다. 그래서 이것들이 텅 빈 집이다.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S43.1)라고 했다. 밖의 세상을 떠나서 안의 세상에서 해법을 찾으라는 것이다.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면 피곤하다. 보기 싫은 것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은 것도 들어야 한다. 요즘 같은 괴질이 유행하는 시기에는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이 낫다. 제목만 보아도 된다. 뉴스를 봄으로 인하여 번뇌가 일어난다면 피곤한 일이다. 정치적인 일에 말려들어서 애만 태운다면 역시 피곤한 일이다. 이럴 때는 잠시 눈을 감아야 한다.

 

조용한 곳에 앉아 있으면 오기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간다. 바깥에서 해법을 찾는 것 보다 안에서 찾는 것이 더 낫다. 마침 바로 옆에 오두막 같은 장소가 있어서 틈만 나면 앉는다. 앞으로 자주 가야 할 곳이다. 즐겨 찾는 곳이 될 것 같다.

 

 

2020-03-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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