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11. 14:45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자유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세상이 본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를 몰고 일터로 가는 길에 잠시 정지했을 때 앞을 바라보았다. 늘 보던 것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십년이상 보던 대로이다. 신축건물이 들어서서 스카이라인이 바뀌긴 했지만 늘 다니는 길이다. 눈을 크게 뜨고 보자 달라 보였다.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익숙했다.

 

 

 

 

 

 

 

벗어난다는 것은

 

 

 

자유를 생각하면서 해탈을 생각해 보았다. 자유나 해탈이나 같은 말일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표현이 다를 뿐이다. 자유나 해탈이나 공통적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어디서 벗어나는 것인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속박인가? 여러가지가 있겟지만 감각적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테라가타에서 본 목갈라나존자의 게송이 생각났다. 테라가타 목갈라나의 육십련시집에 이런 게송이 있다.

 

 

 

 

 

해골로 이루어지고

 

살과 근육으로 얽혀진 오두막

 

끔찍하다! 악취가 가득 한 것!

 

타자의 지체를 자기의 소유로 삼는구나.”(Thag.1156)

 

 

 

피부로 엮어진 분뇨의 자루,

 

가슴은 혹이 달린 악귀,

 

그대의 몸에는 아홉 구멍이 있어,

 

언제나 부정한 액체가 흐른다.”(Thag.1157)

 

 

 

그대의 몸에는 아홉 구멍이 있는데,

 

악취를 풍기고 오물도 엮여져 있다.

 

실로 청정을 원하는 수행승이라면,

 

분뇨를 피하듯, 그것을 피해야 하리.”(Thag.1158)

 

 

 

내가 그대를 알아보듯,

 

사람들이 이처럼 알아본다면,

 

우기에 분뇨구덩이를 피하듯,

 

사람들은 그대를 멀리 피해 가리라.”(Thag.1159)

 

 

 

 

 

이 네 개의 게송은 목갈라나존자를 유혹하려는 기녀에게 한 말이다. 목갈라나 존자는 우리 몸에 대하여 악취가 가득한 부정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념처경(D22)에 따르면 우리 몸은 머리카락 등 32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는 이 몸속에는 머리카락. 몸털,…위장, , 뇌수, 담즙, 가래, 고름, , ,…관절액, 오줌이 있다.’라고 발가락 위에서부터 머리카락 아래에 이르고 피부의 표면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오물로 가득한 것으로 개별적으로 관찰한다.”(D22.7)라고 되어 있다.

 

 

 

혐오적인 본성을 지닌 육체

 

 

 

대념처경에 따르면 우리의 몸은 똥자루와 같다. 그래서일까 목갈라나 존자도 게송에서 피부로 엮여진 분뇨의 자루”(Thag.1157)라고 했다. 그런데 분뇨자루는 찢겨져 있다는 것이다. 찢겨져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오물이 줄줄 샐 것이다. 그것도 아홉 군데가 찢겨져 있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신체에 있는 아홉 가지 구멍을 말한다. 두개의 눈구멍, 두 개의 귀구멍, 두 개의 코구멍, 한 개의 입구멍, 한 개의 항문, 한 개의 생식기를 말한다. 그래서 아홉 구멍이 있어, 언제나 부정한 액체가 흐른다.”(Thag.1157)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겉모습에 집착한다. 특히 여인의 아름다운 신체에 집착한다. 눈이 아름다우면 눈에 집착하는 등 신체의 특정 부위에 집착한다. 목갈라나존자를 유혹하려는 기녀는 가슴이 포인트였던 것 같다. 그래서 목갈라나존자는 가슴은 혹이 달린 악귀(uragaṇḍapisācinī)”(Thag.1157)라고 했다. 화장을 하여 얼굴은 예쁘지만 악귀처럼 보인다면 정떨어질 것이다. 악귀는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기녀가 유혹하여 넘어 갔을 때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감각적 재난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가슴에 두 개의 혹이 난 무서운 존재로 본 것이다.

 

 

 

사람의 몸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한꺼풀만 벗겨 놓으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실험실에 있는 죽은 자의 신체를 보고서 애착을 가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사람의 몸은 늙으면 더 이상 애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녀출신 암바빨리 장로니는 자신의 젊었을 때의 아름다운 가슴에 대하여 “위로 둥글게 부풀러 올라 봉긋하여 예전에 나의 두 유방은 아름다웠지만, 물 없는 물주머니처럼 늘어졌으니, 진리를 말하는 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Thig.265)라고 했다.

 

 

 

목갈라나 존자는 기녀에게 몸의 허물에 대하여 말했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기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기녀는 목갈라나 존자를 존경하면서 위대한 영웅이시여, 수행자여, 그대가 말한대로 그렇습니다. 늙은 황소가 진흙속에 빠지듯, 어떤 자들은 여기에 빠집니다.”(Thag.1160)라고 말했다. 본래 혐오적인 본성을 지닌 육체에 어떤 자들은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마음에 의한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

 

 

 

수행자들은 자유를 말한다. 그것도 대자유를 말한다. 대자유인이 되면 걸림 없는 삶을 살 것이다. 그렇다고 막행막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자유는 해탈과 동의어이다. 이는 벗어남을 말한다. 특히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난 것이다.

 

 

 

오욕락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더 이상 자유인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해탈을 추구한다. 대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탈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에 의한 해탈(ceto-vimutti: 心解脫)’이 있고, 또 하나는 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i: 慧解脫)’이 있다.

 

 

 

니까야에는 심해탈과 혜해탈에 대하여 무수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두 가지 해탈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선호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이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버리기 위한 방도가 있고 길이 있는데, 왜 어떤 수행승은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룬 사람이 되고 어떤 수행승은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사람이 됩니까?(M64) 라고 물어 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여기 그들의 성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M64) 라고 답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타고난 성향을 인정했다. 이는 성향에 따라 해탈하는 방법이 다름을 말한다. 똑같이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五下分結)을 부수는데 있어서 어떤 이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는 것이 더 낫고, 또 어떤 이는 지혜에 의한 해탈을 닦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의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는 성향이 달랐다. 사리뿟따는 지혜에 의한 해탈을 닦아서 아라한이 되었고, 목갈라나 존자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어서 아라한이 되었다.

 

 

 

사마타로 끊어 버리기

 

 

 

심해탈은 마음을 닦고 혜해탈은 지혜를 닦는다. 이는 멈춤과 통찰로 설명될 수 있다. 대상에 집중하면 오장애가 억압된다. 그래서 마음의 해탈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것이다. 선정에서 벗어나면 또 다시 퇴전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디까존자는 무려 여섯 번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했다.

 

 

 

상윳따니까야에 고디까의 경’(S4.23)이 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 고디까는 일곱번째로 일시적으로 마음의 해탈을 이루었을 때 이제 나는 여섯 번이나 일시적인 마음에 의한 해탈에서 물러났다. 나는 차라리 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어떨까?”(S4.23)라며 자결했다. 퇴전하기 전에 가장 청정한 상태에서 칼로 동맥을 자른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처님은 고디까가 자결한 이씨길리산의 검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제자들과 함께 올라갔다. 부처님은 고디까의 자결에 대하여 죽음의 군대를 쳐부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갈애를 뿌리째 뽑아서 고디까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네.”(S4.23)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고디까는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을 성취했음을 말한다. 이렇게 한번에 두 가지를 성취하는 것에 대하여 사마시시(samasisi)라고 한다. 가장 청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아라한과 열반이라는 얻기 힘든 두 가지를 이룬 것이다.

 

 

 

대자유인이 되려면 끊어 버려야 한다. 마음의 장애를 끊어 버리는 것이다. 끊는 방법에는 멈추어서 끊는 방법이 있고, 통찰해서 끊는 방법이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말한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오장애가 끊어진다. 그래서 사마타에 대해서는 멈춤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마음이 닦여진다. 마음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탐욕이 있다면, 그것이 끊어져 버린다.” (A2.30)라고 했다. 사마타수행을 하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악의와 원한,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 이렇게 다섯가지 장애가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잠재경향을 뿌리 뽑으려면

 

 

 

궁극적으로 잠재경향을 뿌리 뽑아야 한다. 뿌리까지 뽑으려면 위빠사나수행을 해야한다. 그래서통찰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지혜가 닦여진다. 지혜가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무명이 있다면, 그것이 끊어져 버린다.(A2.30)라고 했다.

 

 

 

선정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다. 그런데 네 가지 선정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도 통찰수행만으로도 지혜의 의한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유행자 쑤시마의 경’(S12.70)에서, 유행자 쑤시마가 육신통과 같은 초월적인 경지에 이른 자만이 해탈을 이룰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물어본다. 이에 부처님 제자들은 단호하게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합니까? 벗이여 쑤씨마여, 우리들은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것입니다.(S12.70)라고 말한다. 거듭되는 질문에도 벗이여, 쑤시마여, 그대가 그것을 알거나 모르거나 여기 우리는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것입니다.”(S12.70)라고 말한다.

 

 

 

유행자 쑤시마는 선정없는 혜해탈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신통과 관련된 선정이다. 쑤시마는 부처님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쑤씨마여, 사실에 관한 지혜만 앞서면 열반에 관한 지혜는 따라오는 것이다.(S12.70)라고 말했다. 네 가지 선정 없이도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선정없이도 아홉가지 출세간법을 달성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는사실에 관한 지혜(dhammaṭṭhitiñāa: 法住智)’로 알 수 있다. 삼법인을 통찰하는 것이다. 법주지(法住智)는 모든 법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통찰하는 지혜를 말한다. 이는 네 가지 선정의 상태를 성취하지 않아도 지혜가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또 네 가지 선정을 성취해도 최종적으로는 지혜에 의한 해탈로 아홉가지 출세간법, 즉 사향사과와 열반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위빠사나수행만으로도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이룰 수 있을까? 쑤시마의 경에 따르면 그렇다고 본다. 네 가지 선정없이도 위빠사나통찰수행만으로도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법구경에서는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된다. (Dhp. 372)라고 했다. 선정없이는 혜해탈을 이룰 수 없음을 말한다. 혜해탈은 삼매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위빠사나 역시 삼매를 필요로 한다.

 

 

 

어떤 수행이든지 집중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은 관찰수행이기 때문에 네 가지 선정을 다 이루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집중을 필요로 한다. 이를 카니까사마디(khaika samādhi)라고 한다.

 

 

 

위빠사나는 움직이는 것,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생멸하는 것을 관찰하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수 없다. 현상에 대하여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에 순간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순간집중으로 통찰지를 얻은 수행자에 대하여 수카위빠사따(sukkhavipassata: 乾觀者)라고 한다. 네 가지 선정없이도 순간삼매로 지혜에 의한 해탈이 가능함을 말한다. 잠재성향을 뿌리 뽑으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루어야 함을 말한다.

 

 

 

현존(現存)을 말하는 자들은

 

 

 

세상이 새롭게 보일때가 있다. 그것은 잠시 나를 내려 놓았을 때이다. 장엄한 풍광을 보았을 때 가능하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을 때 일시적으로 나를 잊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미얀마 바간에서 천불천탑을 보았을 때 아무생각 없이 그저 바로 보았다고 했다. 이를 속된 말로 멍때렸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일시적 해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일시적 해탈은 또다른 말로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해탈이라고 볼 수 있다. 삼매 상태에서는 욕망, 분노 등 다섯 가지 장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스펙터클한 풍광을 멍하니 바라보았을 때 일시적으로 나를 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새롭게 보일 때가 있다. 늘 다니는 길에서 건물 등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현존(現存)’이라고 해야 할까?

 

 

 

현존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지금 있는의 뜻이다. 영어로는 ‘exist’ ‘be in existence’의 뜻이다.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현존에 대하여 써 놓은 글을 보았다. 영국의 재가불교수행자 스티븐 배철러가 쓴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에 따르면, 저자는 어느 날 현존을 경험했다고 한다.

 

 

 

스티븐 배철러는 한국에서 선수행자로 산 적이 있다. 1980년대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의 지도를 받아 외국인 스님으로 3년을 산 것이다. 이전에는 달람살라에서 티벳승려로 6년을 살았다.

 

 

 

저자는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기보다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81p)라고 의문했다고 한다. 어느 날 숙소로 가는 길에 “갑자기 모든 것이 완전히 낯선 느낌이 강력하게 솟구쳐 걸음을 멈추었다.”라고 표현했다. 이와 같은 낯선 느낌에 대하여 삶의 바다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의 꼭대기로 올려진 것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느낌에 대하여 “그것은 뭔가 아무것도 아니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가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라고 했다.

 

 

 

현존을 말할 때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튜브를 보면 이것뿐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하여 종을 치기도 하고 책상을 탕탕 치기도 한다. 그동안 깨닫기 위하여 애를 썼는데 이것을 알고 나서 너무 허무했다고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음에도 다른 데서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도 보지말고 수행도 필요없다고 한다. 자신의 법문만 들으면 이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현존을 말하는 것일까?

 

 

 

스티븐 배철러는 현존체험에 대하여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하다고 했다. 일상에 늘 마주하던 것들이 어느 날 낯설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거기에 그렇게 있다는 것에 대하여 새롭게 보였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언가 찾으려고 돌아다녔는데 지금 이렇게 있는 것을 보고서 이것타령을 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것도 깨달음이라 볼 수 있을까?

 

 

 

마음으로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때가 있다. 이는 눈을 크게 뜨면 가능하다. 눈을 크게 동그랗게 뜨면 새롭게 보이는 느낌을 받는다. 그 순간만큼은 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마음이 없다. 마치 스펙터클한 광경에 넋을 잃고 보는 것과 같고, 바간의 천불천탑을 멍때리면서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그냥 그대로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더하고 뺄 것도 없다. 늘 보던 것을 좀더 큰 눈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강렬한 인상이다. 그 순간만큼은 호불호와 쾌불쾌를 떠나 있다. 오로지 현상을 아는 마음만 있는 것 같다. 마치 좌선할 때 집중이 되면 감각은 사라지고 아는 마음만 남아 있는 것 같다.

 

 

 

눈을 크게 떠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을 때 이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더하고 뺄 것도 없다. 그 순간만큼은 긍정적이다. 평소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도 그 자리에 있을 만해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나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바깥 세상을 있는 그대로를 아무런 저항없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여기서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야타부따(yathābhūta)’를 말한다. 야타(yathā)‘as; like, just as’의 뜻이고, 부따(bhūta)‘become; existed’의 뜻이다. 그래서 야타부따는 있는 그대로라고 번역된다.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야타부따냐나(yathābhūtañāa)라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여실지(如實知)라고 한다.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는 아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멈춘다면 단지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전체적으로 아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알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에 대하여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adassana)라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한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은 지혜에 해당된다. 여실지는 있는 그대로 아알고 보는 지혜이다. 이는 제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주관이나 편견이 개입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앎āa: )과 봄(dassana: )이 함께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런 앎과 봄에 대한 신호등의 비유가 있다.

 

 

 

여기 신호등이 있다. 파란불일 때 건너야 하고, 빨간불일 때는 멈추어야 한다. 이런 상식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그러나 봉사인 자에게는 불이 보이지 않는다. 파란불일 때 건너야 한다는 앎은 있지만 눈이 멀었기 때문에 봄이 없어서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서너살 아이에게는 파란불과 빨간불을 식별할 수 있는 봄은 있다. 그러나 어느 때 건너야 하는지에 대한 앎은 없다. 어린 아이가 건널목에 섰을 때 사고가 나기 쉽다.

 

 

 

알고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알기만 하고 보지 못한다면 장님과 같고, 반대로 보기만 하고 알지 못한다면 어린아이와도 같다. 제대로 보려면 눈만 크게 떠서는 안된다. 현상을 알려면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모든 현상에 대하여 앎과 봄을 지닌 자(sabbesu dhammesu ñāadassī)” (Stn.478)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보는 자라 할 것이다. 이를 있는 그대로 실제를 알고 보는 지혜,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 ñāadassana)’이라 한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고 세상을 보면 달리 보인다. 새롭게도 보인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현존이라거나 이것이라고 하여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물질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히 세상을 큰 눈으로 보면 달리 보인다. 모든 것이 새롭고 거기에 있어야 할 것처럼 보이고, 거기에 있는 것이 자연스런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마음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오염원이 남아 있는 한 퇴전할 것이다. 고디까존자가 퇴전과 불퇴전을 여섯 번 거듭하다가 가장 청정해져 있을 때 동맥을 그었다. 이는 마음의 오염원을 얼마나 없애기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마음의 오염원이 남아 있는 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오염원을 완전히 소멸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멈추어서 관찰해야 한다. 순간순간 관찰하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볼 수 있다.

 

 

 

마음의 오염원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것이다. 오온이 조건에 따라 조건소멸한다. 그래서 마하사사야도의 위빠사나게송이라 불리우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현상이 일어나는 즉시 싸띠하면 본 성품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본 성품을 알아야 생-멸을 볼 수 있다. 무상을 보면 고를 알고, 고를 보면 무아를 보고, 무아를 보면 열반에 확실히 정박한다. 열반을 보면 사악도를 영원히 벗어난다.”

 

 

 

 

 

상윳따니까야 칸다상윳따에 실려 있는 것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오온에 대하여 생멸을 알면 더 이상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목갈라나존자가 기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과 같다.

 

 

 

신체의 특징 부위에 집착한다면 매여 있는 것이다. 마치 어느 한량이 비구니의 눈에 매료되어 감각적 노예가 되는 것과 같다. 비구니가 아름답다는 눈을 떼어서 보여주었을 때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 순간부터 혐오의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몸도 피부를 벗겨 부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마치 에이아이(A.I)의 피부를 벗겼을 때 기계장치가 나오는 것과 같다.

 

 

 

자유인이 되려면 감각적 욕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아도 마음의 눈을 뜨고 오염원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나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나 내면의 오염원에 대한 소멸을 말하지 않는다.

 

 

 

육체의 눈을 키우는 것보다 마음의 눈을 계발해야 한다. 법안이 생겨서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을 때 흔들림 없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알고 보기 때문에 어느 경우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감각적 욕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육체의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 세상을 알고 보았을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마치 쌍무지개 뜨는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처럼.

 

 

 

 

 

2020-03-1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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