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수행자의 위엄

담마다사 이병욱 2020. 4. 24. 19:03

 

수행자의 위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일까? 누군가는 영화배우를 떠 올릴 것이다. 영상에서 보는 배우의 매력에 빠져 그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수행하는 사람이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앉아서 수행하는 사람이다. 좌선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고요하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안정감이 있어 보이는 것은 피라미드를 보는 것 같다. 불상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명상에 잠긴 불상의 모습을 보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수행자의 위엄

 

수행자의 위엄은 좌선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행에서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앗사지 존자의 경행이다. 사리뿟따존자는 앗사지 존자의 경행을 보고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앗사지 존자의 경행에 대하여 위의가 있다고 했다. 앗사지 존자의 탁발하는 모습에 대하여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바라보거나 돌아보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단정하게 눈을 아래로 향하고 위의를 갖추고 들어갔다.”(Vin.I.39)라고 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앗사지 존자의 경행을 보고서 세상에 거룩한 님이나 거룩한 경지로 가는 길을 갖춘 님이 있다면, 이 수행승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앗사지 존자는 거룩한 님, 즉 아라한이 아니었다. 단지 부처님 가르침대로 따르는 출가한지 얼마되지 않은 새내기 수행승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경행하는 것에는 위의가 있었다.

 

사리뿟따 존자는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물어보았다. 마치 새내기 수행승에게 한 수만 알려 달라는 듯이 물은 것이다. 그러자 새내기 수행승이었던 앗사지 존자는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나며 그 원인을 여래가 설합니다.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 또한 위대한 수행자께서 그대로 설합니다.”(Vin.I.40)라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전달했다.

 

앗사지 존자가 전달한 내용은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는 앗사지 존자가 전한 내용을 나름대로 소화했다. 그래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Vin.I.40)라는 말로 정리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송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라는 연기송을 축약한 것이다.

 

생겨나는 데는 원인이 있지만

 

앗사지 존자는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난다.(ye dhamma hetuppabhava tesam)”  고 했다. 무엇이든 생겨난 것에는 원인이 있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인과(因果)에 대한 것이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생겨나는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했다.

 

소멸하는 것에도 원인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우 조띠까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에 따르면 어떤 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원인이 필요하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원인이 없습니다.”(163)라고 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종소리를 예로 들었다.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종을 쳐야 한다. 종을 치면 종소리가 나고 종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종을 치는 것은 원인이 되고 종소리가 나는 것은 결과가 된다. 이는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난다.”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종소리가 사라지는 것에는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 조띠까 사야도는 열역학 제2법칙을 들었다. 엔트로피법칙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붕괴된다.”라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 법칙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차 없이 진행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이에 원인은 없다. 자연의 법칙이 본래 그런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생겨나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과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질서를 유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한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끊어지면 가차없이 무자비하게 파괴된다. 이것이 자연의 속성이고 본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무엇이든지 생겨나는 것은 엔트로피법칙에 역행하는 것이 때문에 네겐트로피가 된다. 생겨나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엔트로피가 된다.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난다는 것은 일어남에 대한 것이다. 일어남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사라짐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Vin.I.40)라고 한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 말 한마디에 크게 깨달았다. 스승인 싼자야의 곁을 떠나 부처님에게 귀의한 것이다.

 

싼자야의 가르침은 무엇이든지 애매모호했다. 싼자야의 혼란스럽고 회의론적인 이론 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명확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앗사지 존자가 전해 준 짤막한 연기법송을 듣고서는 지난 수천억 우주기 중에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Vin.I.40)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주기는 깝빠(kappa)를 번역한 것으로 겁()을 말한다. 일겁은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엄청난 기간이다. 그런데 수천억우주기라고 했다. 부처가 출현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개념을 보지 말고 실제를

 

사리뿟따가 정리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라고 말한 것은 연기법과 사성제의 이해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초전법륜경(S56.11)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꼰당냐 존자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꼰당냐 존자도 똑같이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삽반땅 니로다담만띠라며,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라고 진리의 눈(dhammacakkhu: 法眼)’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에서 고와 고소멸의 해법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 오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로 분석하여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정신-물질(nāmarūpa) 현상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우 조띠까 사야도는 어떤 정신-물질 현상도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집니다.”(163)라고 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에 대하여 빠라맛타(paramattha)라고 했다.

 

빠라맛타는 실제이다. 실제가 있다면 개념도 있을 것이다. 개념을 빤냣띠(paññatti)라고 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실제를 보는 것이다. 다른 말로 구경법을 보는 것이다. 경행을 할 때 발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닿는 느낌, 즉 딱딱함이나 부드러움을 보는 것이다. 발모양을 보는 것은 빤냐띠이고 딱딱함이나 부드러움을 보는 것은 빠라맛타이다. 그래서 개념을 보지 말고 실제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빠라맛타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을 빠라맛타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한다. 빠라맛타의 고유의 특징은 딱딱함이나 부드러움과 같은 땅의 요소이다. 탐욕이나 성냄도 빠라맛타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이런 빠라맛타는 총 82가지가 된다. 추상적인 물질 10가지를 빼면 위빠사나 수행으로 관찰가능 한 것은 72가지가 된다. 마음부수 52가지, 물질 18가지, 마음 1가지, 열반 1가지를 말한다.

 

구경법은 다름아닌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고유성질을 가진 구경법을 보는 것이다. 그런 구경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원인을 가져서 생겨난 구경법은 사라질 때는 원인 없이 사라진다. 조건발생할 뿐이지 조건소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사라질 때는 열역학 제2법칙대로 자연의 본성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 무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구경법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면 머무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발생하여 유지하여 파괴될 때 머무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머무는 현재시간에 대하여 송곳 끝의 겨자씨와 같다.”(Vism.20.72)라고 했다.

 

송곳 끝에 있는 작은 겨자씨가 머무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허공의 섬광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Vism.20.72)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찰라생찰라멸을 말한다.

 

생멸은 찰라지간에 일어난다. 그래서일까 우 조띠까 사야도는 정신-물질 현상들이 아주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므로 그 속도만큼 빠르게 보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198)라고 했다. 수행을 하여 관찰하지 않으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물질은 1초에 일억번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한다. 정신은 더 빨라 두 배라고 한다. 이처럼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물질 현상을 모두 관찰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순간집중을 하여 1초에 10번 정도 관찰한다면 무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에 따르면 무상의 가르침이 있다. 경에 따르면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고 했다. 아주 짧은 시간만이라도 무상을 지각한다면 그 어떤 과보 보다도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가락 튕기는 순간은 어느 정도 짧은 것일까? 이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우 조띠까 사야도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1초에 10번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1초에 10번 무상을 볼 수 있다면 큰 통찰지를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1초에 10번 무상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무상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에서 손가락 튕기는 순간에 무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수행의 경지에 올라선 자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무상을 지각해야

 

무상을 본다는 것은 순간적인 관찰을 필요로 한다. 순간집중을 요하는 것이다. 이를 카니까사마디(khaikasamādhi)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상을 지각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우 조띠까 사야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과거를 생각하고, 과거에 일어난 것이 사라진 것을 보고 무상을 이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지혜가 아니고 무상에 대한 통찰이 아닙니다. 아닛짜, 즉 무상의 진정한 통찰은 지금 일어나는 것이어야 합니다.”(우 조띠까 사야도, 마음의 지도, 195)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제까지 무상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상은 지금 일어나는 것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무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무상이라고 하고, 늙어 병들면 인생무상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상은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변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무상을 지각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알아차림 하고 있는 수행자에게서 고요와 위엄을 본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도록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31)

 

 

2020-04-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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