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매순간이 생일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5. 6. 17:01

 

매순간이 생일날  



생일날은 일년에 한번 있다. 그렇다면 일년에 한번 생일상을 받는 것이 맞을까? 불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매일매일 생일일 수 있다.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정신-물질 현상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매순간 현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행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도 행선했다

 

청정도론에 행선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놀라운 일이다. 수행은 오로지 좌선만 있는 줄 알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행선도 있었던 것이다. 이는 행선과 관련된 경이 있어서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A5.29)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행선을 하면 집중이 유지되어서 좌선 등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행선은 부처님도 하던 것이다.

 

테라가타는 장로수행승들의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모아 놓은 경전이다. 부처님의 직제자 중의 하나인 쏘빠까 장로는 “누대의 그늘에서 최상자께서 경행하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그에게 다가가 나는 최상자께 예경을 드렸다.(Thag.480)라고 했다. 여기서 최상자(naruttama)는 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도 평소 경행(cakamanta) 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경행했다는 이야기는 율장에도 나온다. 율장대품 야사의 출가이야기편을 보면 “그때 세존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노천에서 경행하고 있었다.(Vin.I,15) 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부처님은 틈만 나면 경행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행했을까? 율장대품을 보면 “한때 세존께서 노천에서 신발도 없이 경행했다. (Vin.I,87)라는 대목이 있다. 부처님이 경행할 때는 맨발로 한 것이다.

 

행선할 때는 맨발로

 

경행 할 때는 맨발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율장에 따른 것이다. 율장은 수범수제로 형성된 것이다. 맨발경행도 역시 수범수제에 따른 것이다. 율장을 보면 항상 말썽을 일으키는 비구들이 등장한다. 이를 여섯 무리의 비구승들이라고 하는데 한역으로는 육군비구(六群比丘)라고 한다.

 

어느 날 여섯 무리의 수행승들이 신발을 신고 경행했다. 이를 본 수행승들이 “스승께서 신발도 없이 경행하고 장로 수행승들도 신발없이 경행하는데, 신발을 신고 경행한 것이 사실인가? (Vin.I,87)라며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궤범사나 궤범사와 같은 자나 친교사나 친교사와 같은 자가 신발도 없이 경행하고 장로 수행승들도 신발 없이 경행할 때에 신발을 신고 경행해서는 안된다. 경행하면 악작죄가 된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승원안에서 신발을 신어서는 안된다. 신는다면, 악작죄가 된다. (Vin.I,87)라고 했다.

 



 

부처님은 두 가지를 말씀했다. 하나는 경행할 때 신발을 신어서는 안되고, 또하나는 승원에서 신발을 신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경행할 때 신발을 신어서는 안된다. 왜 그럴까?

 

경행할 때 신발을 신고 경행한다면 발바닥에서 느끼는 감촉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발바닥의 감촉과 느낌을 통하여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또는 가벼운지 무거운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인데, 신발을 신고 경행한다면 감촉과 느낌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경행할 때 신발을 신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여섯 단계 행선법

 

행선 또는 경행이라고 번역되는 빠알리어는 짠까만따(cakamanta)이다. 영어로는 ‘walking up and down’의 뜻이지만 수행처에서는 ‘walking meditation’이라고 한다. 보수행(步修行)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마하시전통에서는 행선을 중요시한다. 수행시간표를 보면 좌선 한시간에 행선 한시간이 일반적이다.

 

미얀마 양곤에 있는 마하시선원에 가면 마하시사야도가 머문 거처가 있다. 그곳에도 경행대가 있다. 길이가 십미터 이상 되는데 재질이 단단한 목재로 되어 있다. 맨발로 행선을 하면 발바닥의 감촉이 좋을 것 같은 경행대이다.

 




행선과 관련하여 놀랍게도 청정도론에서 행선방법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다. 청정도론 길과 길 아님에 관한 앎과 봄의 청정(道非道知見淸淨)’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 다음에 한걸음 보행하는 경우에 1)들어 올림, 2)앞나아감, 3)성큼옮김, 4)아래내림, 5)내려디딤, 6)바닥누름의 여섯 부분으로 나눈다.”(Vism.20.62)

 

 

청정도론에서는 6단계 행선을 소개하고 있다. 행선에는 2단계, 3단계, 4단계, 5단계 등이 있는데 가장 세밀한 것이 6단계이다. 여섯 단계로 행선하면 알아차림 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해야 할 것이다.

 

행선에는 크게 발을 올림과 내림이 있다. 이때 사대를 알 수 있다. 발을 들어 올릴 때는 땅의 세계와 물의 세계가 열등하고 불활성적이고, 다른 두 세계는 우월하고 활성적이다.”(Vism.20.64)라고 했다. 발을 들 때는 가볍고 경쾌하기 때문에 화대와 풍대가 우세하고, 반면에 지대와 수대가 열세인 것이다. 발을 내릴 때는 반대가 된다.

 

행선을 통하여 지, , , 풍 사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이는 궁극적 실제라 부리우는 빠라맛타담마를 아는 것과 같다. 개념(paññatti)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감촉과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행선을 할 때는 발모양을 보지 말고 감촉과 느낌을 보라고 말한다. 수행보고 할 때도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라고 한다. 행선을 할 때 가벼운지 무거운지, 부드러운지 딱딱한지에 대하여 감촉과 느낌을 말해야 제대로 수행보고 하는 것이다.

 

행선으로 통찰하기

 

행선을 하는 또 하나 목적은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 ‘들어올림에서 생겨난 세계들과 거기서 파생된 물질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앞나아감에 도달하지 않고 바로 그곳에서 소멸한다.”(Vism.20.65)라고 했다. 이는 여섯 단계 행선에서 모두 적용된다. 이처럼 각단계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와 같이 그때그때의 경우에 생겨난 것들이 각각의 다른 부분에 도달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경우에 각 마디, 각 결절, 각 구획에서 마치 달구어진 그릇에 던져진 참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 형성들이 부수어진다. 그러므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Vism.20.65)

 

 

행선을 함으로 인하여 무상, , 무아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달구어진 그릇에 던져진 참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것처럼이라고 했다. 행선 각 단계마다 깨가 터지는 것처럼 생겨난 것들이 조각나서 사라지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섬세하게 관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각 동작에 대하여 순간집중해야 할 것이다.

 

각 동작에서 발생되는 현상은 다음 동작으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속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이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짐을 말한다. 지금 일어나서 지금 사라짐을 말한다. 모든 움직임이 그렇다는 것이다. 행선 6단계에서 각 단계마다 정신-물질적 현상이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조건발생과 찰나발생을 관찰하면

 

행선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 , , 풍 사대와 같은 궁극적 실제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상들이 생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현상들이 생멸과 관련하여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건발생을 관찰하면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또한 조건적으로 발생을 관찰하여,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통해서 상속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이해하는 까닭에, 인과의 동일성의 이치가 명료해진다. 이때 더욱 철저하게 허무주의를 버리게 된다.”(Vism.20.102)라고 했다. 현상들이 매번 조건발생하여 인과로상속하는연기의 법칙을 보고서 절대무를 주장하는 허무주의가 거짓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주의는 어떻게 극복될까?

 

찰나발생을 관찰하면 영원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찰나적으로 발생을 관찰하고 항상 새로운 것이 생성하는 것을 이해하는 까닭에, 그것의 인과의 차별의 이치가 분명해진다. 이때 철저하게 영원주의를 버리게 된다.”(Vism.20.102)라고 했다. 항상 찰나발생하고 곧바로 소멸했을 때 어떤 변치 않는 개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래서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버리게 된다. 영원주의가 거짓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현상들이 조건발생하고 찰나발생하는 것을 알게 되면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는 버려지게 된다. 무작주의(akiriyadiṭṭhi)를 버리는 것이다. 무작(無作)은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인과의 부정이다. 그래서 허무주의나 영원주의는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뿌리가 없는 견해와 같은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견이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을 설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M135)라고 하여 작론을 설했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은 업의 상속자임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을 설했기 때문에 스스로 ‘작론자(kiriyavādin)’라고 했다.

 

항상 새로운 것들이

 

모든 정신현상과 물질현상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진다. 소리를 예로 든다면 소리를 듣고 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소리를 예로 든다면 소리를 듣고 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소리를 아는 의식도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모든 것은 지속되지 않고, 모든 것은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아닛짜(무상)와 둑카(불만족)에 대해 확신합니다.”(마음의 지도, 169)라고 했다.

 

한순간에 일어난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지금 이순간에 찰라적으로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찰나생찰나멸 할 때 머무는 시간은 매우 짧다. 섬광처럼 나타났다가 그 즉시에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자아가 있을 수 없다. 인과의 연속을 통해서 정신적-물질적 현상만이 나타날 뿐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이와 같은 생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와 같이 이러한 사실들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까닭에 항상 새로운 것으로서 형성들이 나타난다.”(Vism.20.104)

 

 

법들은 항상 새롭게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머문다고 했다. 어떻게 잠시 머무는가? 청정도론에 따르면  일출시의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위에 그은 막대기의 흔적처럼,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번개처럼, 잠시 지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환술, 아지랑이, , 선화륜, 신기루, 파초 등으로 견실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Vism.20.104)라고 했다.

 

빗방울 관찰로 통찰을

 

여름 장마철에 폭우가 내리면 비가 세차게 바닥을 때린다. 그때 빗방울은 포말과 함께 사라진다. 그것도 여기저기서 무수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내리는 비보다는 포말을 그리며 사라지는 현상이 더 잘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관찰하고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보는 즉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관찰하고 있는 마음도 포말과 함께 동시에 사라진다.

 

빗방울은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오래 머물지 않고 땅바닥을 때리자마자 사라진다. 마치 마치 달구어진 그릇에 던져진 참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 형성들이 부수어지는 것이다. 그런 빗방울에 대하여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빗방울을 관찰하는 마음도 동시에 사라진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정신과전문의 전현수 선생은 사마타위빠사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 물질을 가지고 해요. 물질을 대상으로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구나’라고 무상이라는 것을 물질을 대상으로 알아요. 이것이 충분히 보아지면 그 다음은 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또 봐요. 그러면 또 아는 마음도 일어나고 사라져요. 그러면 또다시 그 의식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아는, 정신이 무상하다고 아는 마음을 또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중에는 사라짐만 계속 지켜보게 되요.(전현수박사, 사마타-위빠사나 강연에서)

 

 


전현수선생은 무너짐의 지혜(bhagañāa)’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물질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했을 때 물질도 생멸하지만 동시에 관찰하는 마음도 생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빗방울을 관찰했을 때 사라짐만 보이듯이, 마음을 관찰하면 역시 사라짐만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무너짐을 관찰하면 통찰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어떤 통찰인가? 청정도론에 따르면 무너짐의 지혜에 대하여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까닭에 마음이 생겨났다가 부서지는데, 그 대상을 성찰하여 부서짐을 관찰한다.”(Vism.21.11)라고 했다. 전현수 선생이 말한  정신이 무상하다고 아는 마음을 또 대상으로 합니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지금 여기에서 관찰되는 무상

 

빗방울과 같은 물질을 관찰하면 통찰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서 무상을 관찰한다. 즐거운 것이 아니라서 괴로운 것이라고 관찰한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한다.”(Vism.21.11)라고 했다. 무상, , 무아를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포말의 경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했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 물거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물거품의 실체일 수 있는가?(S22.95)

 

 

물질을 관찰하는 것에는 빗방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출시의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위에 그은 막대기의 흔적처럼,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번개처럼, 잠시 지속하는 것을 관찰하면 무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무상은 지금 여기에서 관찰되는 무상을 말한다. 찰라생멸하는 무상이다. 이는 자아를 가진 자가 자연무상과 인생무상과 같은 과거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생멸하는 무상이다.


순간적으로 변하는 무상을 보아야 통찰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현상이 머무는 것 없이 찰나생찰나멸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무상, , 무아의 통찰이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고 했을 것이다. 이는 모든 공덕중에서 위빠사나 수행공덕이 가장 수승함을 말한다.

 

중간적 존재가 없는 이유

 

모든 현상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런데 시간은 매우 짧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일까? 송곳끝에 있는 겨자씨처럼 매우 짧게 머문다고 했다. 비가 내릴 때 빗방울이 바닥을 때리면서 사라지는 것과 같은 매우 짧은 시간이다.

 

마음이 머무는 기간은 물질이 머무는 기간 보다 더 짧다. 그래서 청정도론을 완역한 전재성 선생은 청정도론 머리말에서 발생-유지-파괴의 찰나는 인정되지만, 유지는 단지 발생에서 파괴로 전환되는 찰나에 섬광처럼 존재하는 것이다.”(청정도론, 머리말)라고 썼다. 이는 심찰나에 대한 것이다. 마음은 섬광처럼 매우 짧게 존재하기 때문에, 즉 찰나멸하기 때문에 공시적으로는 극미취(깔라빠)와 통시적으로는 통각(자와나)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마음이 순간적으로 존재하여 찰나멸한다면 중유가 있을 수 없다. 마음의 주재자 또는 자아가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그것들에게 중간자는 없고, 그것들에게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Vism.19.23)라고 했다.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중간적 존재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조건발생하고 찰나생멸하는 오온에서는 인과에 따른 오로지 명색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머무는 기간이 순간적이기 때문에 중간적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운데 윤회의 행위자인 신들이나 하느님은 없다. 원인이자 연료이자 조건인 순수한 사실들만이 일어난다.”(Vism.19.20)고 했다. 이렇게 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는 것도 이것도 일종의 윤회일 것이다.

 

두 가지 윤회가 있는데

 

우리는 윤회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윤회를 뜻하는 삼사라(sasāra)는 돌고돈다는 뜻이 있다. 돌고 도는 것은 일생윤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적용된다. 이는 우리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말한다. 이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불변하는 아뜨만이 있어서 금생의 육신을 버리고 마치 새옷을 갈아 입듯이 새로운 육신으로 갈아타는 재육화(reincarnation: 還生)하고는 다른 것이다.

 

불교의 윤회는 무명과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rebirth: 再生)이다. 환생과 재생은 다르다. 환생하려면 영혼과 같은 불변하는 자아를 필요로 하지만, 재생은 특정한 개체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연기적 흐름이다.

 

윤회에 대하여 근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매 찰나 생멸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이다. 또 생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 생에서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일어났다가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다음 생을 위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일생윤회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윤회는 일생윤회와 찰나윤회 두 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매순간이 생일날

 

행선은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물론 좌선에서도 배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지만 행선으로 관찰하면 더 잘 볼 수 있다. 발을 움직일 때 마다 단계가 있는데 각 단계는 정신-물질적 작용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정신-물질 작용의 특징은 조건발생하는 것으로서 찰라생멸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함께 발생하여 지금 함께 소멸하는 것이다.

 

행선할 때 이전 동작은 이전에 발생하여 이전에 소멸했고, 현재 동작은 현재 발생하여 현재소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매번 생멸하는 것에 대하여 항상 새로운 것으로서 형성들이 나타난다.”(Vism.20.104)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매순간 새로운 태어남이라 볼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날이 있다. 생일날이다. 생일이 되면 생일잔치를 해 준다. 그런데 태어난 날이 일생에 한번 뿐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온의 생멸의 관점, 즉 정신적-물질적 작용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 순간 찰라생찰라멸한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것으로서 형성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은 매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매순간 새로운 날인 것이다. 매순간이 생일날이다.

 

 

2020-05-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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