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통증의 발생에서 소멸까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11. 19:16

 

통증의 발생에서 소멸까지

 

 

하루 24시간을 산다. 한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누군가에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픈 사람에게는 길게 느껴질 것이다. 고문 받는 사람은 일각이 여삼추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하는 사람에게 한시간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어리석은 자의 품에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Dhp.60)라는 게송이 있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다고 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밤이 늦어도 오지 않을 때 째깍째깍 초침 돌아 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게송에서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이 길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하나는 수행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아픈 자에 대한 것이다.

 

여기 밤새도록 명상하는 자가 있다. 큰 마음을 먹고 용맹정진하는 자에게 있어서 초야, 중야, 후야는 긴 시간이다. 게으른 사람은 초야, 중야, 후야가 얼마나 긴 지 알 수 없다. 해가 뜰 때까지 뒤척이는 게으른 자, 잘 먹고 호화로운 침대에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자는 결코 그 길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자에게 있어서 시간은 쏜 살 같이 흘러간다. 술집에서 웃고 떠들다고 보면 날이 훤하게 샐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초야, 중야, 후야는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밤샘 명상수행을 하는 자, 진리의 말씀을 해설하는 자, 그리고 설법을 듣는 자에게는 초야, 중야, 후야는 긴 시간이다. 또 밤새도록 통증에 시달리는 자도 초야, 중야, 후야는 긴 시간이다.

 

자꾸 반복하다 보면

 

오늘 오후 한시간 동안 앉아 있었다. 하루 24시간 중에 고작 한시간이라 할 것이다. 누군가에는 금방 지나가버리는 시간이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 보면 몇 시간 훌쩍 지나가 버린다. 드라마나 영화에 몰두하다 보면 한시간은 짧은 것이다. 웃고 떠들다 보면 한시간은 시간도 아니다. 그러나 평좌를 하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사정이 다르다.

 

좌선을 하기 전에 먼저 예비수행으로서 행선을 했다. 마하시전통에서는 행선과 좌선이 동등한 것이긴 하지만 좌선에 비중을 둔다면 일종의 몸풀기 내지는 예비수행의 단계로 보는 것이다. 막바로 앉는 것 보다는 일이십분이라도 보수행한다음 앉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무실 작은 공간을 왕래했다. 기껏해야 열 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다리를 이동할 때 마음이 따라 가도록 노력했다. 당연히 의도가 있어야 발이 움직인다. 발을 들었을 때 ‘들음’이라고 알고, 발을 밀 때 ‘밀음’이라고 아는 것이다. 그리고 발발 디딜 때 ‘디딤’이라고 알고, 발을 바닥에 누를 때 ‘누름’이라고 아는 것이다. 이렇게 단계마다 마음이 따라 가듯 마음을 두었을 때 집중이 된다.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 몇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똑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마치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똑 같은 동작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과 같다.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이 몇 번이고 똑 같은 연주를 하는 것과 같다. 가수가 똑 같은 가사를 수도 없이 부르는 것과 같다. 만두 빚는 사람이 똑 같은 동작을 무수하게 반복하는 것과 같다.

 

반복하다 보면 보인다. 매번 같지는 앉지만 그때 그때 마다 다름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숙달된다. 달인이 되는 것이다. 행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의미한 동작처럼 보이지만 보수행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진지한 것이다. 마음을 다리의 이동에 따라 한동작 한동작 마음에 두었을 때 마음이 따라 가게 된다. 이를 계속 반복하게 되면 동작과 아는 마음만 있는 것처럼 된다.

 

이번에는 반드시

 

좌선에 임할 때는 늘 “이번에는 반드시”라는 각오를 한다. 이번에는 반드시 한시간 앉아 보자는 것이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한시간은 긴 시간이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한시간은 귀중한 시간이다. 시간이 남아 도는 사람에게 한시간은 긴 시간이 아니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사람에게 한시간은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다리를 꼬고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오분도 긴 시간이다. 하물며 한시간은 아득한 것이다.

 

스마트폰 타이머를 한시간으로 세팅해 놓았다. 벨이 울리면 일어나겠다는 각오로 앉아 있었다. 보수행으로 어느 정도 마음이 모아 진 상태이다. 거친 호흡이나 거친 움직임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배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보려 했으나 호흡이 안정되어 있어서인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럴 경우 망상이 치고 들어온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집을 짓는 것을 알아차릴 때는 생각의 무게를 느낀다.

 

좌선하는 것은 단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볼 뿐이다. 그럼에도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망상이 일어났을 때 전혀 다른 길에 와 있음을 알게 되어서 허탈하게 된다. 다시 마음을 다 잡고 강한 대상에 마음을 두고자 한다. 이러기를 여러 번 하다 중반을 넘어섰다. 마침내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기다린 것인지 모른다.

 

통증은 손님 같은 것

 

통증은 손님 같은 것이다. 관찰수행하는데 있어서 통증만큼 반가운 것이 없다. 주관찰대상이 호흡이긴 하지만 호흡이 안정화되어 미세하게 되면 길을 잃고 해메이는 것 같다. 이럴 때 통증이 찾아오면 반갑기 그지없는 것이다.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시작되었다. 평좌를 한 발바닥에서 시작되어서 차츰 다리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전 좌선에서 통증이 왔을 때 끊어질 듯이 아팠다. 이번에는 뭉특한 느낌이 견딜만 했다. 종이 치기 전까지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면 이번 좌선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쪽 다리 통증과 함께 몸이 전반적으로 경직되었다. 허리가 뻣뻣해지고 뒷목 부위가 당기는 것 같았다. 목이 당긴다고 하여 두통은 아니다. 약간 뻣뻣한 것이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견딜만 했다. 이것도 관찰하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에 간지러운 부위가 있었다. 한번 만져 주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켜 보다 보면 시간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다.

 

좌선하면 몸을 움직여서는 안된다. 통증이 찾아와도 참아야 한다. 참기 보다는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 통증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나타날 만해서 나타난 것이다. 다리를 평좌했기 때문에 시간 지나면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통증은 또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통증이 발생하면 생멸을 관찰하기에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느낌은 항상 현재에 대한 것

 

수행을 왜 하는가? 본래 청정한 마음이 있는데 더러워진 마음을 닦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일까? 니까야를 보면 수행을 해야 하는 목적이 있다. 특히 오온에 대한 가르침에서 드러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을 보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칸다상윳따를 보면 “과거의 물질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미래의 물질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라고 했다. 이는 오온 중에서 물질에 대한 것이다. 느낌에 대한 것이라면 “과거의 느낌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미래의 느낌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느낌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느낌 관찰부터 해야 한다. 이는 몸과 관련 있다. 행선을 할 때 가벼움이나 무거움, 부드러움, 딱딱함은 느낌에 대한 것이다. 통증이라면 쓰리고, 아리고, 찌르는 것이 된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느낌은 항상 현재에 대한 것이다. 만일 과거의 느낌에 대한 것이라면 이는 느낌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에 대한 것이다. 언어로 표현된 빤냣띠, 즉 개념이 된다.

 

느낌은 항상 현재에 대한 것이다. 지금 다리 통증을 느끼고 있다면 마음은 현재에 있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법이다. 통증이라는 법인 것이다. 행선을 하여 가벼움이나 무거움, 부드러움, 딱딱함을 느낀다면 사대라는 법의 성품을 보고 있는 것이다. 좌선을 하여 찌르고, 쓰리고, 쑤시는 통증을 느낀다면 통증이라는 법의 성품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의 성품은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통증을 느낄 때 마음은 현재에 있다. 통증이 심할수록 마음은 더욱 더 현재에 있게 된다. 그런 통증은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분노라는 성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화가 날 만해서 난 것이다. 그런데 지켜보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지켜만 보는 것이다. 화가 났어도 제3자가 되어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면 화는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느낌과 물거품의 비유

 

통증이 점차 심해져서 다리 전체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걱정을 하지 않았다. 종 칠 때까지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면 법의 성품을 보게 되는 것이다. 종치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통증은 서서히 줄어 들기 시작했다. 마치 굳은 다리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마치 통증이 톡톡하고 하나씩 튀어나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느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 물거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공허한 것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물거품의 실체일 수 있겠는가?”(S22.95)

 

 

부처님은 느낌에 대하여 물거품의 비유를 들었다. 비가 세차게 내릴 때 빗방울이 바닥을 때린다. 빗방울은 바닥에 닿자 마자 물거품을 일으키며 흩어진다. 이렇게 연이어 빗방울이 바닥을 때릴 때 사라짐만 보일 것이다. 느낌도 그렇다는 것이다.

 

통증은 느낌에 대한 것이다. 느낌은 빗방울이 바닥을 때리며 물거품과 함께 사라지듯이, 통증 역시 사라질 때는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다리에서 통증이 사라질 때 마치 피가 돌 듯이 톡톡 하고 사라지는 것 같았다.

 

통증의 발생에서 소멸까지

 

마침내 통증이 깨끗이 사라졌다. 통증이 심하면 다리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지만 통증이 사라진 다리는 처음상태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종을 침과 동시에 다리를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었다. 통증의 발생에서 소멸까지 본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하면서 통증을 관찰하는 이유가 있다. 통증이라는 법의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통증이 내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온을 설한 경에서 느낌에 대한 것을 보면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S22.15)라고 했다.

 

좌선해서 통증을 관찰하는 것은 통증이 내것이 아님을 보기 위한 것이다. 통증이라는 느낌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느낌을 나의 것이라고 보는 것은 갈애때문이다. 느낌을 나라고 보는 것은 자만에 대한 것이다. 느낌을 나의 자아라고 보는 것은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갈애, 자만, 유신견으로 살아 간다. 그런데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통증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단지 관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좌선할 때 통증이 오면 귀한 손님이 온 것과 같다고 했다. 통증이라는 느낌은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다.

 

 

2020-06-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