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괴로움을 없애는 마법의 주문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17. 09:19

 

괴로움을 없애는 마법의 주문

 

 

왜 세상은 존재하는 것일까? 당연한 것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세상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 조띠까 사야도는 ‘마음의 지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있음인가요?”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면 충격일 것입니다. 꽃이 있고, 나무가 있고, 곤충과 동물, 인간, 행성이 있는 것은 매우 경이롭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음이 아닌가요? 어째서 어떤 것이 있나요? 어떤 것이 있는 그 자체로 놀랍습니다.”(139쪽)

 

 

우 조띠까 사야도는 ‘있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이런 말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통찰을 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달리 보였다.”라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늘 보는 세상이다. 새로울 것이 없다. 집에서 일터까지 왕래하면서 보는 세상은 늘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늘 변하고 있다. 사람 마음이 늘 변하듯이, 주변 환경도 변하고 있다.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것도 변화이다. 계절의 변화도 있다.

 

세상은 가만 있지 않다. 그럼에도 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우 조띠까 사야도는 “수행자는 보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 놀랍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139쪽)라고 했다. 세상이 있는 것은 시각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일 시각의식이 없다면 세상은 보이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의문한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시각의식이 있어서 꽃도 있고, 산도 있어서 세상도 있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에 대하여 ‘삼사화합촉’으로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S35.107)

 

 

 

시각과 시각대상이 있어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꽃도 보이고 나무도 사람도 보이고 산도 보인다. 그러나 처음 접한 대상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과거에 보았던 것이라면 꽃이름, 산이름, 사람이름이 떠 오를 것이다. 그래서 우 조띠까 사야도는 책에서 “눈은 보기만 합니다. 눈은 남자 여자를 보는 것이 아니고 색깔만을 봅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눈 의식이 아니고 마음이 합니다.”(154쪽)라고 했다.

 

과거 경험을 기억함에 따라서 비로소 대상을 인식하게 된다. 이를 “이숙적 촉각의식이 생겨난다.”(Vism.14.220)라고 말한다. 인식하기 전에는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어제도 있었다. 내일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영원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간다. 세상을 인식하는 자아도 영원히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간다. 그러나 시각이 아닌 청각을 예로 든다면 세상은 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청각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동요가 있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 폭, 칙칙, 폭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

 

 

기찻길 옆 아기는 잘도 잔다. 기적이 울리지만 아기는 깨지 않고 잠을 잘도 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는 ‘주의기울임’과 관련이 있다. 귀로 수많은 소리가 들리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누군가 종을 쳤을 때 종소리를 들었다면 이는 주의기울인 것이다. 대상이 강하기 때문에 청각의식이 발생한 것이다. 시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이 있어서 수많은 대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강한 대상에 주의기울여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눈에 들어 온다고 하여 모두 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보여지는 것이다. 형태와 색깔로만 보여질 뿐이다. 소리라면 파장으로 들릴 것이다.

 

세상은 인식했을 때만 의미가 있다. 마치 귀에 여러 소리가 들리지만 한대상에 주의기울였을 때만 들어오는 것과 같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 본다면 세상은 늘 새로운 것이 된다.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그래서 “보는 것을 새로운 과정, 새로운 경험으로 봅니다.”(139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인식하는 자의 것이다.”라고 볼 수 있다. 시각으로 또는 청각으로 인식할 수 있기에 세상이 있다. 그런데 매번 새롭다는 것이다. 인식할 때 마다 새롭게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대상을 알아차림 했을 때 새로운 것이다.

 

모든 현상들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탐욕을 예로 든다면 “탐욕은 탐욕으로 일어나서 탐욕으로 사라진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래서 “모든 것은 새롭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매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까닭에

항상 새로운 것으로서 형성들이 나타난다.”(Vism.20.104)

 

 

인식과정은 순간적이다. 찰나에 생겨나서 찰나에 멸한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순간적으로 생겨나서 순간적으로 멸한다.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다. 종소리가 났을 때 청각의식과 이를 인식하는 마음만 있게 된다. 섬광을 보았을 때 시각의식과 이를 인식하는 마음만 있게 된다. 그렇다고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거의 순간적이다. 여섯 가지 감역에서는 끊임없이 찰나생찰나멸한다. 여기에 나라는 자아는 끼여들 틈이 없다.

 

흔히 내가 있어서 보고 내가 있어서 듣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정신-물질 과정만 있을 뿐이다. 내가 있어서 보고 내가 있어서 듣는 것이 아니다. 보는 과정이나 듣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찰나생찰나멸한다. 일어나서 머무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에 “내가 보았다.”거나, “내가 들었다.”라고 말 할 수 없다. 사고가 순식간에 발생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어, 어” 하며 사고가 난다.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난다. 몸이 아프지 말라고 해서 아프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온에서 일어 나는 현상은 어느 것 하나 통제 되지 않는다. 오온이 내것이라면, 즉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면 나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생노병사가 대표적이다. 이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면 늙지도 말고 병들지도 말고 죽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늙고 병들어 간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온에서는 무수하게 세상이 발생하고 있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 항상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시각에 보여지는 것일 뿐이다. 무수한 소리가 들리지만 귀에 들려지는 것일 뿐이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오로지 정신-물질과정만 전개된다. 그래서 오온은 내것이 아니다.

 

오온이 내것이 아니어서 세상도 내것도 아니다.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정신-물질 과정만 있기 때문에 내것이라 할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내것이라고 본다.

 

오온을 내것이라고 보면 갈애를 일으킨다. 삼사화합촉에 따라 느낌이 발생하는데, 좋으면 거머쥐려고 하고 싫으면 밀쳐 내려고 한다. 탐욕과 성냄에 대한 것이다. 탐욕과 성냄은 법이다. 이런 법을 빠라맛타담마라하여 구경법이라고 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구경법은 나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탐욕도 성냄도 나의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된 법이다. 그럼에도 내것이라고 본다면 괴로움이 발생된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겼을 때 괴로움이 일어난다. 본래 오온이 내것이 아니라 정신-물질의 과정임에도 내것이라고 여긴다. 내것이라면 내뜻대로 되어야 하나 어느 것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물며 남을 내뜻대로 하고자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괴롭다.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죽는 것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원하는 것도 내뜻대로 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뜻대로 되지 않아 괴롭다. 오온을 내것이라고 보았을 때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어떠한 느낌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듯 가까이 있든, 그 모든 느낌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S22.95)

 

 

반야심경을 대승경전의 정수라고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법회 때마다 독송한다. 반아심경의 클라이막스는 주문에 있다. 이는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래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며 세 번 독송한다. 이런 주문은 마법의 주문과 같다. 모든 법회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했을 때도 독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호주 성격도 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도 마법의 주문이 있다는 것이다.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들은 것이 있다. 전재성회장은 ‘마법의 주문’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오온이 내것이 아닌 주문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와 함께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netam mama, nesohamasmi, na meso attati.”

“네땅 마마, 네소하마스미, 나 메소 앗따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것이 마법의 주문이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유신견 타파 주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주문만 외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유신견타파주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주문은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 된다. 또 일체 괴로움을 없애 주는 주문이 된다. 그렇게 하려면 마법의 주문을 외워야 할 것이다.

 

 

“네땅 마마, 네소하마스미, 나 메소 앗따띠.”

“네땅 마마, 네소하마스미, 나 메소 앗따띠.”

“네땅 마마, 네소하마스미, 나 메소 앗따띠.”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집착 했을 때 모든 괴로움이 발생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성제에서 모든 괴로움은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 된다고 했다.

 

생노병사도 오온에 대한 집착에 따른 것이다.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도 오온에 대한 집착때문이다. 그래서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했다. 놓아 버리기 보다는 던져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알아차려야 한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있으면 과거 이숙적 느낌이 일아나도 갈애로 전개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맨눈으로 보고 맨귀로 듣는 것이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S35.95)

 

 

2020-06-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