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타향을 헤매던 나그네가
용천사에서 고향마을을 향해 차를 몰았다. 일단 문장까지 나와야 한다. 문장사거리에서 장성방향으로 약 4키로 되는 곳에 고향마을이 있다. 고분이 있는 곳이다.
함평에는 신덕고분군과 예덕리고분군이라하여 5세기 말에 조성된 큰무덤군이 있다. 마치 왕족무덤처럼 이곳저곳에 커다란 무덤군이 있는데 마한의 실력자 무덤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전에는 걸어서 갔다. 문장에서 고향마을까지 걸어서 한시간동안 간 것이다. 유년시절 추억을 회상하며 걸었다. 문장택시를 타면 10분도 걸리지 않지만 일부러 걸어 간 것이다.
걸어가다 보면 예전에 다녔던 초등학교도 볼 수 있다. 지금은 폐교되어 김치공장으로 변했다. 비록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지만 곳곳에 유년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다.
고향집에 도착하니 11시 20분이 되었다. 11시를 목표로 했는데 20분이 늦은 것이다. 불갑사와 용천사를 순례하고 온 것이 늦은 이유이다. 그러나 조금 늦은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늦었어도 사촌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사실상 사촌모임
사실상 사촌모임이라고 볼 수 있다. 일년에 한번 합동제사를 지내는데 전국에서 사촌들이 모이는 날이다. 서울, 부산, 광주, 안양, 부천에서 내려왔다. 7월 11일 토요일 모두 9명이 모였다. 형수들까지 포함한 숫자이다.
제사모임이라기 보다는 사촌모임 성격이 짙다. 모이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이다. 백부 내외가 돌아가시고 나자 제사 지낼 사람이 없게 된 것이 큰 이유이다.
백부는 7남매를 두었다. 4남3녀이다. 문제는 장손이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기 때문이다. 백부모 모두 돌아 가시자 조부모와 백부모 제사를 누가 지낼 것인가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결론은 백부 제사날에 모두 모여 합동제사를 지내기로 한 것이다.
장손이 제사를 지낸다면 내려 갈 필요가 없다. 장손이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한날을 잡아서 지내기로 한 것이다. 백부모 제사뿐만 아니라 조부모제사도 함께 지내기 때문에 사촌들은 모두 참여해야 할 의무아닌 의무가 생겼다. 그렇다고 모두 다 참여할 수 없다. 대표로 참여해도 되는 것이 묵시적으로 허락되었다. 그래서 사촌모임멤버가 고정되다시피 되었다.
백부쪽 사촌들은 거의 대부분 참여한다. 장손 큰형님을 비롯하여 4명의 형님들과 2명의 누나가 참여했다. 백부 큰누님의 경우 매형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큰누님네는 이웃 마을에 산다. 넷째 형님 부부가 빠짐없이 참여한다. 이렇게 백부 쪽에서는 고정멤버가 8명이 되었다. 아무래도 당사자들이기 때문에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중부쪽에서는 형님 부부가 매년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다. 중부쪽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고정멤버는 11명이 된다. 이런 체제가 칠팔년 유지되었다. 그래서 사촌모임이라고 한 것이다.
제행무상이라고 한다. 제사를 매개로 한 사촌모임에도 변화가 생겼다. 2년전에 백부 큰누님 매형이 암으로 사망하고, 또 백부 둘째 형님이 역시 암으로 사망했다. 나이 차이는 20년 이상이다. 이런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쟁 때 집이 불타지 않은 것은
집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다. 백부모가 돌아 가신 후로는 폐가가 되었다. 일년에 한차례 사촌들이 모여서 제사를 올릴 뿐이다. 그럼에도 쓰러지지 않고 용케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경이롭다.
요즘 아파트를 보면 지은지 30년이 되면 재개발 이야기가 나온다. 지은지 40년이 되면 너무 오래 되어서 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시골집은 지은지 75년가량 되었다는 것이다. 장손 큰 형님에 따르면 해방전에 지었다고 한다.
장손 형님은 살아 있는 역사와 같다. 어른들이 모두 돌아 가시고 나서 이제 가장 큰 어른이 되었다. 나이 차이는 23살 정도 차이가 나니 부모뻘 된다.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제사는 기피한다. 그러나 매년 빠짐없이 참여한다. 교회에 다녀서일까 제사지낼 때 절하지 않는다. 제사 지낼 때 밖에 나와 있는 것이다.
75년가량된 집이다. 어떻게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집안의 산역사나 다름없는 장손형님에 따르면 유지된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릴 뻔했는데 조부의 기지로 모면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마을은 소개 지역이었다. 대한민국의 치안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밤에는 빨치산의 세상이 되었다. 군대에서는 마을 사람들을 소개시켰다고 한다.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질렀다. 초가로 지은 마을이 불탈 때 하나의 커다란 불꽃이 하늘로 솟구쳤다고 한다. 마을 전체가 불덩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안 조부가 집의 지붕에 있는 볏집을 모두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엌쪽 일부만 탔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호랑가시나무
고향집에 가면 꼭 확인하는 것이 있다. 호랑가시나무이다. 십년전 처음 호랑가시나무를 보았다. 그때는 매우 작고 갸날펐다. 천연기념물인 호랑가시나무가 어떻게 후원에서 자라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옛날에는 호랑가시나무 군락이 있을 정도로 흔했다. 그러나 모두 파 가는 바람에 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빈집에서 자라는 나무를 누가 파 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10년이 지난 현재 호랑가시나무는 큰 나무가 되었다. 이제 누구도 파 가지 못할 정도로 크게 자란 것이다. 목대 굵기가 이제 장딴지만 해졌다. 시골집에는 천연기념물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주문한 제사상
12시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상은 주문한 것이다. 불과 3년전까지만 해도 백부 큰누님부부가 매년 준비했다. 백부 넷째 형님부부와 함께 준비한 것이다. 백부 사형제가 있지만 막내부부가 준비한 것이다.
누군가는 준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넷째 형님부부가 도맡아 하고 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교회 다니기 때문에 나서지 못하고 형수가 사망해서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넷째 형님부부가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것도 하루전에 내려와서 이웃 동네 사는 백부 큰누님 집에서 준비한 것이다. 그러나 재작년 매형이 암으로 사망하고 난 후 사정이 달라졌다. 제사음식을 준비할 여력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주문한 것이다.
제사음식비용은 운반비까지 포함하여 38만원 들었다고 한다. 밥과 국만 준비하면 된다. 제사상을 보니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다. 닭을 보니 머리가 있는 것이다. 제사상에 올려진 닭은 머리가 있는 것이 예법에 맞는 모양이다. 돼지고기 수육과 홍어 찐 것도 있다. 그리고 각종과일과 전도 있어서 한눈에 보기에도 풍성했다. 미리 주문해 놓으면 당일 아침에 광주에서 배송해 준다.
한가지 아쉬은 것은 성주상이 없다는 것이다. 주문하다 보니 성주상이 빠진 것이다. 3년전까지만 해도 성주상을 따로 차렸다. 일종의 땅의 신에게도 제사상을 올린 것이다.
이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지만 땅의 신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조상들이 언젠가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지만 더 이전에도 이땅에서 살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마치 왕릉처럼 큰 고분을 보면 4-5세기 마한시대에도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땅의 신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나기 전에 불갑산이 “웅웅”하며 울었다는데 그런 사실을 땅의 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큰누님이 연로하여 더 이상 제사상을 차릴 수 없어서 주문했는데 성주상은 보이지 않는다.
만나면 반가운 사람들
제사가 끝나고 식사했다. 제사모임 멤버가 해가 갈수록 줄어 들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산 사람들은 이렇게 일년에 한번 모여 음식을 들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다.
주문한 음식이지만 입맛에 딱 맞았다. 마침 홍어와 돼지고기 수육이 있어서 김치를 곁들여 삼합을 했다. 홍어는 삭힌 것이 아니라 찐 것이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삼합을 몇번 하다 보니 포만해졌다.
일년만의 만남이다. 마치 견우와 직녀가 일년에 한번 만나듯이 일년만에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할 말도 많았다. 더구나 지난 10년동안 사촌모임을 지속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의식이 있다.
친구들보다 더 가까운 것이 친지들이다. 왜 그럴까? 가장 큰 이유는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사촌모임은 형제모임 다음으로 가깝다. 형제들이 유전자를 반반씩 공유했다면 이론상으로 사촌들은 사분의 일씩 공유하고 있다고 보야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생긴모습이나 성향이 비슷한 것 같다. 이는 다른 집안 사람들하고 확인히 비교 된다. 마치 동양사람과 서양사람 모습이 다르듯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사람이 오랫동안 없다가
먼 곳에서 안전하게 돌아오면,
친족들과 친구들이 동료들이
그가 돌아오는 것을 반긴다.”(Dhp.219)
오랜 만에 만나면 반가운 사람들이 있다. 이를 친족과 친구들과 동료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친족과 친구와 동료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씨족과 관계된 것이 친족이다. 상호교류로 성립된 것이 친구이다. 마음의 친절로 생겨난 것이 동료이다.”(DhpA.III.293)라고 했다.
친족과 친구와 동료는 동급이다. 만나면 반갑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자를 단지 환영의 말로 반길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선물을 안기며 반길수도 있다. 그런데 친족은 친구나 동료 보다 더 친밀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이다.
공덕에 비유한 친지
사회친구나 동료는 이해관계로 맺어지기 쉽다.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유년기 시절을 공유하는 친족관계는 설령 이해관계가 틀어진다고 하더라도 깨지지 않는다. 혈연관계로 맺어진 관계는 칼로 끊을 수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 또 이런 게송이 있다.
“이와 같이, 공덕을 닦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면,
친지들이 돌아온 벗을 맞이하듯,
공덕이 바로 그를 맞이한다.”(Dhp.220)
법구경에서는 공덕을 친지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선행공덕을 쌓는 것에 대하여 저 세상의 선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이 세상에서 친척들이 먼 곳에서 돌아온 사랑스런 친척을 맞이하듯, 공덕이 그 사람을 맞이한다.”(DhpA.III.293)라고 했다. 또 “착하고 건전한 행위의 공덕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듯, 사람을 기쁘게 하고 열 가지의 선물을 가지고 온다.”라고 했다. 열 가지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장수, 안색, 기쁨, 권력과 천상의 형상, 천상의 소리, 천상의 냄새, 천상의 맛, 천상의 감촉”이라는 선물을 말한다.
부처님은 친지를 비유하여 설법을 했다.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을 보면 친지와 관련하여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M135.2)라고 했다. 업을 친지처럼 보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업은 인과적 생성원리에 따라 윤회하는 동안 수반된다. 형제, 친척, 친지들은 모였다가 흩어지지만 업은 기나긴 생사여로의 윤회와 함께 하는 진정한 동반자로서 친지이므로 선업을 닦아야 한다.”(2393번 각주)라고 했다.
연민할 줄 알아야
친지 또는 친척은 선업공덕의 의미로 비유되었다. 이는 친지나 친척들은 만나면 반갑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친구나 다름없다. 친구의 조건은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연민하는 것이다. 친지나 친척들은 연민할 줄 안다. 그래서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혈연관계에 있기 때문에 위계질서가 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한살이라도 많으면 형으로 해야 한다.
종종 모임이나 단체에서 “형님” “아우” 하거나, 또는 “언니” “동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모임에서 또다른 패밀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패밀리는 피를 나눈 가족간의 관계로 그쳐야 한다. 그럼에도 모임이나 단체에서 형, 아우 또는 언니, 동생하면서 또 다른 패밀리를 만들면 사조직화 되고 분열된다. 나이 차이가 있어도 친구처럼 지내야 한다. 서로 연민할 줄 안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성은 명칭에 불과하다.
오랜 세월 타향을 헤매던 나그네가
일년만에 사촌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또래도 있지만 대부분 위에 있다. 나이 차이가 20년 이상 되면 부모보는 것처럼 한없이 어렵게 느껴진다. 나이가 10살 이내면 형이라고 히지만, 10살 이상이면 형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친지들은 만나면 반갑다. 그 중에서 사촌들은 특히 반갑다. 유년시절을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촌들끼리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다.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도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모두 타지에 살다 보니 지역차별 이야기를 종종한다. 부산에 사는 두 형님에 따르면 이제는 많이 완화되었다고 한다. 말을 들어 보니 지역차별은 점차 완화되어 가는 것 같다.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지역차별이나 지역감정 해소는 절실한 것이다.
일년에 한번 사촌들을 만나면 친구보다 더 반갑다. 아마 꽃 본 듯이 반갑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나면 손목을 잡고 안부를 묻는다. 피를 나눈 진정한 패밀리이어서일 것이다.
“오랜 세월 타향을 헤매던 나그네가 무사히 돌아왔을 때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귀환을 반기듯 공덕을 쌓고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갈 때 공덕들이 친지들처럼 사랑스럽게 그를 반긴다.”(Dhp.219)
2020-07-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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