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노출의 계절에
어떤 수행승이 탁발 나갔다. 탁발 나가면 눈을 아래로 하고 걸어야 한다. 멍에의 길이 만큼 앞을 보고 걸으라고 했다. 그럼에도 앞을 쳐다 보며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않고 걸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를 엄습한다.”(S20.10)라고 했다.
요즘 여름철이라 여인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어떤 여인은 거의 반라의 복장으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런 여인을 볼 때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더구나 날씨가 더운 지역이기 때문에 옷차림이 가벼웠을 때 젊은 수행승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탁발승이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못하여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 탐욕이 그를 엄습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라고 했다.
탁발승이 감관을 단속하지 못해서 탐욕이 엄습했을 때 이는 악마의 영역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죽을 정도의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괴로움은 시인 수행승이라 일컬어지는 방기사 존자에게도 일어났다. 이는 “그 때 많은 여인들이 잘 차려 입고 승원을 보기 위해 승원이 있는 곳으로 찾아 왔다. 바로 그 여인들을 보고 나서 존자 방기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 욕정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S8.1)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새내기 수행승 방기사에게 욕정이 일어난 것은 사원을 방문한 여인들을 보고 나서 부터이다. 그렇다면 방기사 존자는 어떻게 이를 극복했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내가 출가한 뒤에
어둠에서 오는 이러한 생각들이
완강하게 나를 엄습하고 있네.”(Thag.1221)
“훌륭한 사수인 귀공자들로서
잘 숙련된 강한 활을 가진 자들로
겁이 없는 사람 천 명이
나를 모든 방향에서 에워싼다 하더라도,” (Thag.1222)
또한 만약 그 이상의 여인들이 오더라도
나를 괴롭게 하지 못할 것이니
나는 가르침에 확고하게 서 있네.”(Thag.1223)
“태양신의 후예인 부처님에게서
그 자신의 입을 통해 나는 들었네.
열반으로 이끄는 길을.
내 마음은 그곳에 머물러 즐겁네.”(Thag.1224)
“이처럼 살고 있는 나에게,
악마여, 그대가 오더라도
그 때 그대가 나의 길을
악마여, 알지 못할 것이다.”(Thag.1225)
방기사존자는 욕정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악마의 영역으로 들어 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어둠에서 오는 이러한 생각들”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어둠에서’라는 말은’ 악마쪽에서’라는 말과 같다.
방기사존자는 여인을 보고 욕정이 생겨난 것에 대하여 천명의 궁수가 자신을 향해 활을 쏜 것과 같다고 했다. 궁수는 한번에 하나의 화살 밖에 날리지 못한다. 그러나 여인들은 다섯 개의 화살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여인들은 형상, 소리 등 다섯 가지 감각적 대상을 통해서 한번에 다섯 개의 화살을 날리는 것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방기사존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욕망을 극복해 냈다. 천명의 여인들이 오천개의 화살을 날리더라도 모두 막아 낼 수 있음을 말한다. 잘 훈련된 사람은 천명의 궁수가 모든 방향에서 활을 쏘더라도 화살을 맞기 전에 봉으로서 모든 화살을 쳐서 발아래에 떨어 뜨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기사존자는 “사람들은 모든 집착의 대상 보고 듣고 닿고 인식한 것에 묶여 있네. 바라는 바 없이 세상에 욕망을 없애 거기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성자라고 하네.”(S8.2)라고 했다.
성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라는 관념이 떠나 버린 현자에게 있어서 욕망의 대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목갈라나존자는 자신을 유혹하려는 기녀에 대하여 “피부로 엮여진 분뇨의 자루, 가슴은 혹이 달린 악귀, 그대의 몸에는 아홉 구멍이 있어, 언제나 부정한 액체가 흐른다.”(Thag.1157)라고 했다.
성자는 여인을 보아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유신견이 타파되었기 때문에 욕망이 일어나도 내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느낌을 내것으로 보았을 때 현재의 상태에 정복당한다. 그리고 현재를 버리게 된다. 일반 범부들이 그렇다. 왕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꼬삼비 시에 우데나 왕이 있었다. 왕은 젊은 수행승 삔돌라 바라드와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은 “바라드와자여, 이 수행승들이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만하고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살면서 세월을 보낼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이고 조건은 무엇입니까?”(S35.127)라며 물어보았다. 이에 바라드와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대왕이여, 알고 또한 보는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와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와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과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S35.127)
젊은 수행승은 왕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청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핵심은 어머니뻘 되는 여인은 어머니처럼 보고, 누이뻘 되는 여인은 누이처럼 보고, 딸뻘 되는 여인은 딸처럼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인에 대한 욕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누구나 가족이 있다. 어느 가족이나 어머니가 있다. 가족에 따라 누이도 있고 딸도 있다. 어머니나 누이나 딸은 범해서는 안되고 존중되어야 할 대상이다. 여인을 가족처럼 본다면 욕정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라드와자는 부처님에게 배운대로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오라. 그대들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라.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그 인상을 취하지 말고 그 연상을 취하지 말라. 그대들이 시각능력을 이렇게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하라.”(S35.127)
눈을 단속하지 않으면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마치 궁수로부터 천개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과 같다. 이는 인상과 연상을 취하기 때문이다.
인상(nimitta)은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이고, 연상(anubyañjana)은 부분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다. 형상을 보았을 때 ‘사람이다’라거나 ‘남자다’, ‘여자다’라고 전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인상이다. 그래서 인상의 파악은 악어를 알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다.
형상을 보았을 때 ‘여자다’라고 전체적으로 파악되면 그 다음에는 신체의 특정 부위를 보게 된다. 머리가 길다든가 코가 오똑하다든가라고 보는 것이다. 이를 연상의 파악 또는 속성의 파악이라고 한다. 속성의 파악은 손이나 발처럼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인상과 연상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순간포착(javana: 速行) 가운데 일어난다. 수행승은 아름다운 대상에 대하여 인상이나 연상(속성)에 매혹되어서는 안된다. 매혹된다면 ‘고양이의 경’에서는 보는 것처럼, 옷을 가볍게 입은 여인을 보고서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라고 했다. 심지어 매혹되는 순간 타락해서 지옥에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수행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만약 그가 매혹적인 대상에 사로 잡혀 현재를 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의식이 매혹적인 대상에 사로잡혀 급작스럽게 죽었다면 틀림 없이 지옥이나 축생의 세계로 갈 것이라고 했다. 의식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때 어느 세계에 태어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 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S35.235)라고 했다. 악처에 떨어지는 것 보다 눈먼 자로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노출의 시대이다. 여름이 되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 하는 스님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벼운 옷을 걸친 옷을 보고 욕정이 일어나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는 수행승도 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나름대로 해법을 내 놓았다.
아난다는 부처님으로부터 최후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다. 여인을 대하는 것이다. 아난다는 미남형으로 다정다감해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를 염려해서일까 부처님은 보지말라고 했다. 보았거든 말하지 말라고 했다. 말했거든 알아차림 하라고 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수행녀의 경’(A4.160)이 있다. 경을 보면 어느 수행녀가 아난다 존자를 사모 했었던 것 같다. 수행녀는 아프다는 핑계로 아난다 존자를 자신의 침실로 오게 했다. 이런 의도를 알아차린 아난다 존자는 “누이여, 그대가 확실하게 잘못했습니다.”(A4.160)라고 말했다.
아난다존자는 자신을 유혹하려는 수행녀에게 “누이여”라고 말했다. 누이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바기니(bhagini)이다. “비구니여(bhikkhuni)”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난다존자가 수행녀를 부를 때 빅쿠니(bhikkhuni)라 하지 않고 바기니라고 한 것은 수행녀를 가족처럼 보았기 때문이다. 가족이 가족을 범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수행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리고 “저의 참회를 받아 주십시오.” (A4.160)라고 말했다.
탁발승은 여인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상일 것이다. 만났다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꾸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친밀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부득이 이야기할 때는 알아차림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가장 강력한 것은 여인을 가족처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인을 보거든 어머니처럼, 누이처럼, 딸처럼 보라고 했다. 이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을 것이다.
2020-07-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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