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교를 종교로 갖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6. 26. 08:43

불교를 종교로 갖는 이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먹는 것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동물도 먹어야 산다. 이 세상에 먹지 않고 사는 것은 없다.

 

먹는 것이 제일 쉬운 일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먹어야 한다. 누구나 먹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 먹방프로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상 근사하게 차려 놓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다. 오로지 시각적으로 볼 뿐 결코 맛볼 수 없다. 체험자는 ‘엄지척’을 한다든가 갖가지 형용사를 사용하여 맛을 표현한다.

 

유투브채널에서 먹방을 보면 먹기시합을 하는 것 같다. 엄청난 분량을 단숨에 먹어 치우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야동을 즐기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먹방프로가 대세이어서일까 페이스북에서도 먹거리를 볼 수 있다. 상당수 사람들은 먹거리를 올려 놓는다. 한상 가득 근사한 먹거리를 보면 식욕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림의 떡이다. 아무리 먹음직해도 시각적으로 밖에 먹을 수 없다.

 

먹는 것은 미각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면서 시각으로 먹고, 귀로 지글지글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청각으로 먹는다. 또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후각으로 먹고, 혀로 맛보면서 미각으로 먹는다. 마지막으로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촉각으로 먹는다. 오감으로 먹는 것이다.

 

남이 먹는 것을 즐기는 자들은 무엇으로 먹을까?  놀랍게도 생각으로 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먹었던 기억을 떠 올리며 정신으로 먹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의식도 감각영역으로 넣는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안, 이, 비, 설, 신, 의라고 한다. 실제로 먹을 때는 오감으로 먹는다. 먹방프로는 정신으로 먹는다. 그럼에도 에스엔에스에 근사한 먹거리를 올려 놓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먹거리를 올리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보는 사람들은 눈으로 즐기며 눈으로 먹는다. 안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으로 먹는 것이다.

 

읽을 거리를 제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읽을 거리는 식식(識食)이라 할 것이다. 마음의 양식이다. 글이나 책을 말한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보고 듣고 즐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TV를 시청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에스엔에스에서 남이 써 놓은 글을 읽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콘텐츠는 아무나 만들 수 없다.

 

사람들은 먹방을 천박하게 본다. 마치 욕하면서 보는 막장드라마를 보듯한다. 그러나 직접 만든 것은 좋게 봐주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만든 먹거리를 올려 놓는 것은 볼만 하다. 남이 만든 것을 즐기는 것과는 다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주목받는다.

 

사람들은 남이 해 놓은 것을 즐기기는 쉬워도 직접 하지 않는다. 힘들기 때문이다. 또 귀찮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러나 즐기는 데는 열심이다. 먹는 것에는 게으르지 않다.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는 삶에는 게으름이 없다. 배고프면 졸리면 자고 쌓이면 배설하는 삶은 동물도 하는 일이다.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을 한사람들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이다. 대개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의 흐름대로 가는 것이 가장 쉽다. 욕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쉽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면 힘들다. 욕망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 마치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 가는 것 같다. 역류도의 삶이다.

 

불교를 종교로 하고 있다. 불교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불교는 함부로 믿을 것이 못된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역류도의 삶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역류도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사함빠띠 브라흐마에게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하네.”(S6.1)라고 말 했다.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역류이다.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마치 연어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흐름을 거스르면 상처투성이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연어는 거친 물살을 거슬러 간다. 때로 장애물을 만나기도 한다. 목적지에 도착 했을 때는 상처투성이가 된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알을 낳고 생을 마친다. 수행자도 역류의 길을 간다.

 

대부분 세상의 흐름대로 산다. 부처님은 흐름대로 사는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따라 내려 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져서 악한 업을 저지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에 따라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

 

 

세상의 흐름대로 산다는 것은 욕망대로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즐기는 삶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는 어떤 것일까?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로 귀결된다. 그 결과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다.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욕망을 거스르는 삶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빠지지 않고, 악한 업을 저지르지 않고,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완전한 청정한 삶을 실천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를 두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는 사람이라고 한다.”(A4.5)

 

 

흐름을 거스르며 살기는 쉽지 않다. 이에 대하여 고통과 눈물로 표현했다.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즉 청정한 삶에는 고통과 눈물이 따름을 말한다.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은 가시밭길이다. 세상 사람들과 반대로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살아 간다.

 

불교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욕계를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이다. 그래서인지 세상사람들에게 흥미가 없는 것 같다. 늘 감각적 욕망을 내려 놓으라고 한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세상사람들과 불화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S22:94)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진리대로 살다보니 세상과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살다 보니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에 종교는 많다. 욕망을 부추기는 종교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득세하는 종교가 그렇다. 그러나 불교는 아무나 믿는 종교가 아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가 불교이다.

 

어떤 이는 “이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 했다. 누구나 자신이 잘 하는 것은 쉬운 것이다. 공부가 쉬웠다는 것은 ‘공부의 신’이 되었음을 말한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프로페셔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면 아마추어 단계이다.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을 하면 프로페셔널이다. 이렇게 본다면 역류도의 수행자는 프로페셔널이다.

 

일터로 가는 길, 학의천 길에 은행나무길이 있다. 수십년된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제멋대로 자랐다. 가지치기를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방은 청소를 하지 않으면 어지럽혀져 있다. 회사를 관리하지 않으면 부도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아이도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불량학생이 된다.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어되지 않는 마음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게 되어 있다. 모든 것에는 엔트로피 법칙이 적용된다.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다.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생명 있는 것들은 무질서를 거부한다. 자기조직화 하여 질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결국 엔트로피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가차 없이 진행되는 무질서에 당해 낼 수 없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비상해야 한다. 연어가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가듯이 역류도를 닦아야 한다. 욕계를 탈출하는 것이다. 불교를 종교로 갖는 이유이다.

 

 

2020-06-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