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 버린 시계
시계가 멈추었다. 건전지 문제로 생각하여 교체해 보았으나 소용없다. 시계가 죽은 것이다. 어떻게 달리 해 볼 방법이 없다. 버리고 새 것으로 사기로 했다.
오래 사용했다. 십년 이상 된 것 같다. 사무실에 입주하고 나서 어느 분과 공유했다. 그 분이 벽시계를 달아 놓았다. 나갈 때는 두고 갔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름다운 행위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로부터 10년 이상 쉴 새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제 멈추고 만 것이다.
아쉬웠다. 비록 무정물이긴 하지만 십년 이상 늘 함께 했다. 똑딱똑딱 초침 돌아 가는 소리와 함께 강산이 한번 변하는 세월동안 같이 간 것이다.
초침이 돌아 가지 않는 시계는 더 이상 시계가 아니다. 기능을 상실한 것은 용도폐기 된다. 쓰레기통으로 갈 운명인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한소급 하다 보면
생명 있는 것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모두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예외 없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인간이건 간에 모두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무정물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과 똑 같은 것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생명 있는 것들은 후손을 남긴다. 디엔에이(DNA)를 남겨서 종이 유지되도록 한다. 이것이 어쩌면 생명 있는 것들의 큰 사명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사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은 후손을 남기고 죽는다. 예외 없이 죽는다. 자신의 디엔에이를 후손에게 전달하고 생명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탁월한 전략일 수 있다. 무엇이든지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죽기 전에 후손을 남기는 것이다.
오늘날 다양한 식물과 다양한 곤충, 다양한 동물을 볼 수 있는 것은 선조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인간은 무엇일까?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이고,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신이 창조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일 뿐이다. 자기원인을 갖는 신은 연기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과학자라면 진화론을 이야기할 것이다. 소급해 가다 보면 원숭이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할 것이다. 무한이 소급해 가다보면 하나의 바이러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요즘은 과학의 시대이다. 과학자가 말한 것이 진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이다.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기원에 대하여 무한소급하다보니 하나의 바이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과학자가 말하는 것이 종교인이 말하는 것 보다 더 신뢰가 간다. 신이 창조했다는 것보다는 바이러스에서부터 시작되어 우연에 우연이 거듭되어 인간이 되었다는 이론이 더 믿음이 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무한소급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무한소급을 부정한 부처님
상윳따니까야에 매우 독특한 상윳따가 있다. 열 다섯 번째 상윳따가 그것이다. 이름하여 ‘아나마딱가상윳따(anamataggasaṃyutta)’이다. 우리말로는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한역 아함경에서 이 상윳따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니까야에서만 볼 수 있다. 무한소급과 관련된 경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놓고 ‘이 분은 나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으로 헤아려 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어머니’식으로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빠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 버릴 것이다.”(S15.1)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했을까?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은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15.1)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무한소급하여 올라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소급하여 올라가 보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끝에 창조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바이러스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창조론과 진화론도 부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한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지금 나는 생물학적으로는 부모로부터 온 것은 맞지만 단지 유전자를 물려 받은 생물학적 존재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디엔에이를 물려 받은 생물학적 존재라면 동물이나 다를 바 없다. 또 식물과도 다를 바 없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유전자를 남기기 때문이다.
업으로서 존재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유전자만이 이어진다. 유전자가 끊어지면 종도 끊어진다. 그래서 최대한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퍼뜨릴려고 할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을 단지 생물학적 존재로 본다면 동물이나 식물과 다를 바 없다. 유전자를 남기고 나면 그의 역할은 다 한 것이다. 죽어도 된다. 그런 죽음은 ‘단멸’일 것이다. 한 개체가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인간을 유전자에 따른 생물학적 존재로 본다면 단멸론이 되기 쉽다. 그래서일까 과학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신론자이자 단멸론자가 대부분인 것 같다.
불교에서는 창조론도 진화론도 거부하는 입장이다. 연기법에 따른 업으로서 존재로 본다. 부처님은 어머니의 어머니식으로 무한소급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을 거부하고 그 대신 업에 따른 존재로서 인간을 말씀했다. 한 존재가 윤회하는 것에 대하여 무명과 갈애를 원인으로 한것으로 보았다.
무한소급하면 끝이 없다. 종국에는 창조주나 바이러스와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무명과 갈애 때문이다. 무명과 갈애 때문에 윤회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매우 돋보인다.
생물학적 윤회에서는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단지 조상으로부터 디엔에이를 물려 받은 존재이고, 이 디엔에이를 자식에게 전달하면 의무는 끝난다. 이른바 단멸론이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나는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이 우주에서 오로지 나 하나밖에 없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나는 있으나 없으나 세상은 잘 돌아 간다. 나는 세상 속에서 태어나서 세상 속에서 살다가 세상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마치 갠지스강의 모래알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나는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 밖에 없는 업으로서의 존재이다.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는 것이다. 내가 눈을 감으면 우주가 파괴된다. 내가 눈을 뜨면 우주가 생겨난다. 여섯 감역이 세상인 것이다.
윤회하면서 흘린 피의 양은
업으로서 존재는 연기적 존재임을 말한다. 부처님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연기로서 존재를 말했다. 이와 같은 연기법적 존재는 윤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작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있는 한 무한정 윤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일 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
한 사람이 남겨놓는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고
위대한 선인께서는 말씀하셨네.”(S15.10)
사람은 죽을 때 마다 뼈를 남긴다. 수없이 윤회하면서 뼈를 남겼을 것이다. 그것을 쌓아 놓으면 어느 정도일까? 경에 따르면 “그가 남긴 유골을 한 데 모아놓고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그 유골의 더미는 베뿔라 산만큼이나 클 것이다.”(S15.10)라고 했다. 여기서 베뿔라산은 라자가하 오악 중의 하나이다. 일겁을 윤회했을 때 히말라야 산보다 더 높을 것이다.
부처님이 유골더미를 말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제 더 이상 윤회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윤회를 끝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존재로 윤회해 왔는데 그 비유가 있다.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이 사대양보다 많다는 것이다. ‘눈물의 경’(S15.3)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짓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S15.3)
여기서 사대양은 수미산을 둘러 싸고 있는 큰 바다를 말한다.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없는 세월동안 눈물만 사대양 보다 많이 흘렸을까? 경에서는 윤회하면서 흘린 피가 사대양 보다 더 많다고 했다. 또 ‘젓의 경’(S15.4)에서는 윤회하면서 마신 어머니의 젖이 사대양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했다.
더 이상 윤회하지 말자
윤회하면서 사람으로만 산 것이 아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라고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윤회하면서 물소, 양, 염소, 사슴, 닭, 돼지 등으로도 살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업의 존재로서 뭇삶을 말한다. 한 존재가 육도윤회하면서 갖가지 삶을 산 것이다.
불교에서는 내생과 윤회를 말하고 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인과를 확장하면 알 수 있다. 인과를 무한히 확장하면 윤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유골더미와 눈물, 피, 젖의 양을 언급하며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더 이상 윤회하지 말자는 것이다. 과거에 다 겪었기 때문에 또 다시 겪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각 경에서는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0)
왜 인간의 삶은 불확실한가
생명이 있는 것들은 언젠가 죽어야 한다. 대부분 유전자를 남기고 죽는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인간도 생물학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에서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이기도 하지만 연기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동물에게도 적용된다. 정신기능이 있는 유정물은 윤회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다. 기대수명을 말하지만 기대수명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다. 누군가 “나는 백세까지 살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또한 인간은 죽음의 조짐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수명, 질병, 죽는 시간, 죽는 장소, 운명의 길의 이러한 다섯 가지는 이 삶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의 조짐이 없다.”(Vism.5.29)라고 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고, 죽음의 조짐도 알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불확실한 것이다. 이렇게 불확실한 것은 인간이 ‘업생(業生)’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은 업이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비시적 죽음은 수명의 존속시키는 업을 방해하는 업으로 일어나는 것이다.”(Vism.8.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과거 전생에 지은 없이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익었을 때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전생에 어떤 업을 지었는지 알 수 없다. 한량 없는 전생에서 도둑으로도 살고 강도로도 살았을 것이다. 아직 익지 않은 업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신통제일 목갈라나 존자도 아라한이었음에도 전생에 부모를 살해한 업 때문에 산적에게 뼈가 으스러지도록 맞아서 죽었다.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업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우리의 삶은 불확실해도 죽음만은 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사람의 목숨은 짧다. 저 피안은 도달 되어야 하고 착함은 행해져야 하며 깨끗한 삶은 닦여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수행승들이여, 오래 산다고 해도 백년이나 그 남짓일 것이다.”(S4.9)
삶은 불확실하다. 오늘 밤에 죽을 수도 있다. 수명은 보장 되어 있지 않다. 과거에 지은 업으로 인하여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또한 언제 죽을지 조짐도 없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부처님은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S4.9)라고 했다.
무소음 벽걸이 시계
시계가 수명이 다 되었다. 십년 썼으면 많이 쓴 것이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시계점에 갔다. 시계를 비롯하여 보석 등도 파는 곳이다. 불과 두 세 평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가게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삶을 유지하는지 불가사의한 느낌이 든다. 벽걸이 시계를 하나 샀다. 재난카드로 결재했다.
이번에 산 벽걸이 시계는 예전 것보다 성능이 좋은 것이다. 무소음이 특징이다. 이전의 시계는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좌선을 할 때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려서 신경쓰일 정도였다. 이런 생각을 해서일까 우연인지 몰라도 시계가 서 버린 것이다.
새로 산 시계는 4만원 짜리이다. 원형으로 원목 테두리를 하고 있어서 차별화 된다. 초침도 스무스하게 돌아간다. 마치 강물이 흘러 가는 것처럼 스윽스윽 잘도 돌아 간다. 이전 것과 비교하면 약간 럭셔리 하다. 무엇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무소음 벽걸이 시계이다. 좌선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다. 지금 이시각에도 시계는 잘도 돌아 간다.
2020-06-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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