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강호의 숨은 도인들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9. 11. 11:36

 

강호의 숨은 도인들은

 

 

높은 당도 최고의 맛. 포도송이를 싼 종이에 써 있는 문구이다. 맛을 보니 정말 달았다. 한번 맛을 보니 손이 자꾸 간다. 결국 포도 한송이를 다 먹게 되었다.

 

 

택배를 받았다. 이번이 세 번째이다. 처음 방석을 받았고, 다음에는 곳감박스를, 이번에는 포도박스를 받았다. 법우님은 왜 이렇게 보통불자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일까? 페이스북 메신저에 써 있는 글을 보면 진흙속의연꽃 글 읽을 때 환희심이 지금도…”라고 했다.

 

법우님은 보시를 즐겨한다고 했다. 그동안 보시한 금액만 억대가 넘는다고 했다. 여법하게 잘 사는 스님들이나 수행자들을 보면 보시한다고 말한다. 과연 보통불자의 글도 시물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선생님, 선생님

 

전화를 받았다. 알고 지내는 법우님이다. 글로서 만난 블로그친구라고 볼 수 있다. 법우님은 전화 걸 때 마다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깍듯하게 예를 갖추어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전화를 마칠 때는 한상 건강을 염려하는 말을 남겼다.

 

법우님의 전화가 부담스러웠다. 이번에 전화가 왔을 때 저는 솔직하게 말해서 법우님의 전화가 부담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법우님은 글을 보고서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글은 글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글과 사람이 반드시 매칭되는 것은 아니다. 글은 경전과 주석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생각을 실어서 엮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글의 내용과 사람을 동일시했을 때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최진석선생의 노자와 장자 강연을 감명 깊게 들었다. 대략 두세 번 들은 것 같다. 처음 들었을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두 번 들었을 때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그런 최진석 선생이 대단해 보였다. 한번 만나 보고 싶기도 하고 선물을 하고 싶기도 했다.

 

최진석선생이 유튜브에서 한 말이 있다. 그것은 제가 강연에서 한 말과 저를 동일시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말이다. 노자와 장자에 대하여 말하면 마치 강연자가 노자와 장자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글쓰기도 그렇다.

 

경전에 근거한 글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글쓰기나 다름없다. 글쓰기에서 부처님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글쓴이가 부처님과 동급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글의 내용과 사람을 동일시하여 선생님, 선생님했을 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큰 강물은 소리없이

 

세상에는 숨은 도인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요즘 같은 에스에스 시대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누가 도인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사는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 도인이다. 숫따니빠따 날라까의 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여울들이나 골짜기들과

흐르는 강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작은 여울들은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없이 흐릅니다.”(Stn.720)

 

 

논에 수로가 있다. 작은 수로에 흐르는 물은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른다. 틈이 벌어져 있는 곳에 물이 흐르면 소리가 요란하다. 바위투성이의 얕은 개울에 흐르는 물 역시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큰 강의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속이 꽉 찬 사람은

 

작은 여울은 소인과 같고, 큰 강물은 대인과 같다. 소인은 아직 여물지 않은 사람과 같고, 대인은 속이 꽉 찬 사람과도 같다. 그런데 소인은 말이 많다는 것이다. 말만 많을 뿐 유익한 것이 없다. 소리만 요란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모자라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찬 것은 아주 조용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물을 채운 항아리 같고,

지혜로은 님은 가득 찬 연못과 같습니다.”(Stn.721)

 

 

빈수레가 요란하다. 빈수레가 울퉁불퉁 자갈길을 가면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꽉 찬 수레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속이 꽉 찬 사람은 물이 가득 찬 연못과 같다고 했다. 이는 지혜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반쯤 찬 물항아리와 같다고 했다.

 

지식장사하는 사람

 

조금 아는 사람이 말이 많다.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많이 아는 것처럼 말한다. 아직 여물지 않은 사람이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수행자가 많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자각적으로 가르침을 설하며,

자각적으로 많이 말하는 것입니다.”(Stn.722)

 

 

수행자가 말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말을 하여 이익과 법과 유익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로지 개인적 이익만을 취하려 할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도 가르침으로 장사한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지식장사를 말한다.

 

많이 아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알고 있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서 일 것이다. 여기서 자각적으로 가르침을 설하는 자는 빠알리어 ‘jāna을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영어로 ‘Knowing’의 뜻이고, 한자어로는 지자(知者)’의 뜻이다. 단지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자를 말한다.

 

중생의 이익과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지식은 책만 열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요즘 같으면 검색하면 누구나 접할 수 있다. 이렇게 아는 것으로 이익을 취한다면 소인배라 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성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각적으로 자제해서

자각적으로 많이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자로서 성자의 삶을 누릴 만하며,

그는 성자로서 성자의 삶을 성취한 것입니다.” (Stn.722)

 

 

지식인들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말로서 먹고 산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한다. 말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식이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고 타인에게도 이익이 되면 그것 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성자의 삶이 그렇다.

 

성자는 말이 적은 사람이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과시하지 않는다. 또 자신의 말로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성자에 대하여 자각적으로 많이 말하지 않는다. (jāna na bahu bhasati)”고 했다. 이는 지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말을 자제할 줄 아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자가 말을 한다면 중생을 위해서 말을 한다. 그래서 말해진 것이 뭇삶의 이익과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아서 결코 말하지 않는다.”(Prj.II.50)라고 했다.

 

매일 구업 짓고 있는데

 

글쓰기도 말하는 것과 같다. 필업을 구업의 범주에 넣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매일 말하고 사는 것과 같다. 매일 구업을 짓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빈수레가 요란한 것 같고, 얕은 개울에서 물이 흘러 가는 것과 같다.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매일 의무적으로 하나 이상 써야 한다. 글쓰기주제는 제한이 없다.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대상이 된다. 가능하면 경전을 근거로 쓴다. 이런 세월을 산지 십년이 넘었다.

 

십년 이상 블로그에 의무적 글쓰기를 하다보니 블로그친구들이 꽤 많이 있다. 요즘은 페이스북 친구도 많다. 아직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글로만 소통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랜 만에 인사를 전할 때 반갑다.

 

어떤 블로그친구가 글을 남겼다. 그는 진흙속의연꽃님 참으로 반갑습니다. 10년 전에 연꽃님의 글을 읽기 위해 수시로 드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동안 먹고 사느라 참으로 오랜만에 들렀네요. 여전하시네요... 대단하십니다.”(J법우님)라고 블로그에 댓글을 남겼다. 또 어떤 블로그친구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잘 지내시지요?”라고 짤막하게 글을 남겼다. 필명을 보니 익숙하다.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다. 그렇다고 칭찬이나 격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한 비판을 받을 때도 있다.

 

자신의 견해와 다를 때 비판으로 나타난다. 어느 블로그친구는 성악설에 대하여 비판했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악하다고 한 것에 대하여 “1. 모든 인간이 현재의 악한 마음을 타고 난 이유는 전생에 악행을 쌓은 것이 그 이유입니까? 2. 그러면 인간으로 태어난 부처님도 태어날때는 악한 마음을 타고 났습니까? 2. 타고난 악한 마음을 제어하여 선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요? 3. 모든 인간이 악하게 태어난다고 했으니까, 님이 스승으로 섬기시는 사야도님도 현생에 선하기 위한 수행을 많이 하셨어도 그래도 내생에는 악하게 태어난다는 말씀입니까? 4. 나아가서 우리 모두가 수행을 해도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모두 악하게 태어나고 만다면 수행해야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라며 일종의 공개질의를 했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반론을 못하고 있다. 시간되면 역시 경전을 근거로 다시 한번 쓸 것이다.

 

수많은 비판 글을 받는다. 그럴 때는 그저 그러려니한다. 각자 개성이 다르듯이 견해도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평가 기준은 있다. 그것은 가르침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니까야, 즉 초기경전을 열어서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도 장려했다.

 

누군가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D16.98)라고 했다.

 

비판을 받았을 때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은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D16.98)라고 말했다. 가르침에 맞지 않으면 버리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123)라고 말씀했다.

 

강호의 숨은 도인들은

 

경전을 근거로 한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생업으로 인하여 수행할 여력은 없다. 한철수행은 엄두가 나지 않고 십일집중수행 역시 큰 마음먹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있는 것처럼 선생님, 선생님라고 부르는 것이 부담스럽다.

 

본래 빈수레가 요란한 것이다. 얕은 여울에 물 흘러 가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꽉 찬 수레는 요란하지 않다. 넓고 깊은 강에서 흐르는 물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인배들은 조금 아는 것 가지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말은 본래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말이라고 한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자신이 무지한 것을 알았을 때 말이 적어질 것이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지식으로 장사하지 않음을 말한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으면 세상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고 했다.

 

강호에는 숨은 도인들이 많다. 다만 드러내지 않고 살고 있을 뿐이다. 자신을 알려서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다하는 사람들이다.

 

강호의 숨은 도인들은 자애와 연민으로 자리이타행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치 물속에서 연꽃이 피지만 더러워지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세상속에서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산다. 작은 여울들은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없이 흐른다.

 

 

2020-09-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