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으려면
천도재를 할 필요 있을까? 불교에 대하여 잘 몰랐을 때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도재무용론’에 대한 글도 블로그에 올렸다. 아니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고 생각했을 때 올린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불교에 대하여 조금 알고 보니 천도재는 필요한 것이다.
성원정사에서 천도재를
성원정사에서 천도재를 지냈다. 부모천도재를 말한다. 우연한 기회로 인연이 되어서 성원정사 송위지법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무료천도재라는 말에 솔깃했다. 성원정사에서는 무료로 천도재를 지내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무료천도재를 지내는 데는 조건이 있다. 모든 준비를 본인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를 지낼 때 필요한 상을 차릴 때 상차림을 말한다. 과일, 나물, 밥, 국 등 모든 준비물에서 고기가 들어가면 안된다. 술도 준비해서는 안된다. 그야말로 청정한 상차림이다.
천도재는 약 두 시간가량 진행된다. 천도재 지내는 책자가 있어서 순서대로 하는 것이다. 빠알리삼귀의문이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도중에 석가모니정근할 때는 염주 천개를 굴려야 한다. 천도재의 절정은 장엄염불이다. 나무아미타불하며 염불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면 점심시간을 갖는다. 법사와 함께 근처 식당에 가서 먹는다. 이때 고시촌 사람들도 초청한다. 절에 다니는 고시생들과 함께 식사한다. 이것도 대중공양에 해당될 것이다. 성원정사는 신림동 고시촌에 있다.
성원정사에서는 매달 한차례 합동천도재를 봉행한다. 성원정사와 인연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다. 매월 셋째주 일요일에 봉행되는 합동천도재는 시간이 되는 사람들이 참석한다. 합동천도재 역시 무료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다. 무료천도재라고는 하지만 자율보시시스템이 작동된다. 자신의 형편에 따라 능력껏 보시함에 넣는 것이다.
불자들은 사십구제를 지낸다. 절에서 일곱 번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일곱 번 지낼 때 비용이 들어간다. 수백만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천도재는 절의 주수입원이 된다. 그러나 성원정사에서는 일곱 번까지 않는다. 두세번 또는 서너번으로 끝날 수 있다. 그래서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다.
성원정사 송위지선생이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절에서 무료로 천도재 해 주면 한국불교가 크게 번창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냈다. 이사 가고 난 다음 처음 지내는 부모 제사이다. 형제들이 도착했다. 종교는 서로 다르다. 늘 하던 식으로 지냈다. 제사 지내는 방식은 지역마다 다르고 집안마다 다르다. 그러나 큰 줄거리는 있다. 전통방식대로 지낸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귀신한테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 어쩌면 합리적인 선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형제들과 불화가 일어나곤 한다.
조부모는 오남매를 두었다. 부친이 막내이기 때문에 사촌들이 모이면 나이가 가장 젊다. 그런데 집안의 장손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교회에 다니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번 고향인 함평에서 사촌들이 모여서 합동제사를 지내는데 큰형님은 한번도 절을 한적이 없다. 그러나 먼 부산에서 잊지 않고 매번 참석은 한다. 큰형님에게 있어서 제사는 귀신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추도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본다.
아귀가 되어 죽은 조상에게
제사는 귀신에게 지내는 것이 맞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아귀가 되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자눗쏘니의 경’(A10.177)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바라문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하고, 욕거리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착을 갖고, 악의의 마음을 품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아귀의 영역에 태어납니다. 아귀중생을 위한 음식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그것으로 연명하고 그는 그것으로 살아갑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은 해당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 사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A10.177)
바라문 자눗소니가 부처님에게 질문했다. 질문의 요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보시가 우리의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A10.177)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이 보시를 우리의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 정말 향유하는 것입니까?”(A10.177)에 대한 것이다.
바라문이 질문한 것을 요약하면 제사공덕이 있는지에 대한 것이고, 또 죽은 자가 제사음식을 먹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의문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제사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지내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신을 믿는 종교에선서는 귀신이라고 한다.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아무런 공덕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제사는 엄밀히 말하면 귀신에게 지내는 것이다. 갖가지 제철 음식으로 상차림을 했을 때 과연 귀신이 먹을 수 있을까?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바라문 역시 이런 의문을 가졌다. 현대에서도 이런 의문은 여전히 갖는다.
부처님은 바라문의 두 가지 질문, 즉 제사공덕과 죽은 자의 제사음식섭취에 대하여 모두 긍정했다. 이는 부처님이 “이곳에 사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A10.17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죽은 자, 즉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하고 있다. 제삿날에 절을 하지도 않고 머리도 숙이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에게 지내는 제사조차도 거부한다. 다만 추도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행사를 가질 것이다.
제사는 죽은 자에게 지내는 것이다. 그것도 귀신에게 지내는 것이다. 아귀가 되어 죽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자눗소니의 경’을 보면 오로지 아귀가 되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이 “아귀중생을 위한 음식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그것으로 연명하고 그는 그것으로 살아갑니다.”(A10.17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제사는 아귀가 된 조상에게 지내는 것이다. 이는 음식과 관련이 있다. 아귀계를 제외한 다른 세계에서는 음식이 필요치 않는다. 지옥, 축생, 인간, 천상에 태어난 조상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지옥에 태어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이는 “지옥의 뭇삶을 위한 음식이 있는데, 거기서 그것으로 연명하고 그는 그것으로 살아갑니다.”(A10.17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축생으로 태어나면 축생의 중생을 위한 음식이 있다. 아수라로 태어나면 아수라를 위한 음식이 있고, 인간으로 태어나면 인간을 위한 음식이 있고, 천상에 태어나면 천상을 위한 음식이 있다.
아귀계를 제외한 세계, 즉 지옥,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중생은 그 세계에 적합한 음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굳이 제사를 지내 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아귀계는 아귀중생을 위한 음식이 없다. 그래서 아귀중생을 위한 음식을 보시해야 한다. 이것이 제사 지내는 이유에 해당된다.
인간계서 한공간에서 함께 사는 존재가 있다. 축생이다. 육도중에서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존재이다. 그런데 아비담마에 따르면 지표면에서 사는 존재는 축생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아비담마에서는 “인간계, 축생계, 아귀계, 아수라계는 지구표면에 존재한다. 이 세계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으나 존재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움직인다.”(243쪽)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귀계와 아수라계와 한공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다 아귀계에 태어나게 되었을까?
잘못된 견해를 가졌을 때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중생들은 육도윤회를 한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을 말한다. 이는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업의 작용에 따라 태어날 곳이 결정된다. 어떤 업을 말하는가? 경에서는 십악행이 언급되어 있다.
십악행은 1)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2)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3)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4)거짓말을 하고, 5)이간질하고, 6)욕거리하고, 7)꾸며대는 말을 하고, 8)탐착을 갖고, 9)악의의 마음을 품고, 10)잘못된 견해를 갖는 것을 말한다. 십악행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 악행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래살면 오래살수록 악행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만일 아기 때 죽었다면 십악행을 행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젊어서 죽었다면 나이 들어 죽었을 때 보다 십악행을 행할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어쩌면 오래살면 살수록 악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높은지 모른다.
십악행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열 번째에 해당되는 사견이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는 것도 악업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전에서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 제사의 공덕도 없다. 공양의 공덕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마음에서 흘연히 생겨나는 존재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며 스스로 깨달아 가르치는 올바로 도달된 수행자 성직자는 세상에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습니다.”(M41.10)라는 정형문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제사를 부정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에 해당된다. 경에 언급된 잘못된 견해는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5)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잘못된 견해, 즉 사견을 가지면 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것이 된다.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이웃이나 사회, 성직자, 수행자를 위해 공덕을 바라며 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단멸론자들은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말한다. 잘난 사람들은 아둔한 사람들을 속여서 보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단멸론자들에 따르면 보시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 된다. 죽으면 그만인데 보시공덕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다.”(S24.5)라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사견을 가진 자에 대하여 “장자들이여, 이와 같이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르고 바른 길이 아닌 것을 실천하는 것을 원인으로 어떤 뭇 삶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M41.10)라고 말씀했다.
악처를 면하려면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사견을 가지면 악처에 태어나기 쉽다. 제사공덕을 부정하는 사람은 악처를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 그런가? 이는 연기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으면 그 행위, 죽 그 업에 적한한 세계에 재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세계에 재생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성자의 흐름, 즉 수다원이 되어 있지 않는 한 악처에 태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때로는 선업도 짓고 때로는 악업도 지었을 것이다. 지은 업에 따라 재생되는데 어느 세계에 태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비록 금생에 선업공덕을 많이 쌓았다고 할지라도 과거생에 지은 악업이 작용되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가장 안전한 것은 수다원이 되는 것이다. 일단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악처는 면하게 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숫따니빠따 ‘라따나경’(Sn2.1)에 이런 게송이 있다.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Stn.231)
수다원이 되면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족쇄중에서 세 가지가 풀어진다. 그것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sakkāyadiṭṭhi), 매사의 의심(vicikiccha),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sīlabbata)”(Stn.231)을 말한다. 이렇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큰 죄악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를 말한다. 또 여섯 가지 큰 죄악을 저지르지않는다고 했다. 이는 육무간업에 대한 것이다. 즉, 1)어머니를 살해하고, 2)아버지를 살해하고, 3)아라한을 살해하고, 4)부처님 몸에 피를 내고, 5)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고, 6)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 가지 큰 죄를 보면 흔히 알고 있는 오무간업에 사견이 하나 더 추가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그는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그는 ‘보통의 일반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M115)라는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이교의 교리를 추정하면 육역죄가 된다. 부모를 살해하는 것과 동급의 죄를 짓는 것이 된다. 부모를 살해하면 한우주기가 끝나도 구원받지 못한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사이지옥(lokantarika)에서 한량없는 세월을 보내야 한다. 연기법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나 영원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이 생에 최소한 준수다원은 되어야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악처는 면하게 된다. 그러나 수다원이 되지 못하면 금생에 제아무리 커다란 공덕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세계에 떨어질지 모른다. 인간이나 천상에 재생하면 다행이지만, 전생에 어떤 업을 지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업이 작용하는데로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만 악처를 면할 수 있다. 그런데 딱 한차례만 악처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수다원이 되지 못했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준수다원 (cūḷasotāpanna)’이 되는 것이다.
준수다원은 수다원이 되기 전단계를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삼세에 대한 의혹을 극복했을 때 준수다원이 된다고 했다. 이는 명색을 파악한 자를 말한다. 정신과 물질의 조건을 파악함으로써 삼세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다. “나는 과거에 있었을까?” 등 과거의 의혹 5가지, “나는 미래에 있을까?”등의 미래의 의혹 5가지, 그리고 “나는 있는가?”와 같은 현재의 의혹 6가지가 모두 해소되는 것이다.
삼세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었을 준수다원단계라고 말한다. 비록 이번 생에서 수다원이 되지 못했지만 다음 생에서는 수다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준수다원에 대하여 “부처님의 교법에서 안식을 얻은 님, 발판을 얻은 님, 존재의 운명이 정초된 님, 작은 흐름에 든 님이라고 한다.”(Vism.19.27)라고 했다.
준수다원이 되면 한번에 한해서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청정도론에서는 한번이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위빠사나 스승들은 한번에 한해서 악처에 떨어질 운명은 면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존재의 운명이 정초된 자(niyatagatika)’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은 라따나경에서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Stn.231)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준수다원이 되면 네 가지 악한 운명,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의 세계에 떨어지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발판이 마련된 자(laddhapatiṭṭha)’라고 했다. 다음 생에 악처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이번 생에서 최소한 준수다원은 되어야 한다.
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으려면
불자들은 니까야가 매우 합리적인 경전으로 알고 있다. 이는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교훈적인 이야기도 많이 했다. 특히 재가불자들의 삶과 관련된 가르침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제사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제사공덕을 부정하지 않았다. 니까야 도처에 등장한다. 디가니까야 ‘날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이 있다. 동쪽방향을 보고 예경하는 이유 중의 하나를 보면 “돌아가신 다음에는 그분들을 위해 공양을 올리리라.”(D31)라는 구절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상에게 공양하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것 못지 않게 큰 일임을 말한다.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부모를 공양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처럼, 조상에게 공양하는 것도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아들의 경’(A5.39)을 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부모는 ‘양육된 자는 우리를 부양할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우리를 위하여 할 것이다. 가계를 오래도록 보존할 것이다. 유산을 상속할 것이다. 또한 망자나 죽은 자들에게 공물을 바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A5.39)
부처님은 다섯 가지 이유로 자식의 도리를 설명했다. 1)부모를 공양하고, 2)해야 할 일을 하고, 3)가계를 보존하고, 4)유산을 상속받고, 5)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것이 자식의 도리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후레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이 기나긴 세월 동안 육도윤회하면서
불교는 합리적인 종교이다. 특히 초기불교가 그렇다. 그럼에도 제사공덕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비합리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제사공덕은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연기법에 따라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을 펼쳤다.
바라문 자눗소니는 부처님에게 물었다. 자눗소니는 “존자 고따마여, 그 돌아가신 친지나 혈족이 해당되는 곳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누가 그 보시를 향유합니까?”(A10.177)라며 묻는다. 자신의 부모를 비롯하여 죽은 친지나 친족이 아귀계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제사하는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다른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이 해당되는 곳에 태어나서 그들이 그 보시를 향유합니다.”(A10.177)라고 말씀했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셨다.
“바라문이여, 이 기나긴 세월 동안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이 해당되는 곳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라문이여, 보시하는 자에게 과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A10.177)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합리적이다. 말을 들어 보면 누구나 수긍하는 가르침이다. 제사 지내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부모나 친지, 친족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윤회하면서 어느 누구나 한번쯤 아귀계에 태어났을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는 한 미래 어느 생에선가 아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조상 아닌 자가 없다.
모두가 우리 조상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어머니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4)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한량 없는 윤회에서 이 세상 모든 존재는 한번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였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이 기나긴 세월동안 육도윤회하면서 아귀계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
설이나 추석 때 제사 지내는 이유는
사십구재를 하고 천도재를 하면 제사를 지낸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아귀의 영역에 있는 중생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가신 부모는 아귀계에 떨어졌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범부중생은 육도 중에 어느 세계에서 재생되었는지 알 수 없다. 천상에 태어났을 수도 있고 인간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다. 악처에 떨어졌을 수도 있다. 과거에 지은 업이 작용하는대로 태어나는 것이다.
설령 금생에 공덕을 많이 쌓았다고 하더라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는 한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준수다원이 된다면 한번에 한해서 악처는 면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중생들은 육도 중에 어떤 세계에 떨어질지 모른다. 이는 십악행과 관련이 있다
살아 가면서 어느 누구도 십악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거생에 저지른 잘못까지 적용되면 죽어서 어느 세계로 떨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금생에서 십선행을 하면 선처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 선업공덕의 업이 강력하게 작용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제사 지내는 것은 아귀가 된 중생을 위한 것이다. 늘 배고픈 존재인 아귀는 부정적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그리고 아귀계에서 굶주림이나 목마름이나 바람이나 열기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고통은 그곳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없기에 성자께서는 태어남이 괴로움이라 설한 것이다.”(Vism.16.43)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아귀가 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선업공덕을 쌓는 것이다. 설령 선망 부모가 아귀의 영역에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기나긴 세월동안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이 그곳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
제사는 부모나 조부모의 기일 때만 지내는 것이 아니다.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 때도 제사를 지낸다. 이는 조상중에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라문 자눗소니는 “존자 고따마여, 보시를 베푸는 것도 훌륭합니다. 제사에 공물을 올리는 것도 훌륭합니다. 그 때 이른 바 보시하는 자에게 과보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A10.177)라고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그렇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렇습니다. 보시하는 자에게 과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A10.177)라며 추인해 주었다.
“담장 밖의 거리
모퉁이에 있으면서
가신 친지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문기둥에 서있나이다.
여러 가지 음식과
많은 음료를 차렸으나
뭇삶들의 업으로 인해
아무도 님들을 알아채지 못하나이다.
연민에 가득 차서
가신 친지들에게
제 철의 정갈하고 훌륭하고
알맞은 음식과 음료를 헌공하오니,
가신 친지들을 위한 것이니
친지들께서는 행복하소서.
여기에 모여 친지의 가신 님들도 함께 했으니
풍요로운 음식의 성찬에 진실로 기뻐하소서.
‘우리가 얻었으니
우리의 친지들은 오래 살리라.
우리에게 헌공했으니
시주에게 과보가 없지 않으리.’
가신 님들이 사는 곳
거기에는 농사도 없고 목축도 없고
장사도 없고 황금의 거래도 없이
보시 받은 것으로 연명하나니.
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계곡으로 흐르듯
이처럼 참으로 보시가 이루어졌으니
가신 님들을 위해 유익한 것이나이다.
넘치는 강물이
바다를 채우듯
이처럼 참으로 보시가 이루어졌으니
가신 님들을 위해 유익한 것이나이다.
‘나에게 베풀었다. 나에게 선행을 했다.
그들은 나의 친지, 친구, 그리고 동료였다.’라고
예전의 유익한 기억을 새기며
가신 님들에게 헌공해야 하느니라.
이처럼 친지들이 서있는데
울거나 슬퍼하거나
달리 비탄에 잠기는 것은 헛되이
가신 님들을 위하는 것이 아닐지니라.
그대가 바친 이 헌공은
참모임에 의해 잘 보존되었으니
오랜 세월 그것이 축복한다면
반드시 그들에게 유익한 것일지니라.
친지들에 대한 의무가 실현되었고
가신 님들을 위한 훌륭한 헌공이 이루어지니
수행승들에게 크나큰 힘이 부여되었고
그대들에 의해서 적지 않은 공덕이 생겨났느니라. “(khp7)
2020-09-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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