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으로 이끄는 성직자의 탐욕

담마다사 이병욱 2020. 8. 28. 09:56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으로 이끄는 성직자의 탐욕

 

 

글을 쓸 때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누군가 모두 그렇지 않다라며 이의를 제기할 때이다. 모두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싸잡아서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라는 것이다.

 

정부도 어찌할 수 없는

 

한교총 회장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종교의 자유를 말했다.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방역에 대한 도전이다. 코로나 2차확산을 앞둔 중대한 기로에서 협조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한교총회장은 교회를 영업장 취급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교회가 영업장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말이 된다. 현재 교회는 코로나 확산의 진원이지이다. 그럼에도 코로나가 확산되든 말든 예배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영업을 하겠다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괴물이 되었다. 정부도 어찌할 수 없는 괴물이 된 것이다. 이런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대다수는 협조하지만 일부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이 말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며 예배를 강행하려 한다면 한국기독교는 괴물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인으로서 타종교를 비판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는 것은 논란만 야기시킬 뿐이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관련된 것이라면 비판해야 한다.

 

확진자가 이제 400명이 넘었다. 대한민국은 중대기로에 서 있다. 현재와 같은 속도라면 다음주에는 500명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한번 가속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실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파장이 너무 커서 망설이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 감염의 진원지가 되어 버린 한국교회에서 종교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며 예배를 강행하려 한다면 3단계는 불가피할 것이다.

 

영원주의로서 기독교

 

기독교는 영원주의 종교이다. 영원주의란 무엇일까? 부처님당시에도 영원주의가있었다. 이는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윤회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지만, 영원히 존재한다.”(D1.31)라고 말로 설명된다. 이는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에 대한 것이다. 마치 영혼처럼 고정불변하는 개별적인 아트만이 있어서 윤회함을 말한다. 이른바 유아윤회론이다.

 

영원주의는 한마디로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Ud.6.4)라고 말한다.

 

누군가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말하면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는 독선이다. 오늘날 유일신교가 그렇다. 유일신교에서는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이 특징이다.

 

영원주의는 진리가 아니다. 굳이 말하면 부분적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가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코끼리 머리는 물항아리 같고, 귀는 키질하는 바구니, 이빨은 쟁기, 코는 쟁기막대, 몸통은 창고, 다리는 기둥, 허벅지는 절구, 코리는 곤봉, 꼬리의 술은 빗자루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전체를 보는 눈이 없어서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는 이교도를 말한다. 이교도들은 눈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일부를 보고서 전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를 눈이 있는 사람이 지켜보면 어떨까?

 

우다나에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가 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들은 코끼리는 이와 같고 코끼리는 이와 같지 않다. 코끼리는 이와 같지 않고 코끼리는 이와 같다.’라고 서로 주먹을 가지고 싸웠다. 그런데 왕은 그것을 즐겼다.”(UD.6.4)라고 했다. 마치 왕이 코메디를 보는 것 같다.

 

오늘날 기독교는 부처님당시 바라문교와 매우 유사하다. 이는 영원주의로서 종교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는 견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견해는 빠알리어 딧티(diṭṭhi)를 번역한 말이다.

 

딧티는 영어로 ‘view, belief, speculative opinion’의 뜻이다. 하나의 관점임을 말한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선천적으로 눈먼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서 폐하, 코끼리는 기둥과 같습니다.” (UD.6.4)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교도들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 이는 전체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고서 진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교의 유행자들은 눈이 멀었고 눈이 없어서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못하고 가르침을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못하고 가르침을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UD.6.4)

 

이교도들은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른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교리가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교리만이 진리라면 다른 교리는 모두 거짓이 되고 만다. 입에 칼을 물고 찌를 만하다. 더 나아가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오늘날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가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한쪽면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먼자가 코끼리 만지기식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들 성직자들을 따라간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바라드와자여, 마치 봉사들이 줄을 섰는데,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바라드와자여, 모든 성직자들이 설한 것은 봉사들이 줄을 선 것과 같이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합니다.(M95.27)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2008)’를 보는 것 같다. 이교의 성직자들은 눈먼 자와 같다. 그것도 선천적으로 눈먼 자이다. 그런데 신도들은 성직자를 따라 간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선천적으로 눈먼 자의 뒤를 역시 선천적으로 눈먼 자들이 뒤를 따라 가는 것과 같다.

 

이교도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말이다. 이렇게 서로 자신의 견해가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싸움 그칠 날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싸우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는 바라드와자여, 진리를 수호하는 현자라면, ‘이것은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M95.29)라고 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수호하는 현자는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럴까? 이는 그가 자신이 확신하는 것이라도 실제로 확인하지 않고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토대 위에 그것을 받아들여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옳지 않다.”(Mdb.1297)고 했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독선적 진리와 배타적 구원관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연기법에 따르기 때문이다. 불교인들은 싸우지 않는다.

 

영원주의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연기법에 따르면 양극단은 배제된다. 이는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부처님은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S12.15)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어떤 것일까? 이는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절대유와 절대무와 같은 양극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유는 영원주의를 말하고 절대무는 허무주의를 말한다. 이와 같은 양극단은 거짓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주의가 왜 참이 아닐까? 이는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세계의 소멸은 역관적 조건형태를 관찰하면 알 수 있음을 말한다. 모든 형성되어진 존재들이 끊임없이 무상하게 소멸되어 가는 것을 관찰하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는 버려지는 것이다.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을 가져올 길로 이끄는 종교

 

오늘날 한국에는 유일신교가 득세하고 있다. 유일신교는 영원주의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그래서 변치 않는 영혼이 있고 변치 않는 천국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누구나 믿음이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면 괴로움을 겪을 수 있다. 특히 탐욕이 개입된 믿음이라면 괴로움은 필연적이다. 더구나 성직자의 탐욕이 개입 되어 있을 때 이를 따르는 신도들은 눈먼 봉사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다. 마치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처럼, 선천적으로 눈먼 성직자의 뒤를 역시 선천적으로 눈먼 신도들이 앞사람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따르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이 존자는 탐욕의 상태에 있으면서 탐욕의 상태에 사로잡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하며, 또한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을 가져올 길로 다른 사람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M95.32)

 

 

교회 목사의 탐욕이 이 나라를 위기로 몰아 가고 있다. 감염자가 늘어나든 말든 영업을 해야만 하겠다는 발상이다. 이와 같은 유일신교 성직자의 탐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 목사의 탐욕이 공멸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괴물이 된 한국기독교를 어찌해야 할까?

 

한교총회장은 대통령과 면담에서 종교의 자유를 말했다. 마치 교회가 영업장이라고 되는 것처럼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코로나 감염자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다. 교회가 코로나 감염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현실을 개무시하고 있는 것과 같다.

 

오늘날 한국기독교는 괴물이 되었다. 정부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된 것이다. 이에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는 불가피하다.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을까? 이는 탐욕 때문이다. 성직자의 탐욕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을 가져올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동타지옥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괴물이 된 한국기독교를 어찌해야 할까?

 

 

2020-08-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