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반속(半僧半俗)은 비난받지만 반속반승(半俗半僧)은?
나는 복이 있는 사람인가? 재산축적으로 본다면 복이 없는 사람이다. 이 나이 되도록 모아 놓은 것이 별로 없다면 무능력자라 할 것이다. 세간에서는 재산축적을 잘 하는 자가 능력자가 된다. 재산이 많아야 복받았다고 말한다.
세간에서는 재산축적이 어렵고 출세간에서는 진리성취가 어렵다. 이는 세간을 사는 목적은 재산축적이고, 출세간을 사는 목적은 진리를 구하는 것이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반승반속(半僧半俗)이라 해야할 것이다.
반승반속은 출가자이면서 재가의 삶을 사는 자를 말한다. 출가자가 진리의 길을 가지 않고 재산축적에 열을 올린다면 반승반속이라 해야할 것이다.
반승반속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다. 청정도론에서는 열 가지 이상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반승반속에 대하여 “수행승이라고 선언하더라도 소들을 뒤따르는 당나귀와 같다.”라고 했다. 또 “화장터의 타다 남은 장작처럼 출가와 재가의 양자에서 소외된다.”(Vism.1.154)라고 했다.
출가에 반승반속이 있다면 재가에는 반속반승(半俗半僧)이 있을 것이다. 재가자가 세간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출세간의 목적을 지향하는 삶을 말한다. 이런 삶에 대해 아직까지 비난하는 것을 보지못했다. 오히려 잘 사는 것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반속반승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반속반승의 삶을 살고 있다. 반승반속이 아니다. 반승반속은 비난받지만 반속반승은 비난받지 않는다. 본래 출가의 삶은 청정한 것이고 재가의 삶은 허물이 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살기로 맹세한 출가자에게는 이런 게송이 적용된다.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라고.
정신의 세계에서는 정신적 성장이 우열의 척도가 된다. 반면 물질의 세계에서는 재산의 축적이 능력의 척도가 된다. 그렇다면 진리의 길이 더 어려울까 아니면 재산축적의 길이 더 어려울까? 결론을 말한다면 두 길 모두 어렵다. 그래서 “출가는 어렵고 거기서 기뻐하기도 어렵다. 세상의 삶은 어렵고 재가의 삶은 고통스럽다.”(Dhp.302)라고 했다. 출가의 삶도 어렵고 재가의 삶도 어려움을 말한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무언가를 성취하려면 힘들고 어려움이 따른다. 그리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어떤 것도 거저 얻어지는 것이 없다. 땀과 노력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움직여야 가능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는 것이라고는 먹고 자고 싸는 일 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하루일과 중에 최대행사는 밥 먹는 일이다. 밥 때가 되어 출출해지면 “오늘은 무얼 먹을까나?”라며 맛집 순례하는 팔자 좋은 사람도 있다. 대개 부동산투기 등으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챙기는 자이기 쉽다. 밥 먹고 할 일이 없으면 모여서 고스톱을 친다. 저녁에는 술자리를 가질 것이다. 이런 삶이 행복한 삶일까? 이런 삶이 복받은 삶일까?
오로지 안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밥 먹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인 사람이다. 만약 먹는 재미가 없다면 이 세상을 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은 하지 않는다. 즐기기에는 바쁘지만 애써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는다. 안락만을 추구하다 보니 모든 것이 귀찮아 진다. 무언가 해보려 하지만 피곤해서 도중에 그만둔다. 움직임이 없는 사람이다.
안락만을 추구할 뿐 움직임이 없다면 그는 사실상 죽은 자이다. 움직이지 않고 누워만 있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반면에 움직임이 있다면 살아 있는 것이다. 꿈틀거리고 있다면 산 것이다. 사회활동을 한다면 산 자라고 볼 수 있다. 방에만 있다면 죽은 자라고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 사망한 자가 있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살아 있어도 죽은 자와 같다. 요양병원에 가면 숨만 쉬고 있는 노인들을 볼 수 있다. 활동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방에만 있다면 이를 어떻게 봐야할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이 귀찮고 피곤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는 사실상 죽은 자이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 (Dhp21)
방일한 자는 죽은 자와 같다고 했다. 게으른 자를 말한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자이다. 오로지 안락만을 추구할 뿐 모든 것이 귀찮고 피곤해하는 자를 말한다. 이런 자가 죽음을 맞았을 때 어떻게 될까?
불방일자가 있다. 주석에 따르면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appamada)는 사띠(sati)와 동의어라고 했다.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다면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것이 된다. 마음의 밭을 가는 것이다. 한시도 한눈 팔지 않고 선업공덕을 쌓고 있는 것이다. 사띠는 본래 선법이기 때문이다.
불방일자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불사(不死: amata)를 말한다. 유아(有我)의 범부는 죽어도 재생이 되기 때문에 죽었을 때 정말 죽지만, 불방일하여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개념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가 된다.
스마트폰을 똑똑치다 보니 날이 밝아 온다. 여명은 해뜨기 전의 전조현상이다. 불방일은 성공의 전조현상과도 같다. 아침 일찍 지저귀는 새가 먹이를 찾을 가능성이 높듯이, 새벽같이 일어나 움직이는 부지런한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진리의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하느님(brahma)이 출현할 때 전조현상이 있다. 먼저 빛이 보인다. 하느님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빛이 비추는 것을 보면 하느님이 출현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큰 것에는 전조현상이 있다. 해가 뜨기 전에 여명같은 것이고 하느님이 출현하기 전에 먼저 빛을 보이는 것과 같다. 성공에는 부지런함이 전조현상이듯이, 진리의 세계에서는 사띠가 전조현상이다. 매사에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열반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죽어도 죽지않는 불사의 길이다.
매사 귀찮고 파곤해 하는 자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이다. 하는 것이라고는 먹는 일밖에 없다. 움직임이 없는 자이다. 움직임이 없다면 사실상 죽은 자나 다름없다. 게으른 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게으름은 죽음의 전조이다. 게으른 자는 이미 죽은 자와 같다.
세속에 살지만 반속반승의 삶을 살고자 한다. 반승반속은 비난 받지만 반속반승은 비난 받지 않는다.
세속의 삶은 재산축적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그러나 반드시 물질적 재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재산도 있다. 이는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지혜의 재물을 말한다. 이를 일곱 가지 고귀한 재물이라 하여 칠성재(七聖財)라고 한다.
물질적 재물을 많이 가지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한 자만이 부자가 될 수 있다. 부지런함은 부자의 전조이듯이, 매사 사띠하는 자는 정신적 부자의 전조가 된다.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도 어렵고 정신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도 어렵다. 두 가지가 다 어렵다면 후자를 택하겠다. 물질적 부는 죽어서 가져갈 수 없지만 정신적 부는 가져갈 수 있다. 정신적 공덕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자신의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의무적 글쓰기를 하는 이유가 된다.
“곡물도 재산도 금과 은도
또한 어떠한 소유도
노예, 하인, 일꾼 또는 그의 친인척도
모두 놓고 가야 하네.
신체적으로 행하는 것
언어적으로 행하는 것
정신적으로 행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것,
그는 그것을 가지고 가네.
그림자가 몸에 붙어 다니듯
그것이 그를 따라 다니네.” (S3.20)
2020-08-2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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