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탐욕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담마다사 이병욱 2020. 9. 2. 08:10

탐욕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나치게 믿는 경향이 있다. 종종 그 사람을 믿고 돈을 빌려 주었는데 못 받아서 속상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이제 이런 말은 욕망의 세계에서 더 이상 이야기거리도 아니다. 존경하는 사람이 추문에 휩쌓였을 때 충격받는다. 이럴 때 인간의 본성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욕계중생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세계에 태어난 것 자체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런 인간을 믿었을 때 실망하기 쉽다. 설령 성직자라도 욕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실망하기 쉽다. 많이 배운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에 있어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누구도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에 무지한 사람이 되었다. 미투와 관련된 것이다. 미얀마스님의 범계행위에 대한 글을 썼는데 스님의 입장에서 쓴 것이 화근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가 무지하다고 비판했다. 과연 나는 무지한 사람일까?

 

미얀마 승가에서는 계행을 생명과도 같이 여긴다. 그래서 미얀마승가에서 음계를 어기는 행위는 좀처럼 일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그 스님을 최소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정도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범계행위가 일어났을 때 이것은 틀림없이 성자를 유혹하는 여자 때문으로 보았다. 이는 초기경전에 이와 같은 사례가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테라가타를 보면 마하 목갈라나 장로는 여인에 대하여피부로 엮여진 분뇨의 자루”(Thag.1157)라고 했다. 이는 여성비하가 아니다. 감각적 욕망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소위 페미니스트, 여성운동가들은 이런 표현에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럴 경우 남자 보기를 입과 항문이라는 두 개의 문이 있는 욕망의 똥자루로 보아야 한다. 아홉 가지 구멍에서는 늘 부정한 것이 흘러나온다.”라고 말하면 공평할 것이다.

 

미투에 대한 글은 양비론으로 끝을 맺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에 대하여 쌍방간의 책임이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여성을 피해자로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글쓰기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2차가해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역지사지라고 한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상대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치우친 생각을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인간의 탐욕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미투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지만 둘 다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욕망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편은 악한 자이고 한편은 선한 자라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모두 악한 자라고 볼 수 있다. 탐욕은 본래 불선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양비론의 근거가 된다.

 

이 세상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까? 감히 이 세상 믿을 사람 없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사람들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욕계중생으로 태어난 이상 욕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누구나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여기 많이 배운 사람이 있다. 그는 사회적 지위도 있고 명예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격자처럼 보인다. 과연 이런 사람을 믿어도 될까? 그에게 욕망이 남아 있는 한 실망하기 쉽다. 여기 성직자가 있다. 그가 하는 말에 사람들은 감동받는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믿고 따를 것이다. 그가 빤쓰를 내리라면 내릴지도 모른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언행일치가 되는 사람일 것이다. 낮에 한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위가 다르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아는 것과 행위가 일치하는 지행합일 된 사람은 믿을 만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믿어서는 곤란하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탐욕이 남아 있다면 그 탐욕이 씨가 되어서 어떤 불선행위를 저지를지 모른다.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부모도 자식도 믿을 수 없다. 하물며 성직자라고 하여 믿을 수 있을까? 도력 높은 수행자라고 하여 믿을 수 있을까? 탐욕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믿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삼보밖에 없다. 욕망의 세계, 욕계에서는 부처님(Buddha)과 부처님의 가르침(Dhamma)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Sangha) 외에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불교인들은 삼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는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성직자를 믿어도 실망하기 쉽다. 물론 스님을 믿어도 실망하기 쉽다. 탐욕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어떤 중생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그러나 탐욕의 뿌리가 뽑힌 사람은 믿어도 될 것이다. 성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의지해서는 안된다. 공양은 할 수 있어도 귀의처로 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피난처로 해서는 더욱더 안된다. 불교인들이 믿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아야 할 곳은 승가이다. 그것도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를 말한다.

 

출가수행자도 승가를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 스님이 스님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기 쉽다. 스님이 스님에게 의지하면 파벌이 생겨난다. 오늘날 수많은 종단이 생겨난 것은 불교인들이 스님을 믿고 따라서 일 것이다.

 

재가자나 출가자나 의지해야 할 곳은 승가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에서 성자가 출현한다. 독살이 하면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본능이다. 누워 안락한 상태가 되면 음심이 일어날지 모른다. 누구도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 최근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불편하다. 많이 배운 자들, 많이 가진 자들도 투쟁하는 세상이 되었다. 의사라 하여 교사처럼 스승 사()’자를 붙여 주었음에도 마치 노동자들이 극한 투쟁을 하듯이, 환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왜 의사들은 극한투쟁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익 때문이다. 의사들 집단이기주의가 작동된 것이다. 의사들의 탐욕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로 강화되었음에도 목사들은 예배를 그만 두지 못한다. 한시적으로 중단하라는 것임에도 목숨을 거는 것 같다. 요즘 코로나 확산의 진원지는 교회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교회를 아마도 영업장정도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목사들의 탐욕으로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익이 된다면 지옥에라도 달려 갈 것이다. 마음 바탕에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탐욕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욕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한 존재이다. 인간은 본래 선한 것이 아니라 본래 악한 존재이다. 인간은 탐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취온(五取蘊)적 존재로 보고 있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태어날 때 부터 탐욕의 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간난아기는 순진해 보인다. 그래서 천진불사상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천진불사상은 외도사상이다. 인간은 본래 천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기는 자아의식이 생겨날수록 잠재성향이 발현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어린아이에게는 감각적 쾌락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어린아이에게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이 일어날 수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M64.5)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에 따르면 잠재성향(anusaya) 일곱 가지가 있다. 이는 일곱 가지 경향 곧,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의 경향, 분노의 경향, 견해의 경향, 회의적 의심의 경향, 자만의 경향, 존재에 대한 탐욕의 경향, 무명의 경향"(D33.14)을 말한. 이와 같은 잠재성향은 타고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선법을 가지고 태어난다. 탐욕, 성냄, 미혹 등 갖가지잠재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또 저 의식 밑바닥, 무의식의 영역에는 세세생생 켜켜이 쌓인 업이 있다.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과보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오늘 죽을 수도 있다. 업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업생(業生)이라고 한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늘 불선법에 지배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탐욕과 성냄과 미혹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흐름을 거슬러 살아간다.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욕계에 사는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불선법이라는 잠재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이다. 그래서 성악설이 탄력 받는다. 만일 인간이 탐진치를 소멸하는 수행을 하여 색계에 태어났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색계정거천의 경우 태어나면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본성은 선한 것이 된다. 색계정거천에서는 성선설이 탄력을 받는다.

 

욕망의 세계, 욕계에 태어나면 누구도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투의 가해자와 피해자 역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의사, 목사, 스님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욕계에서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믿을 것은 삼보밖에 없다. 삼보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이 중에서 현실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담마이다.

 

담마야말로 의지처이다. 그래서 담마는 담마를 따르는 자를 수호한다. (Dhammo have rakikhati dhammacāri)”(Thag.303)"라고 했나보다. 자신과 담마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2020-09-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