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권위 있는 학자스님이 말했다고 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0. 9. 29. 18:47

권위 있는 학자스님이 말했다고 하여

 

 

자현스님은 제사에 대하여 유교적으로 해석했다. 불교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유교적 제사개념을 말한 것이다.

 

며칠전 학자스님을 지적했다. 자현스님의 유튜브 강연을 듣고 두 가지를 지적한것이다. 하나는 승군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제사에 대한 것이다. 이를 ‘학자스님의 초기경전에 대한 무지 두 가지’(http://blog.daum.net/bolee591/16160106 )라 하여 스님의 법명을 들어 지적했다.

 

학자스님을 글로서 지적한 것은 스님이 공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조계종에서 학인스님을 가르치는 아사리스님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고 개인적 견해를 말했을 때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전쟁하다 죽으면

 

자현스님은 불교TV에서 승려의 전쟁참여에 대하여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스님은 독신이고 죽으면 천상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처자식이 있는 일반사람들 보다 더 용감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전사의 경’(S42.3)을 들어 반박했다.

 

전쟁하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느 나라이든지 국립묘지를 만들어 전쟁참전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전쟁에서 전과를 세운 사람들은 전쟁영웅이라 칭하고 영웅시하는 것이다. 이는 세속적인 관점이다.

 

출세간적 관점으로 본다면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은 어리석은 행위가 된다. 전쟁광들은 전쟁하다 죽으면 전사자들만이 태어난다는 전사자의 천상을 이야기하지만 부처님은 정반대로 이야기했다. 부처님은 전쟁하다 죽는 것에 대하여 그 전력을 다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S42.3)”라고 했다.

 

증오심없이 전쟁할 수 없다. 처음 전쟁에 참전한 병사는 사람을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옆에 동료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본다면 증오와 적개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전쟁광들은 전사들에게 증오심과 적개심을 고취시킨다. 설령 전장에서 죽더라도 전사자의 천국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정반대로 전쟁하다 죽으면 전사자의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는 “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S42.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가득한 전장터에서 죽으면 그 순간 사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악처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임종순간에 사악한 마음이 일어난다면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지막 죽음의 순간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했다. 이를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이라고 한다. 존재지속심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존재의 최후의 마음이 한존재의 최초의 마음과 같고 그 마음은 일생동안 지속된다는 것이 바왕가찟따이다. 그래서 임종순간이 매우 중요하다.

 

임종순간에 사악한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 사악한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 (paisandhi viññāa)’이 일어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라고 말씀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법우님

 

부처님의 전쟁관은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를 들어 살생도 가려서 한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살생하면 악처에 떨어진다고 했다. 이런 가르침이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어느 법우님은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장문의 댓글을 남겼다.

 

 

잘 이해가 안됩니다. 전륜성왕이 출현하면 좋겠지만 이상이고 실제로는 전쟁없이 덕으로 정복하고 그리고 덕으로 다스린 왕은 없습니다. 세종대왕처럼 덕으로 다스렸다해도 전쟁은 수행했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기로서 전쟁이 많았다고 알 고 있고 가비라국도 군인을 유지하고 훈련하고 이웃나라와 전쟁을 안 했을 리가 없으며, 약소국인 가비라국의 왕자로서 정치적 , 군사적 정세등 현실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부처님이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위해 목숨걸고 싸운 군인이 전사자의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다면 현실과 동떨어진 견해인데 이상에 치우친 그런 말씀을 과연 부처님이 하셨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운동도 서산대사와 같은 깨달은 도인이 앞장서서 '나라가 있어야 佛法도 있다'고 하면서 전쟁을 진두지휘해서 적을 죽이고 물리치려 한것이고 원광법사도 세속오계에서 殺生有擇,臨戰無退의 정신으로 전쟁에서는 사력을 다해 적을 죽이라고 한 것인데 당시 상황에서 전쟁에서 적을 죽이면 전사자의 지옥에 가니까 적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따라서 내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결딴나는 상황에서 왜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지않고, 신라를 침공한 적에게도 무저항으로 있는 것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 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까요?

 

부처님도 자신의 모국인 가비라국이 멸망하는 것을 막으려고 침공하는 코살라 국왕앞에 나가서 가급적이면 중지시키려 노력했고, 결국 몰살당하자 비통해하셨습니다. 전쟁은 아니라도 내 가족이 강도를 당하는 상황에서 내가 강도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중생의 현실을 있는대로 파악하고 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신 부처님께서 전쟁에서 스스로가 원하지 않아도 불가피하게 적을 죽여야 되는 냉엄한 현실과 동떨어진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어느 나라에도 적용할 수 없습니다.


불자들중에서도 이 말씀을 근거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니까 같은 상황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신 것은 없을 까요?


만약 1명을 죽여서 100명을 살릴 수 있다면 1명을 죽여도 된다는 얘기가 부처님 가르침중에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이 가르침이 불경에 근거가 있다면 이런 자세가 현실에 합당한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B법우님)

 

 

B법우님은 종종 장문의 글을 남긴다. 때로 견해차이가 있지만 몰랐던 것도 알게 해 준다. 편의상 원문에서 여러 개로 문단을 나누었다.

 

이번 댓글의 경우 잘 이해가 안됩니다.”로 시작했다. 상윳따니까야 전사의 경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과연 부처님이 하셨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라고 했다.

 

호국불교(護國佛敎)라는 이름으로

 

B법우님은 왜 경전에 실려 있는 부처님 말씀조차도 믿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썼을까? 이는 오랫동안 호국불교(護國佛敎)’라는 이름으로 학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의 영향이 크다. 살생도 가려서 하라는 살생유택을 말한다.

 

원광법사의 살생유택의 가르침은 경전에서 보이지 않는다. 또 백명을 살리기 위해 한명을 죽여도 좋다는 것 역시 경전에서 보이지 않는다. 다만 티벳경전에서 오백명을 구하기 위해 악인 한명을 죽여도 좋다는 경이 있지만 니까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스님이 징집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대부분 스님들은 영장이 나왔을 때 순순히 군대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전쟁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반사람들이 총을 들고 적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족계를 받은 부처님 제자가 총칼을 들고 적군과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스님이 명쾌하게 해법을 제시했다. 그 스님은 페이스북 댓글에다 싸움을 하고자한다면 환계를 하고 승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싸워야 합니다. 승려는 불살생계율을 지켜야 합니다.”(L스님)라고 글을 남겼다. 이것이 정답이다.

 

스님이 전쟁터에 나가려거든 승복을 벗고 참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승복대신에 전투복을 입고 일반사람들처럼 증오심과 적개심에 가득차서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전장에서 전투하다 죽으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다. 임종순간 최후의 마음이 지옥불을 보았다면 그 지옥불을 대상으로 하여 지옥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자현스님의 유튜브강연을 듣고 승군에 대한 이야기와 제사에 대한 이야기에 대하여 글로서 저격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유튜브에 자현스님의 제사에 대한 강연이 올려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동영상제목은 사는 생쇼일 뿐이다? 자현스님의 다로드 71’(2020-9.28)라는 타이틀로 되어 있다.

 

올려진지 불과 하루 밖에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동영상이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혹시나하고 열어 보았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그렇다면 자현스님의 제사관은 어떤 것일까? 자현스님은 유교의 제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제사를 지내는 거는 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은 사라진 거고, 귀신은 없어진 거고, 귀신은 잠재적인 거, 그러니까 기차로 이야기하면, 기차의 동력은 이미 끊어진 거고, 거기서 관성으로 밀려나가는 거는 기차의 동력은 아니죠. 그러니까 제가 죽고 여러분이 저에 대하여 회상을 하는 거에요. 그것이 저에요? 완전히 아닌 건 아니지만 그건 약간 다르죠. 그런식 생각을 한다고 보시면 되요.”(자현스님)

 

 

자현스님에 따르면 귀신은 없는 것이다. 이는 유교적 관점에 따른 것이다. 참고로 자현스님은 유교와 관련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불교인들에 대하여 불교의 제사에 대하여 유교적 제사로 설명하고 있다.

 

권위 있는 학자가 말했다고 하여

 

자현스님은 불교TV에서 제사에 대하여 추모의 예라고 했다. 그래서 제사가 가능한 것은 추모의 예지 실제로 귀신이 와서 그걸 흠향을 해가지고 무얼 하고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박사타이틀이 다섯 개나 되는 스님이 불교TV에서 말하면 다 믿어야 할까? 이럴 때는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누군가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지 말라고 했다. 장로가 말했다고 하여, 권위 있는 학자가 말했다고 하여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D16.98)라고 말씀했다. 경전을 열어 보아서 맞는지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소송경에 실려 있는 담장밖의 경(tirokudda Sutta)’

 

제사와 관련하여 담장밖의 경’(Khp.7)이 있다. 쿳다까니까야 쿳다까빠따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참고로 쿳다까빠따(khuddakapāha)는 불교인들의 신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아홉 개의 게송을 모아 놓은 것이다.

 

쿳다까빠따(khuddakapāha)소송경(小誦經)’이라고도 한다. 테라와다불교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인 라따나경(보배경, Khp.6), 망갈라경(축복경, Khp.5), 멧따경(자애경, Khp.9)이 들어가 있다. 이 세 경은 숫따니빠따에도 실려 있어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아홉 개의 소송경에 놀랍게도 담장밖의 경(tirokudda Sutta)’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제사공덕의 중요성이라고 볼 수 있다.

 

소송경에 실려 있는 아홉 개의 경은 불교인이라면 모두 외워야 한다. 수많은 경에서 특별하게 아홉 개의 경을 선정한 것은 그만큼 외워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부터 널리 유통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소송경이 초심자들의 수련을 위한 가르침으로 편집된 것이기 때문이다.

 

제사와 관련된 내용을 보면

 

소송경에 실려 있는 경들은 축복이나 예식의식으로 오래 전부터 활용되어 왔다. ‘담장밖의 경도 그 중의 하나이다. 특히 제사와 관련된 것이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담장 밖의 거리

모퉁이에 있으면서

가신 친지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문기둥에 서있나이다.

 

여러 가지 음식과

많은 음료를 차렸으나

뭇삶들의 업으로 인해

아무도 님들을 알아채지 못하나이다.

 

연민에 가득 차서

가신 친지들에게

제 철의 정갈하고 훌륭하고

알맞은 음식과 음료를 헌공하오니,

 

가신 친지들을 위한 것이니

친지들께서는 행복하소서.

여기에 모여 친지의 가신 님들도 함께 했으니

풍요로운 음식의 성찬에 진실로 기뻐하소서.” (Khp.7)

 

 

경의 앞부분을 옮긴 것이다. 경을 보면 가신 친지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문기둥에 서있나이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이는 아귀계에 있는 친지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자눗소니의 경에 따르면 아귀중생을 위한 음식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그것으로 연명하고 그는 그것으로 살아갑니다.”(A10.17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아귀계에 태어난 친지들을 위하여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존재는 육도윤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각자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아귀계이다. 그런데 아귀계에 태어난 존재들은 아귀계의 음식이 없다는 것이다.

 

천상이나 인간, 아수라, 축생,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은 각 세계에 해당되는 음식이 있어서 제사를 지내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아귀계에 태어났다면 아귀계를 위한 음식이 없으므로 제사를 지내 주어야 한다.

 

부처님은 아귀계를 위한 제사를 지내 주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일반범부가 죽으면 어느 세계에 태어날지 모르는데 그 중에 한 세계가 아귀계이다. 그래서 선망 부모 또는 친지들이 그곳에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귀계는 아귀계를 위한 음식이 별도로 없기 때문에 후손이 제사 지내 주어야 한다.

 

부처님은 제사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사를 장려했다. 그러나 살생의 제사는 반대했다. 그런 제사는 아귀계를 위한 제사가 된다. 그래서 바라문이여, 이 기나긴 세월 동안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이 해당되는 곳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A1.177)라고 했다.

 

먼저 돌아가신 부모가 아귀계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설령 그곳에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친지나 친족들 중에 태어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조상 중에 아귀계에 태어난 조상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신 친지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문기둥에 서있나이다.”(Khp.7)라고 한 것이다.

 

불교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단히 자비로운 행위에 해당된다. 그리고 공덕이 된다. 돌아가신 친지들에게 제사지내는 것에 대하여 바라문이여, 다른 돌아가신 친지들이나 친족들이 해당되는 곳에 나타나서 그들이 그 보시를 향유합니다.”(A10.177)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돌아가신 친지들이 제사음식을 수용함을 말한다.

 

경전에 근거하면 정견

 

여기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이럴 때 불교인들은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 그 사람의 도력이 높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까? 그 사람의 학식이 많이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까?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으면 모두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 견해를 말한다.

 

개인적 견해는 사견이다. 사견은 삿된 견해(邪見)’가 되기 쉽다. 자현스님은 불교인들이 즐겨 보는 불교TV 강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말했다. 유교적 제사방식을 도입하여 불교인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그 결과 귀신은 없고 단지 추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또 제사는 문화행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경전에 근거하면 정견(正見)

 

여기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이럴 때 불교인들은 누구 말을 믿어야 할까? 그 사람의 도력이 높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까? 그 사람의 학식이 많이 때문에 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까?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으면 모두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 견해를 말한다.

 

개인적 견해는 사견이다. 사견은 삿된 견해(邪見)’가 되기 쉽다. 자현스님은 불교인들이 즐겨 보는 불교TV 강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말했다. 유교적 제사방식을 도입하여 불교인들에게 설명한 것이다. 그 결과 귀신은 없고 단지 추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또 제사는 문화행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거나 귀로 듣지 못한 것에 대하여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 역시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있고 귀로 듣지 못하는 것도 있다. 자신의 깜냥(感量)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경전에 근거해야 한다. 경전에 근거하면 정견(正見)이 되고, 자신의 견해를 말하면 사견(私見)이 된다.

 

 

2020-09-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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