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재미없다면
사는게 재미없다고 한다. 삶이 권태롭고 무료하다고 한다. 마치 방향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하루하루가 지겹고 하품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어제와 같은 삶이다. 내일을 아직 살지 않았지만 어제와 오늘에 비추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처럼 재미없고, 권태롭고, 지겹고, 하품나는 삶에서 탈출구는 없을까?
최근 유튜브에서 글쓰기 강좌를 들었다. ‘고미숙’선생과 ‘강원국’선생의 글쓰기 강좌를 말한다. 한번 들은 것이 아니다. 두 번 이상 들었다.
글쓰기 강연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들의 생생한 체험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글쓰기 비법에 대하여
고미숙선생은 강연이 끝난 다음 질의응답시간에 글쓰기 비법에 대해 말해주었다. 글쓰기에도 비법이 있고 왕도가 있는 것일까? 들어 보니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 있다. 글을 쓰고 난 다음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이 어려운 것을 해냈잖아.”라며 자신이 ‘뿌듯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잘 쓰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했다. 유시민선생은 글쓰기 강연에서 “말하듯이 쓰십시오.”라고 말했다. 말하듯이 쓴 글이 가장 잘 쓴 글이라고 했다. 잘 쓰려고 하면 할수록 글은 더 써지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욕심과 관련이 있다.
좌선을 할 때 마음을 내려 놓으라고 한다.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잘 되지 않는 것이 수행임을 말한다. 마음을 내려 놓고 내려 놓은 마음에 맡겨 버리는 것이다. 잠자는 것도 그렇다. 잠을 잘 자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잠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이럴 경우 “잠이 오면 잔다.”라는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한다.
무엇이든지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잘 안된다. 좌선도 그렇고, 잠자는 것도 그렇고, 글쓰기도 그렇다. 그래서 고미숙선생은 글을 쓸 때 “처음부터 글을 완성시키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글쓰기의 비법입니다.”라고 말했다.
가슴이 설레는 이유는
강원국선생의 글쓰기 강연은 유튜브 도처에 깔려 있다. 들으면 공감하는 것이다. 특히 글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더욱 더 절절히 와닿는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가슴이 뛴다.”라는 것이다.
글쓰기 하면 가슴이 뛴다고 했다.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돈을 굴리는 것으로 설명했다.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돈 맛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부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 부자가 되려면 종자돈이 필요하다. 종자돈을 모으기까지는 힘겨운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종자돈으로 투자를 하여 재산이 불어나면 그대로 가만 있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더 쌓을까 궁리한다는 것이다. 마치 눈덩이를 굴리듯이 궁리하면 할수록 더욱더 불어난다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처음 글쓰기가 어렵다. 그러나 자주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글이 쌓이고 쌓이면 커다란 무더기가 된다. 마치 재산이 쌓이는 것처럼 재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마치 부자들이 돈을 굴려서 더 많은 부를 창출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글쓰기하는 첫번째 이유로서 “가슴이 뛴다.”라고 했을 것이다.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된다고?
열심히 산 사람이 있다. 그는 정년때까지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정년이 되어서 사회로 나오게 되었을 때 ‘소외’와 ‘허무’를 느낀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의 삶과 단절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조직에 올인하는 삶을 살다 보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나이 육십이 되어 갑자기 세상 속으로 던져 졌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막상 홀로 되었을 때 소외와 허무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라는 책도 있다.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 것 보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여기서 ‘착하게 산다’는 것은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꾸살라(kusala)행’이라 하여 십선행으로 표현된다.
법구경에 ‘칠불통계게’가 있다. 게송에서 ‘중선봉행(衆善奉行)’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선(善)은 꾸살라를 말한다. 우리말로는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kusalassa upasampadā)”(Dhp.183)라는 뜻이다.이다. 이는 다름아닌 지혜로운 삶이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저 언덕으로 건너 갈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삶을 사는 이유는 이 언덕에서 머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삶이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것, 즉 십선행으로 사는 것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앞만 보고 열심히 사는 것보다는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지혜로운 삶이 요청된다.
글쓰기의 통쾌함에 대하여
꾸살라행을 하는 것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지혜로운 삷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수행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좌선이나 행선만을 뜻한다는 것은 아니다. 글쓰는 것도 일종의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모두 수행의 범주안에 들어간다. 좌선이나 행선은 언어를 떠나 직접 체험하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글쓰기는 언어를 사용하여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글에는 힘이 있다. 누군가 경전의 문구를 읽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면 이는 언어를 통해서 자신을 변화시킨 것이다. 인터넷에서 누군가 쓴 글을 읽고 공감했다면 이는 언어를 이해해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글쓰기 하면 서로에게 좋은 것이다. 글쓰기를 수행의 방편으로 본다면 자신을 변화시켜서 좋은 것이다. 그런데 글을 공유하면 남에게도 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미숙선생은 글쓰기의 통쾌함에 대하여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고,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고, 이번 생에도 좋고 다음 생에도 좋고”라고 말했다.
글쓰기로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을
글쓰기하면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이다. 부처님은 자리이타행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모든 네 사람 가운데 최상이고 수승하고 가장 훌륭하고 훨씬 탁월하다.”(A4.95)
여기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번째 부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다. 두번째 부류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다. 세번째 부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만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다. 네번째 부류는 위에 언급된 것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네 종류의 인간중에서 최악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네 종류의 삶에서 최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삶을 자리이타행이라고 한다. 글쓰기를 하면 자리이타행을 실천할 수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타인을 위한 삶도 살 수 없다. 그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밖에 하지 않는다. 동물적 삶을 사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일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화장용 장작은 양끝이 불타고 중간은 악취가 나기 때문에 마을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고 한적한 곳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와 같다고 말한다.”(A4.95)
빠알리삼장에서는 최악의 사람에 대하여 화장터의 장작으로 비유한다. 청정도론에서는 계행이 엉망인 반승반속(半僧半俗)에 대하여 “화장터의 타다 남은 장작처럼 출가와 재가의 양자에서 소외된다.”(Vism.I.154)라고 했다.
반승반속의 승려가 화장터의 타다 만 장작더미와 같다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띠붓따까 ‘삶의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출가한 훌륭한 아들이 탐욕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자극되고, 마음에 분노가 넘치고, 정신적으로 사유가 타락하고, 새김이 마비되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올바로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감각능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마치 쇠똥을 가운데 바르고, 양쪽 끝이 타다 남은 태워진 화장용 장작더미는 마을에서 목재로 사용할 수 없고 숲에서도 목재로도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재가자로서의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수행의 목적도 성취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It.89-90)
부처님은 탁발에 대하여 삶의 끝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탁발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이 “손에 발우나 들고 다녀라.”라는 저주가 있다고 말씀하시고서, 탁발에 대하여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서 출가자도 아니고 재가자도 아닌 반승반속에 대하여 화장터에서 타다 만 나무토막과도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대부분 최악의 사람이 되기 쉽다. 화장터에서 타다 만 나무토막처럼 아무짝에도 쓸모 없은 인간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살지 않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이 해당된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하는 사람도 해당될 것이다.
여기 한평생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있다. 정년이 되어서 나오게 되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럴 경우 심한 소외와 허무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한평생 자신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자기계발을 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도 않았고 보시나 봉사활동 등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살지 않았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삶을 산 것이다. 최악의 삶을 산 것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퇴출되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전화한통화 걸려 오지 않았다. 허무했다. 사십대 중반에 세상에 버려졌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밤낮없이 주말없이 휴가없이 열심히 일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일한 것이다. 그러나 효용가치가 떨어졌을 때 퇴출되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열심히 일만 했을 뿐 자기계발이나 타인을 위한 봉사의 삶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오로지 열심히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일찍 퇴출되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더 일찍 퇴출되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해 본다. 퇴출되고 나서 홀로 되었을 때 비로소 나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이다.
홀로 작은 사무실에 고립되었을 때 할 것이 없었다. 철철 남는 시간에 인터넷 가지고 놀아도 지루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생각하다가 글을 써 보기로 했다. 2005년 당시 블로그가 ‘히트상품’이었는데 누구나 클릭 몇 번 하면 블로그를 만들 수 있었다.
글을 써 본적이 없다. 다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써 보았다. 놀랍게도 반응이 있었다. 격려의 댓글에 자극받아 계속 쓰게 되었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글쓰기는 수행과 동의어
글쓰기 하면 자신에게도 이익이고 타인에게도 이익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권유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권유해 보지만 아직까지 실천했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글쓰기는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올해 쓴 글과 작년에 쓴 글은 다르다. 십년전과는 아주 다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끊임없이 성장해 왔음을 말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제가 오늘 같고, 문법적으로 성립하지는 않지만 내일이 어제 같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정체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성장하지 않았다’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이 어제와 다르고, 내일이 오늘과 다르다면 변화가 있는 것이다.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매일매일 끊임없이 변화시켜 나간다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가 그렇다. 수행도 그렇다.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이다. 수행이라는 말은 ‘닦는다’는 뜻 보다는 변화시킨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수행을 뜻하는 빠알리어 바와나(bhāvanā)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mental development’의 뜻이다. 정신적으로 성장케 하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또 바와나는 ‘존재(existence)’의 뜻도 있다. 이는 ‘becoming’의 뜻으로 되어가는 것, 즉 변화를 뜻한다. 수행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글쓰기도 수행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글쓰기가 비록 언어로 분별된 것이긴 하지만 가르침을 이해했을 때 자신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를 하면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다른 나가 된다. 그 사이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글쓰기 하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은 수행으로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글쓰기는 수행하는 것과 같다. 글쓰기도 수행인 것이다.
사는게 재미없다면
철철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밥먹는 것이 가장 큰 행사가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는 삶이 무료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울 것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이라면 움직임이 없는 것과 같다. 게으른 사람이다. 그래서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라고 했다.
숨만 쉬고 있다고 해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숨을 쉬고 있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사실상 죽은 자나 똑같다. 정신적 향상이 없다면 그날이 그날 같아서 재미없고, 권태롭고, 지겹고, 하품나는 삶이 될 것이다.
사는 것이 재미없다고 한다. 특히 나이가 들어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다. 정년 퇴임하여 시간이 철철 남았을 때 소외와 허무를 느낄 때 사는 것이 재미없다고 말한다. 이럴 때 글을 쓰면 좋다.
글을 쓰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향상을 이룰 수 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달라진다. 매일매일 글을 써서 정신적 향상을 이루어 나갈 때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방일하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Dhp.21)고 했다. 사는게 재미없다면 글을 써야 한다.
2020-10-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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