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숭고함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20. 7. 10. 16:05

 

숭고함에 대하여

 

 

꽃은 아름답다. 어느 누구도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아름다운 것은 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아름다울 수 있다. 특히 여인이 그렇다. 나이가 어린 여자는 예쁘다라는 더 듣기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팔청춘을 지나 장년기에 접어 들면 아름답다라는 말이 더 좋은 말이다. 중년기에 접어들면 우아하다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에게는 공통적으로 아름답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쾌감은 아름다움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유튜브에서 본 ‘5분뚝딱철학의 김필영 선생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라고 했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꽃을 보고서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쁜 여인을 보고서 쾌감을 느끼지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쾌감을 느끼는 것은 많다. 고즈넉한 오솔길을 걸을 때도 쾌감을 느낀다. 잘 정돈된 정원을 보면 쾌감을 느낀다. 쾌감은 아름다움에서 나온다. 추한 것이라면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아마 시든 꽃을 보면 불쾌감을 느낄지 모른다. 오솔길에 쓰레기가 널려 있으면 불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쾌와 불쾌는 미와 추와 관계가 있다. 호와 불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면 그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반대로 그 사람에 대하여 비호감을 가지면 그 사람은 추한 사람이 된다. 이렇게 쾌불쾌와 호불호는 자신의 지성과 상상력에 달려 있다. 대상에 따라 아름다움과 혐오로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산냐()’에 따른 것이다. 어떤 고정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을 때 그 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세 가지 쾌()가 있는데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쾌라고 했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쾌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또 하나는 숭고라고 했다. 숭고도 아름다움일 수 있을까? 숭고도 쾌감일 수 있을까?

 

칸트에 따르면 두 가지 숭고가 있다. 하나는 수학적 숭고이고, 또 하나는 역학적 숭고이다. 한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보면서, 밤하늘에 수많은 별을 보면서 느끼는 쾌를 수학적 숭고라고 한다. 그리고 아찔한 절벽 앞에서, 휘몰아치는 거센 폭풍우 속에서 느끼는 쾌를 역학적 숭고라고 한다. 이렇게 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아름다움, 수학적 숭고, 역학적 숭고를 말한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쾌불쾌와 호불호는 인식능력에 따른 것이다. 세 가지 쾌 역시 인식능력에 따른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 인식능력에는 지성, 상상력, 이성이 있다.

 

여기서 지성은 대상을 우리의 머리 속에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의 틀에 적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과를 빨갛다라고 말하는 것도 지성에 따른 것이다. 이를 불교용어로 말한다면 산냐(, )라고 말 할 수 있다.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로 된 것은 모두 개념이다. 그렇다면 상상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상상력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을 만들어서 대상에 부여하는 능력을 말한다. 불교 용어로 말한다면 빠빤짜(戱論)가 될 것이다.

 

누군가 아름답다라고 말 했을 때, 이는 지성을 기본으로 하되 자유로운 상상력이 작용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말하고, 고즈넉한 오솔길이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이는 지성으로는 범주를 적용하고 상상력을 통해서 이러한 대상으로부터 합목적성을 봄으로써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수학적 숭고에 대하여

 

수학적 숭고란 무엇일까? 이런 것이다. 숫자를 세는 것에는 한정이 있다. 조단위를 넘어 가면 경이 될 것이다. 그 너머는 무엇일까? 아무리 큰 자연수를 상상하더라도 그 보다 큰 자연수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력은 슬슬 좌절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때 이성이 등장한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이성은 어떤 대상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 속에서 파악하는 능력을 말한다.

 

아무리 큰 수를 상상해도 그것 보다 큰 수가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수에 대한 것이 있다. 숫따니빠따를 보면 천문학적 숫자에 대한 것이 있다.

 

꼬깔리야의 경에 따르면 1꼬띠가 있다. 1꼬띠는 107승이다. 1빠꼬띠는 1014승이고, 1꼬끼빠꼬띠는 1021승이고, 1나후따는 1026승이고, 1닌나후따는 1035승이고, 1압부다는 1042승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큰 수를 상상해도 그 것보다 더 큰수가 항상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절대적으로 가장 큰 수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연수를 하나의 총체적인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보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무한이다. 그래서 이성은 가장 큰 자연수는 무한수이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상상력과 이성은 차이가 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 보아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판단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무한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머리로는 잘 알 수 없다. 이럴 경우 이성도 좌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불쾌한 감정에 지배될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무한이라는 것을 우리가 포착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무한을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불쾌의 감정은 쾌의 감정을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나타나는 감정을 수학적 숭고라고 말한다.

 

수학적 숭고의 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한없이 펼쳐진 지평선이나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 크기에 압도되어 상상력과 이성이 그것을 포착하지 못해서 불편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이성을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수학적 숭고에 대하여 5분 뚝딱철학 김필영 선생은 로스코의 그림을 소개 했다. 단순한 작품이다. 단지 색만 칠해져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림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이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수학적 숭고라는 것이다.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면 온통 까맣게 칠해진 그림을 볼 수 있다. 일종의 추상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도 그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그림을 본 소감에 대하여 작가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작품 활동을 했겠지만 보는 사람은 그 뜻을 좀처럼 이해 할 수 없다.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은 아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작품일 것이다. 작품전체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모던한 국립현대미술관, 산속의 놀이공원 옆에 있어야 할까, 2008. 11. 21.)라고 적어 놓았다.

 

 

오로지 검은 색으로만 칠해져 있는 작품에서 관람자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대개 , 이런 그림이 다 있어?”라며 지나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오래 바라 보고 있으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숭고함을 보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것이 수학적 숭고일 것이다. 상상력과 이성이 결합된 것이다.

 

역학적 숭고에 대하여

 

역학적 숭고는 어떤 것일까? 아찔한 절벽에 섰을 때 공포 같은 것이다. 무시무시한 폭풍우 같은 것이다. 자연의 힘에 완전히 압도된 것을 말한다. 또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은 이런 거대한 힘에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두 다리를 잃은 퇴역 장교가 폭풍우 맞서는 장면이 있다. 폭풍우속에서 신하고 한판 붙어 보는 것이다. 공포스런 상황속에서도 인간은 공포에 굴하지 않을 수 있다. 퇴역장교는 거대한 힘에 압도되어 공포와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힘과 맞장을 뜨고 있는 자신의 내면에 힘을 보면서 쾌를 느낀다. 이처럼 불쾌함 속에서 나타나는 쾌를 역학적 숭고라고 한다.

 

역학적 숭고를 경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간은 숭고함은 커녕 불안에 떨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숭고한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보다 안전한 장소에 있어야 한다. 안전한 장소에서 이러한 공포스런 상황을 목격할 때, 예를 들어 아찔한 절벽 앞에서 또는 휘몰아치는 거센 폭풍우를 안전한 건물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역학적 숭고를 느낀다는 것이다.

 

 

밤하늘에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칠흑의 어둠을 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볼 때 심연을 보는 것 같다. 이는 단순히 검은 것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검은 것이다. 한자어로는 검을 흑()이 아니라 검을 현()이 될 것이다.

 

캔버스에 온통 검은 칠을 해 놓았다면 비행기에서 보는 깊이가 있는 블랙이 연상될 것이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vast blackness’가 될 것이다. 이처럼 광대한 밤하늘을 보았을 때 외경이 일어난다. 마치 빨려 들어 갈 것 같은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도 있다. 동시에 아름다움도 있다. 아마 이런 것이 역학적 숭고일 것이다. 역시 상상력과 이성이 결합된 것이다.

 

압도되었을 때

 

오래 전 영화관에서 영화 소개를 할 때 압도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화면을 압도하는 스케일이 큰 영화라는 것이다. 시네마스코프 대형 화면에 더구나 음향 시스템까지 갖추어서 영화관에 가면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 가는 것 같았다. 상상력을 초월한 것으로 결국 영화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숭고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경전에서도 숭고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아름다운 것은 성스런 것이라고 했다. 이는 성스러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런데 아름다운 것은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천상세계를 보았다면 그것은 자신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것이다. 이성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어떤 대상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천상에 대한 묘사가 많다. 그 중에 베자얀따 궁전이 있다. 경에서는 그 베자얀따 궁전에는 백 개의 첨탑이 있고, 하나 하나의 첨탑에는 칠백 개씩의 누각이 있고 하나하나의 누각에는 일곱 선녀가 있고, 한 사람 한사람의 선녀에게는 일곱 하녀가 있었습니다.”(M37)라고 묘사 되어 있다.

 

누군가 천상의 궁전을 보았다면 외경이 일어날 것이다. 자신의 지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상상력을 뛰어 넘는 것이다. 그래서 불쾌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환희가 일어날지 모른다. 숭고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쾌에서 쾌로 바뀌는 것이다.

 

거대한 유적지를 보았을 때 숭고를 느낀다. 이는 자신의 생각했던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유적지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이는 장쾌한 풍광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중국 여행을 갔을 때 마치 동양화에서나 나오는 풍광을 보았을 때 압도 된다. 이는 아름다움이 라기보다는 숭고함이다. 꽃을 보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2013년 실크로드 순례 갔었을 때 베제크리크 천불동 계곡에서도 압도적인 숭고를 보았다. 그것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숭고는 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

 

상윳따니까야에 사자의 경’(S22.78)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자후에 비유하여 설한 경이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설했다. 이와 같은 생멸의 가르침을 천상의 존재가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들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하고 높은 궁전에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S22.78)

 

 

하늘사람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라고 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천상의 존재들은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영원히 사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천상의 존재도 윤회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려움에 떨 것이다.

 

천상에서는 복과 수명이 다하면 윤회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세계로 떨어질지 모른다. 악처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빛나던 범천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속담이 있다.

 

천상의 존재들에게 있어서 부처님의 설법은 두려운 것이다. 모든 현상은 무상, , 무아이기 때문에 천상의 존재는 죽으면 어떤 세계에 갈지 모른다. 그런 한편으로 의지처가 된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불사의 가르침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율하게 된다. 희망의 탈출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길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천상의 존재들이 무상을 깨달았을 때 정신적 전율로서 두려움이 일어날 것이다. 영원히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무상하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이 들지 모르지만 무상을 깨달았을 때는 정신적 전율로서 두려움(cittutrasabhaya)’을 체험한다. 이어서 무상을 강력하게 통찰했을 때는 지혜에 의한 두려움(ñāabhaya)’이 일어날 것이다. 두려운 마음은 전율로 바뀌고 이내 감동의 물결이 이는 것이다. 이를 지혜에 의한 감동(ñāasavega)’이라고 한다.

 

경에서 천상의 존재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이 일어나는것을 보면 마치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를 보는 것 같다. 자신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압도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희망을 보았을 때 전율하고 감동하는 것은 벼랑 끝에서 구원 받는 것 같고, 폭풍우 속에서 섬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압도적인 자연의 힘에 굴복하기 보다는 맞서서 꿋꿋이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럴 때 쾌감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bhaya savega santāsa āpajjanti)”라고 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숭고함을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외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누구나 설법을 들으면 자신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마치 압도적인 자연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압도적인 폭풍우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이런 것은 꽃을 보았을 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일종의 외경, 경이, 숭고 같은 것이다. 압도적인 것 또는 절대적인 것을 대했을 때 느끼는 무력감 같은 것이다. 비행기 속에서 본 밤하늘의 광대한 어둠 같은 것이다.

 

갤러리에서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약 70% 사람들이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런 작품은 단순하다. 단지 색만 칠해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을 보고서 눈물을 흘린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숭고함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상상력을 넘어선 것을 본 것이다.

 

 

장쾌한 자연이나 거대한 유적지를 보면 자신의 상상을 초월한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면 역시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다. 이처럼 경이로운 자연을 접하면 처음에는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불쾌가 일어나지만 여기에 빨려 들면 쾌가 일어난다. 자신의 지각을 넘어서는 것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를 숭고라고 했다.

 

모든 종교는 숭고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물도 숭고함의 극치이다. 무엇보다 경전이다. 경전에서는 자신의 인식을 벗어난 이야기로 가득하다. 자신이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경외감이 일어난다. 부처님의 무상, , 무아의 가르침이 그렇다. 이런 가르침을 들었을 때 두려움과 전율과 공포가 일어난다고 했다.

 

 

경외감을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

현명한 자는 경외한다.

부지런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은

지혜로서 그처럼 관찰해야 하리.

 

이와 같이 열심히 지내며

차분히 적멸의 삶을 사는 님은

마음의 멈춤에 도달하여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리.”(It.29)

 

 

2020-07-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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