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순간 새로운 것은
우주는 왜 존재할까? 이를 달리 말하면 “왜 우주는 없지 않고 존재할까?”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근거를 제시한다. 물리학자들에 따르면, 진공속의 에너지 밀도는 0.0000…11056이라고 한다. 소수점 밑에 영이 51개 들어간다. 여기서 0.000…1% 만 달라졌어도 우주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소수점 다음에 영이 112개 들어간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 거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김필영 선생의 유튜브채널 5분뚝딱철학 ‘스티븐 와인버그: 인류원리’에서 본 것이다.
자연과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물리학자의 눈에 본 우주의 존재이유는 물질적으로 보았을 때 기적에 가깝다. 이처럼 기적처럼 존재하는 우주에 생명체가 있다면 이를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구라는 별에는 생명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지적생명체가 있다. 인간을 말한다. 그렇다면 지구에 왜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것일까? 태양에서 지구까지 거리는 1억 5천만키로미터이다. 조금만 가까웠어도 너무 뜨거워서 생명체가 생겨날 수 없고, 조금만 멀었어도 너무 차가워서 생명체가 생겨날 수 없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태양과 지구가 딱 적정거리인 1억 5천만키로미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에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출현하게 된 것은 기적에 기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것이다. 인간과 같은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환경을 가진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런 우주가 존재할 확률이 0.00…(0이 112개)1% 임에도 왜 우주가 존재하는 것일까?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우주의 존재이유에 대하여
우주의 존재이유에 대한 세 가지 답이 있을 수 있다. 첫번째 대답은 신이 일부로 의도적으로 우주를 그렇게 창조했다는 것이다.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환경을 가진 우주를 신이 의도적으로 창조했다는 것은 유일신교 신자들이 믿기 좋은 대답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이 의도적으로 창조했다면 확률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 대답은 여러가지 종류의 우주가 생겨날 경우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는 것이다. 끈이론에 따르면 생겨날 수 있는 우주의 종류가 10에 500승이라고 한다. 이는 앞서 언급된 물리학자가 추론한 0.00…(0이 112개)1% 보다 더 많은 것이다. 이렇게 많은 우주 중에서 지적인 생명체가 출현하기에 딱 좋은 환경을 가진 우주가 하나쯤 생기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기적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 대답은 와인버그라고 하는 물리학자가 우주상수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한 원리로서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로 설명한다. 인류원리에 따르면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대단히 역설적인 말이다.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
인류원리에 대한 비유가 있다. 머리 좋은 돌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머리가 좋은 돌고래가 동해바다에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 돌고래는 너무 머리가 좋아서 인간으로 따지면 아이큐가 200정도 된다. 돌고래는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 ‘왜 바다가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수년간 연구 끝에 돌고래는 이런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이 우주에 돌고래가 살기 딱 좋은 환경을 가진 바다가 존재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돌고래는 신기했다. 어디를 가나 자기가 딱 살기 좋은 바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돌고래는 “야, 이것은 기적이야! 이런 바다가 존재할 확률이 거의 없었는데 말이야.”라고 감탄한 것이다. 이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기적이 아니야. 단지 돌고래가 살기 좋은 바다가 존재하는 이유는 네가 그 바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해 주었을 것이다. 똑 같은 이유로 인류원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인류원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는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앞문장과 뒤문장을 바꾸어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에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우주가 존재하는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한다.”라는 말과 같다.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한다는 말은 오해를 살 수 있다. 인간이 우주를 창조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인버그의 인류원리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원리
와인버그의 인류원리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불교에서는 인류원리를 반대하는 말 즉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한다.”라는 말과 유사한 가르침이 니까야에 실려 있다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살라야따나상윳따(S35)에 따르면 일체(Sabba)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한 말일 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맬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의 감역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S35.23)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일체로서 부처님의 전지성으로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둘째, 감역의 일체로서 네 가지 영역[삼계와 열반]의 일체현상을 말한다. 셋째, 개체의 일체로서 욕계, 색계, 무색계의 현상을 말한다. 넷째, 부분적인 일체로서 다섯 가지 감각적 물질적 대상을 말한다. 경에서는 두 번째인 감각장소로서의 일체를 말한다.
부처님은 시각이나 청각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서 본 것에 대하여 일체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세상이고 우주이다. 그래서 삼사화합촉에 따른 의식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세상이 생겨난다고 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나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 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바라본 세상이고, 또 하나는 자신은 세상의 일부분으로 객체가 되어 바라본 세상을 말한다.
불교적 세계관은 당연히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바라본 세상이다. 그래서 시공간은 여섯 가지 감역의 바다에서 조건지어져서 파생된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이 먼저 존재하고 감각의 장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후자인 우리가 객체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결과로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자유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나는 후차적 존재이고, 나를 있게 한 하나의 원인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 접근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존재의 근원 내지 창조주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나를 창조한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고 신으로부터 구제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미 형성되어 있는 시공간에 객체적인 존재로 형성되어 있다면 필연적으로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형이상학적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치 현대물리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을 밝혀 보고자 하는 시도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도가 불교에도 있다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을 밝히고자 ‘알 수 없는’ 의문을 가지고 일년, 이년, 십년, 삼십년, 심지어 평생을 수행정진 하지만 해답을 얻지 못한다. 이는 경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대로 존재의 근원을 밝히려 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고 답이 없는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경에서와 같이 “그것은 그의 감역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S35.23)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것이란 주석에 따르면 “언어로 말해져야 할 바에 기초한 것 일뿐”(Srp.II.358)이라고 했다.
존재의 근원은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여섯 감역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인식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 것을 대상으로 하여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든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고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알 수 없는 의문을 가진다면 이는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을 찾는 것 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나는 뭐란 말인가? 현존에 대한 의문이다.
현존에 대한 의문
영국의 재가불교수행자 ‘스티븐 배철러’가 쓴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이라는 책이 있다. 책을 보면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기보다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81p)라고 의문했다고 한다. 어느 날 숙소로 가는 길에 “갑자기 모든 것이 완전히 낯선 느낌이 강력하게 솟구쳐 걸음을 멈추었다.”라고 표현했다. 이와 같은 낯선 느낌에 대하여 삶의 바다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의 꼭대기로 올려진 것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느낌에 대하여 “그것은 뭔가 아무것도 아니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가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라고 했다.
스티븐 배철러가 의문했던 것은 현존에 대한 것이다. 현존에 대한 의문은 우 조띠까 사야도의 책 ‘마음의 지도’에서도 볼 수 있다. 사야도는 “무엇을 본다는 것은 놀라워요.”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놀랍고도 경이롭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음인가요” 이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면 충격일 것입니다. 꽃이 있고, 나무가 있고, 곤충과 동물, 인간, 행성이 있는 것은 경이롭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음이 아닌가요? 어째서 어떤 것이 있나요? 어떤 것이 있는 그 자체로 놀랍습니다!”(우 조띠까 사야도, 마음의 지도, 139쪽)
우 조띠까 사야도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어서 “왜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음인가요”라는 말을 이해하면 충격 받을 것이라고 했다. 마치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 이것만 알면 깨닫는 다는 말과 유사한 것이다. 현재 눈에 보이는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 경이롭다고 했는데, 이 말은 앞서 5분뚝딱철학에서 언급된 와인버그의 인류원리와 유사하다.
와인버그의 인류원리에서는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 말에서 앞문장과 뒤문장을 바꾸면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에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우주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야도는 “수행자는 보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 놀랍다는 것을 발견합니다.”(139쪽)라고 말했다. 무언가 본다는 것은 의식이 발생함을 말한다. 의식의 발생은 다름 아닌 세상의 발생이다. 그래서 매순간 새로운 세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깨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삼세에 대한 의심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치 꿈꾸듯이 무의식적으로 살아 간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살아 갈 때 세상은 항상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야도는 “보는 것을 새로운 과정, 새로운 경험으로 봅니다.”(139쪽)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을 보는 방법이 일반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깨어서 봅니다.”라고 말했다. 깨어서 본다는 것은 항상 사띠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사띠를 유지했을 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새롭게 경험한다고 했다. 매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이를 정신-물질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 대하여 정신-물질 과정이라는 것을 알면 삼세에 대한 의심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명색의 조건을 파악하면 삼세에 대한 의심은 사라질 것이라 고했다. 모두 다섯 가지 조건으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 첫 번째 조건의 파악을 보면 정신적 조건에 대한 것으로 “이와 같이 조건에 따라 명색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현재세가 그렇듯, 과거세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겨났고, 미래세도 조건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라고 관찰해야 한다.”(Vism.19.5)라고 했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를 관찰하면 삼세에 대한 의혹 16가지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등의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오로지 조건발생하는 물질-정신적 과정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네 번째의 ‘행위적-이숙적 파악 조건’에서 이런 게송이 있다.
“업으로부터 이숙이 생겨나고
이숙은 업을 생성한다.
업으로부터 재생이 있고,
이와 같이 세상이 일어난다.”(Vism.19.18)
세상이 일어나는 원리에 대하여 업과 업이숙으로 설명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업을 산출하는데, 업은 시간을 두고 익음을 말한다. 이렇게 시간을 두고 달리 익는 것을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이라고 한다. 행위를 하여 즉각적 과보를 받기도 하지만 조건이 형성되어야 받을 수 있는 업도 있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정신-물질 과정에 대하여 행위의 윤전과 이숙의 윤전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이와 같이 행위-윤전과 이숙-윤전을 통해서 조건으로부터 명색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 명색은 현재세에서처럼 과거세에서도 행위-윤전과 이숙-윤전을 통해서 조건으로부터 일어났고, 미래세에서도 행위-윤전과 이숙-윤전을 통해서 조건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관찰한다.”(Vism.19.18)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업의 상속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업과 업보가 있고, 행위-윤전과 이숙-윤전이 있고, 업의 생성과 이숙의 생성이 있고, 업의 상속과 이숙의 상속이 있고, 행위와 행위의 결과가 있다고 관찰한다.”(Vism.19.18)라고 했다.
이와 같은 정신-물질을 관찰하면 조건에 따른 업과 업의 과보만 관찰될 뿐이다. 여기에 나 또는 창조주라 불리는 주재자가 끼여 들 틈이 없다. 그래서 “인과의 연속으로 통해서 일어나는 명색만이 나타난다. 원인 이외에 행위자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숙의 생성 이외에 이숙의 향수자를 발견하지 못한다.”(Vism.19.19)라고 했다. 다만 있다면 나라고 불리는 행위자가 있고, 나라고 불리우는 향수자가 있지만, 여기서 나는 인습적으로 불리우는 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매순간 새로운 것은
부처님은 세상이 일어나는 원리에 대하여 명쾌하게 설명했다. 이는 철저하게 우리 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주로 확장한 것이 아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여 세상이 일어나는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이를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했다. 이는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은 단지 정신-물질적 작용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업과 업의 이숙에 따라 세상이 발생하고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렇게 본다면 와인버그가 말한 인류원리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지적생명체가 출현하기 딱 좋은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는 지적생명체인 인간이 이 우주에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한다.”라는 말과 같다.
누군가 “우주는 왜 존재할까?” 라거나 “왜 나는 존재할까?”라고 의문할 수 있다. 이 말은 “왜 우주는 없지 않고 존재할까?”라거나 “왜 나는 없지 않고 존재할까?”라고 의문하는 것과 같다. 물리학자의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생물학자에 따르면 나와 같은 지적생명체가 존재하는 것 역시 기적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세상이 경이롭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물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도 함께 탐구했다. 특히 오온에 대하여 탐구했다. 고와 고소멸에 대하여 오온을 떠나서 찾은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하는 오온의 생멸을 관찰하여 해법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놀랍고도 경이롭다는 것이다.
놀랍고도 경이로운 것은 “왜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있음인가요?”라는 물음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우 조띠까 사야도는 “수행자는 보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 놀랍다는 것을 발견합니다.”(139쪽)라고 했다. 이는 정신-물질 과정을 보는 것이다. 이를 ‘깨어서 본다’고 했다. 매순간 사띠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새롭게 경험한다고 했다. 매순간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보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우리의 무의식을 때립니다.”(139쪽)라고 했다.
2020-04-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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