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25. 12:44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면

 

 

매혹적인 대상을 접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스럽고 애착이 가는 대상을 보았을 때 두 가지 타입이 있을 것이다. 한부류는 대상을 즐길 것이고, 또한부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다. 전자는 세상사람들이 살아 가는 방식이고, 후자는 수행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철학을 프리젠테이션으로

 

오늘날 유튜브는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온갖 것들이 튀어나온다. 대부분 무익한 것이다. 보아도 그만 안보아도 그만이다. 보아서 해로운 것도 많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유혹하여 시간을 빼앗아 가는 것도 많다. 단지 시간 때우기로 심심풀이로 보는 것이다.

 

마치 오물장 같은 유튜브채널에서도 보석과도 같은 채널이 있다. 대개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조회수도 많지 않다. 김필영선생이 운영하는 ‘5분 뚝딱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5분 뚝딱 철학을 접하면 날로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렵고 딱딱하고 무미건조할 것 같은 철학을 마치 털도 뽑지 않고 날 것으로 먹는 것 같은 느낌을 말한다.

 

5분 뚝딱 철학은 일종의 철학개론 내지 철학개요 같은 영상이다. 파워포인트로 요약된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여기에 효과음까지 첨가하여 그야말로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 같다. 이번에 본 것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에 대한 것이다. 이를 : 자신까지 갖다버린 미니멀리스트라는 타이틀로 소개했다. 18분 분량이다.

 

경험주의 끝판왕

 

데이비드 흄은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중의 하나라고 한다. 2005년 영국BBC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누구인지?”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데이비드 흄이 2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1위는 칼 마르크스로 27.9%를 차지했고, 흄은 12.7%를 받아서 2위가 된 것이다. 이런 순위는 비트겐슈타인(6.8%), 니체(6.5%), 플라톤(5.7%), 칸트(5.6%) 보다 더 많은 것이다.

 

데이비드 흄이 왜 이렇게 인기가 높은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흄이 주장한 경험론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흄을 소개할 때 경험을 떠나서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김필영선생은 경험주의 끝판왕이라고 소개했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저작 전체보다 데이비드 흄이 쓴 한 한페이지에서 배울 것이 더 많다고 한다. 벤담은 흄을 읽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흄의 철학이 어떻길레 이렇게 찬사를 보내는 것일까? 영상물에서 소개한 것 중에서 가장 남는 말이 인상과 관념에 대한 것이다.

 

여기 말()이 있다. 말을 보고서 떠 올려 볼 수 있다. 직접 본 것이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경험한 것이다. 이를 인상이라고 말한다. 반면 본 것을 머리속으로 떠올라는 것을 관념이라고 한다. 인상과 관념의 내용은 같다. 똑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강도일 것이다.

 

인상은 강렬하고 관념은 약하다. 감각적으로 느껴서 보는 것과 머리속에서 떠 올려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실제로 보는 것이 훨씬 더 강렬하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를 공상 또는 망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 날개를 동시에 떠올린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말에 날개가 달린 모습이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말이라는 인상으로부터 말이라는 관념을 떠 올리고, 날개라는 인상으로부터 날개라는 관념을 떠 올리기 때문이다. 두 개의 관념이 만났을 때 날개 달린 말이 되는 것이다. 오로지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선가에 회자되는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말하는 것 같다.

 

인상은 직접 본 것이나 직접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직접경험한 것을 인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떠 올리는 것을 관념이라고 한다. 그런데 모든 관념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과라는 이미지만 있을 뿐 실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있다면 시큼한 사과 맛에 대한 경험만 있을 뿐이다.

 

경험론자들은 경험하지 않은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감각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것은 실재하지도 않고 오로지 관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캄은 보편자를 버리라고 했고, 베이컨은 우상을 버리라고 했고, 로크는 관념들을 다 버리라고 했고, 버클리는 지각되지 않는 것들을 버리라고 했다. 흄은 더 나아가 지각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 버리라고 했다. 심지어 자아마저 갖다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데이비드 흄에 대하여 자신까지 갖다버린 미니멀리스트이자 경험주의의 끝판왕이라고 했을 것이다.

 

니까야에서

 

데이비드 흄의 경험론을 보니 불교적 가르침과 유사하다. 특히 자아까지 버리라고 한 것을 보니 불교에 있는 가르침을 그대로 말하는 것 같다. 이는 니까야를 보면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시각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시각능력을 이렇게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S35.239)

 

 

부처님은 인상과 연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에서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S35.235)고 강도높게 말씀했다. 여기서 키워드는 인상과 연상(속성)이다.

 

인상과 연상에 집착하면

 

인상은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이고 연상은 부분적으로 파악되는 것을 말한다. 인상은 모든 것을 한번에 보는 것을 말한다. 연상은 부분적으로 세밀하게 보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이다. 사람을 보았을 때 여자다’ ‘남자다하는 것은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인상이라 한다. 인상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면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신체의 특정한 부위, 즉 눈이나 코 등 신체의 부분을 파악하는 것에 대하여 연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대상을 보았을 때 끌린다. 그래서 여자다’ ‘남자다’ ‘섹시하다등으로 전체적인 파악이 일어난다. 이처럼 총체적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또는 총상을 취한다고 말한다. 빠알리어로는 니밋따(nimitta) 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 끌리면 계속 보고 싶어 한다.

 

전체상을 취하면 이번에는 신체의 특정부위로 포커스를 맞춘다. 그래서 눈이 아름답다든가 코가 아름답다등으로 신체특정부위에 대한 집착이 일어난다. 이에 대하여 연상 또눈 부분상을 취한다고 말한다. 빠알리어로는 아누브얀자나(anubyañjana)라고 한다. 영어로는 ‘secondary attribute’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인상과 연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 여섯 가지 감각능력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번 인상과 연상에 끌려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53)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지금 이 순간에 매혹적인 대상에 집착하여 죽음을 맞았다면 어떤 세계에 태어날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이 된다고 했다. 죽음의 순간에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에 지배되었을 때 그 마음을 대상으로 결생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악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각능력을 보호하고 시각능력을 수호한다.”라고 했다. 매순간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단속해야 함을 말한다.

 

매혹적인 대상에 집착했을 때

 

사람들은 아름답고 매혹적인 대상에 집착한다. 눈으로 귀로 끊임없이 즐길거리를 찾는다. 이렇게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괴로움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도 알 수 있다. 즐거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갈애가 일어났을 때, 집착으로 전개되어 결국 절망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매혹적인 대상에 집착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수행승들이여,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환희하고 환호하고 탐착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 악마의 지배를 받는 자라고 한다. 악마의 밧줄이 그를 사로잡고 그가 악마의 밧줄에 묶이면 그는 악마 빠삐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한다.”(S35.114)

 

 




부처님은 시각, 청각 등 감각의 문을 단속하지 못하면 악마의 소굴에 빠지는 것이라고 했다. 매혹적인 대상에 집착하여 빠져나오지 못할 때 악마 빠삐만의 밧줄에 목이 묶인 것과 같다고 했다.

 

매혹적인 감각의 대상을 접했을 때 취하고자 한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가지고 싶어 한다. 실물을 가지지 못하면 상상속에서 가질 수 있다. 실물 보다 강도는 약하지만 집중하면 실물 못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즘 텔레그램 ‘n번방사건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가 사이버상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두 관념적인 것들이다. 이렇게 감각적인 대상에 집착하는 것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악마 빠삐만의 밧줄에 묶여서 악마가 하자는대로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모든 것이 무상함에도

 

어떻게 해야 악마의 소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다음과 같은 무상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는데 시각도 무상하고 변화하고 다른 것이 되는 성질을 갖고 있고 형상도 무상하고 변화하고 다른 것이 되는 성질을 갖고 있어, 여기 이들 움직이고 흔들리는 양자는 무상하고 변화하고 다른 것이 되는 성징을 갖고 있다. 시각의식도 무상하고 변화하고 다른 것이 되는 성질을 갖고 있고 시각의식이 생겨나는 그 원인과 그 조건이 되는 그 원인과 그 조건도 무상하고 변화하고 다른 것이 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조건을 조건으로 생겨난 시각의식이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S35.93)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접촉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경에서는 눈을 예로 들었다. 이른바 삼사화합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삼사화합을 이루는 시각, 형상, 시각의식 이 세 가지가 무상하다고 했다. 더 나아가 원인과 조건도 무상하다고 했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연기법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인연과라고 한다. 삼사화합의 원인이 되는 시각과 형상도 무상하고 조건이 되는 시각과 형상이 무상하다면 시각의식 또한 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무상한 것을 원인과 조건으로 접촉이 있게 된다.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접촉이 있어야 가능하다. 접촉이 없다면 세상의 발생도 없을 것이다. 삼사화합으로 접촉이 일어나는데 이런 접촉도 무상하고 변화하고 다른 것이 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했다. 어떤 다른 것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접촉하면 느끼고 접촉하면 의도하고 접촉하면 지각한다.”(S35.93)라고 했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코로나19도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접촉을 차단하고자 한다.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은 세 가지를 야기한다. 그것은 느낌과 의도와 지각을 말한다. 이 세가지는 오온에서 수온, 행온, 상온에 대한 것이다. 접촉에 따라 오온 중에 세 가지가 수반되는 것이다.

 

삼사화합촉에 따르면 오온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색온과 수상행온과 식온을 말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각주에 따르면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은 물질의 다발에 속하고, 거기에 일치하는 의식은 의식의 다발에 속하고, 다른 세 가지 존재의 다발은 삼자의 접촉에 속한다.”(상윳따4165번 각주)라고 했다. 수상행을 한묶음으로 보는 것이다. 삼사화합촉이 일어났을 때 느낌, 의도, 지각이 동시에 수반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망상의 길

 

삼사화합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발생된다. 느낌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의 길은 연기의 회전의 길이고, 또 하나는 망상의 길이다.

 

느낌에서 의도로 전개되면 연기가 회전되고, 느낌에서 지각이 전개되면 망상이 일어난다. 특히 망상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에서는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M18)라고 하여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망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관념과 관념이 만난 것으로 날개 달린 말()과 같은 것이고 토끼의 뿔과 같은 것이다. 텔레그렘 방에서 음란물을 즐기는 것도 망상을 즐기는 것과 같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서 허무한 것이다. 이 모두가 접촉에 따른 것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겼을 때

 

접촉이 없으면 세상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접촉없이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 있을 뿐이며, 감각된 안에는 감각된 것만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안에는 인식된 것만 있을 뿐이다.”(S35.95)

 

 

단지 보는 것, 듣는 것, 감각된 것, 인식된 것으로 그치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접촉이 일어났을 때 느낌을 갈애로 전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갈애가 집착이되어서 결국 괴로움에 이르고 말 것이기 때문에 단지 알아차림하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것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S35.95)라고 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 주석에 따르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있지 않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를 유신견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신견 정형구가 있다. 오온에서 색온을 예로 든다면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가 물질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M44)라는 정형문으로 표현된다. 보이는 것, 듣는 것, 감각되어지는 것, 인식되어 지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이 없다면 자신의 것으로 여길 것이다.

 

매혹적인 대상에 마음에 끌려 인상과 연상에 집착했다면, 매혹적인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이는 유신견 정형문에서 매혹적인 대상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가 매혹적인 대상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매혹적인 대상이 있다고 여기고, 매혹적인 대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라고 바꾸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보이는 것, 듣는 것, 감각되어지는 것, 인식되어 지는 것에 대하여 그대가 그것 안에 있지 않으면, 여기나 저기나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S35.95)라고 했다. 이는 오온이 나의 것, , 나의 자아라는 유신견을 버렸을 때 가능한 것이다.

 

세상보는 눈이 달라졌다면


데이비드 흄의 경험론을 보면 니까야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는 것 같다. 어떻게 18세기 영국철학자가 불교경전에나 있는 가르침을 유사하게 말할 수 있을까?

 

흄은 불교를 접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험론자 흄이 불교를 접하지 않았어도 불교적 가르침과 유사한 것을 말한다면 그는 부처님 가르침을 알고 있다는 것과 같다. 이를 달리말하면 불교는 보편적인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서양의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은 흄의 경험론을 접하고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라고 말했다. 부처님 가르침도 그럴 것이다. 니까야를 접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불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03-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