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이것만이 진리라고 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9. 12. 12. 12:33

 

이것만이 진리라고 했을 때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말이 있다. 노자에 나오는 말이다. 노자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다. 도에 대하여 도라고 이름 붙일 때 더 이상 도가 아니고, 이름에 대하여 이름붙이면 더 이상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언어나 문자로 이름 지어진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최진석선생의 유튜브강연을 듣고

 

최근 유튜브에서 최진석선생의 강연을 흥미를 가지고 듣고 있다. 유튜브채널 새말새몸짓에서 최진석선생의 장자강연은 몇 번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것은 한번 듣고 마는 가십거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진리의 말을 전달하기 때문에 듣고 또 들어도 늘 새롭다. 인식이 된다면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최진석선생의 장자철학 제8강을 보면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하다가 사랑의 종말이 올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의 합의점에 이르렀을 때라고 했다. 결혼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그때부터 남녀간에 권력투쟁이 시작된다고 했다.

 

사랑은 사랑할 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동사형으로 사용되어 사랑하다가 되었을 때 사랑은 현재진행형이 된다. 그러나 명사형으로 사랑만 달랑 남았을 때 더 이상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진석선생은 왜 사랑에 대하여 권력투쟁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소유와 관련이 있다. 사랑의 합의점에 이르러 결혼했을 때 그 때의 사랑은 이름만 사랑일뿐 사실상 소유와 같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에 대하여 나의 사랑으로 보는 것이다. 남녀가 각자 나의 사랑이라고 하여 사랑을 소유로 보았을 때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혼한 부부의 말을 들어보면 남자이든 여자이든 자신의 잘못은 없다고 말한다. 모두 상대방의 잘못으로 돌린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있는데 자신의 방식대로 따라주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래서 사랑에 대하여 권력투쟁이라고 했을 것이다.

 

일반명사와 고유명사

 

사랑이라고 말했을 때 사랑이라는 말은 명사형이다. 그것도 추상명사이다. 모든 추상명사에는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실체가 있는 것처럼 여긴다면 소유하려 할 것이다. 소유하려는데서 투쟁이 일어난다. 소유하려는데서 싸움이 일어난다. 주의나 이즘(ism)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갖가지 주의가 있는데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를 소유하려 했을 때 권력투쟁이 일어난다.

 

명사는 이름만 명사일뿐이다. 누군가 이름을 붙여 놓았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세상의 명사는 이름만 있을뿐 실체가 없다. 사람, 인간, 중생, , 사랑, 자본주의 등 세상의 명사는 이름 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명사에는 오로지 하나만을 지칭하는 명사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름 같은 것이다. 또는 산이름이나 다리이름 같은 것이다. 이를 고유명사라고 한다.

 

명사에는 크게 일반명사와 고유명사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어떤 특정인에 대하여 사람이라고 말하면 일반명사가 되고, 예를 들어 김철수처럼 실명을 말하면 고유명사가 된다. 여기서 사람과 같은 일반명사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소유론으로 설명된다. 김철수와 같은 고유명사는 실제로 있기 때문에 존재론으로 설명된다.

 

저기 오온이 간다.”

 

일반명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산()이라고 했을 때 이 산이라는 말은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악산이라고 고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존재론으로 설명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 이런 게송이 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

 

 

여기서 뭇삶이란 중생(satta)’을 뜻한다. 중생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이름만 있을뿐 실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마치 자동차 같은 것이다. 자동차라는 일반명사가 있지만 이는 추상적인 것이다. 추상적인 것은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다. 자동차라고 말하는 것은 수만가지 부품이 결합된 것을 지칭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동차번호판을 부여한다면 이는 실재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이라는 말은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지만 오온이 집적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에 대하여 정확하게 말하려거든 오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온은 몸,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다발이 집적된 것을 뜻하기 때문에 저기 사람이 간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저기 오온이 간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관례에 따른 것이다.

 

언어로 인하여 번뇌가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가 있어서 사유할 수 있다. 오늘날 놀라운 물질문명을 만들어 낸 것은 언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불멸의 정신문명이 생겨난 것도 언어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언어사용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면으로 본다면 언어로 인하여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반명사 또는 추상명사에 의하여 번뇌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주의(主意)를 들 수 있다.

 

주의를 견해라고 볼 수도 있다. 누군가 사랑에 대하여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될까?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것이다. 이는 번뇌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Dhp.212)라고 했다.

 

사랑으로 인한 번뇌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사랑하는 자도 갖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갖지 말라.”(Dhp.210)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를 갖게 되면 미움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추상적 명사의 대명사라고 볼 수 있는 주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라고 했을 때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주의에 매몰된 자라면 투쟁형이 된다. 마치 진리에 매몰된 자와 같다. 자신이 믿는 신념에 빠져 있다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여긴다. 이런 견해에 빠진 자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idam-eva sacca mogham-aññan)”(Ud.66)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것만이 진리라면 다른 것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부처님 당시에 육사외도의 주장이 그랬다. 영원론자라면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할 것이고, 허무주의자라면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양극단이다.

 

누군가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극단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주변에도 극단론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누군가 자유주의만이 살 길이다라든가, 또 누군가 평등주의만이 살 길이다라고 말한다면 싸움 그칠 날 없다. 마치 사랑에 대하여 소유론적으로 보는 것과 같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보아 올인하는 삶을 살았을 때 번뇌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상(: saññā)을 타파 하라고 했다.

 

주의나 견해 같은 것은 산냐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 독특한 자신만의 생각이 확립된 것이다. 이런 견해를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또는 자만, 아만, 교만 등으로 불리운다. 이처럼 상에는 항상 자아가 달라붙어 있다. 이처럼 아상이 가득한 자에게는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 (eta mama, eso'hamasmi, eso me attā)(S22.100)라고 전도된 견해가 생겨난다.

 

전도된 견해는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에 따른 것이다. 이것이 나의 것이라고 했을 때 이는 갈애에 해당되고, 이것은 나라고 했을 때 이는 자만에 해당되고,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했을 때 이는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는 유신견에 해당된다. 따라서 주의나 견해에 빠진 자들은 갈애와 자만과 유신견이 가득한 자들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주의나 견해는 진리와 같은 것이어서 맹목적이 된다. 그 결과 충돌이 일어나고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우다나에서는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릅니다.”(Ud.66)라고 했다.

 

연기법으로 논파한 부처님

 

일반명사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한다면 번뇌만 일어날 것이다. 이는 일반명사를 소유론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당시 육사외도의 견해도 그랬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고 했을 때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는 극단이다. 이와 같은 극단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극단에 대하여 연기법으로 논파했다.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도 허무주의도 성립되지 않는다. 연기의 순관을 관찰하면 허무주의는 거짓이 되고, 연기의 역관을 관찰하면 영원주의 역시 거짓이 된다. 외도들이 말하는 모든 극단도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으로 관찰하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극단적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이 코끼를 만지는 격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진리의 한면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이 한쪽 관점만 본다면 서로 말다툼을 벌이고 논쟁한다.”(Ud.68)라고 했다.

 

진리의 다양한 관점을 본다면 다툴 일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연기법적으로 본다면 입에 칼을 물고 싸울 일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imasmi sati ida hoti. Imassuppādā ida uppajjati.)”라는 연기의 순관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Imasmi asati ida na hoti.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라는 연기의 역관으로 관찰했을 때 모든 다툼은 사라진다. 외도가 말하는 이것은 극단적 견해를 말하지만, 부처님이 말하는 이것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연기적 법칙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망상에 사로잡히고

망상에 엮이고 망상에 묶인다.

견해 속에서 화내며 논쟁할 뿐,

결코 윤회를 넘어서지 못한다.”(Ud.70)

 

 

2019-12-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