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사회적 분노를 어떻게 할 것인가,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 스님의 대담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9. 6. 4. 14:54

 

사회적 분노를 어떻게 할 것인가,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 스님의 대담을 보고

 

 

전철을 탔다. 명학역에서 종로3가역까지는 거의 한시간 걸린다. 목적지는 불교환경연대 교육장이다. 운현궁 뒤에 있고 경운학교 바로 옆에 있다. 일본 평화운동가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 스님의 대담이 있는 날이다. 오키나와 출신으로 미군기지 반환운동을 해 온 인물이다.

 

전철을 타면 사람냄새가 나는 것 같다. 밀폐된 공간에서 숨을 쉴 때 갖가지 오염된 물질이 들어 오는 것 같다. 감기바이러스라도 유행하면 집단으로 감염될 수 있다. 건강하지 않으면 전철도 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전철을 탈 수밖에 없다.

 

전철이나 지하철처럼 약속시간을 보장해 주는 교통수단이 없다. 일주일에 한두 번 가량 종로행 전철을 타는 것 같다. 이런 삶에 대하여 학교친구가 인생 별거 있어?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뭐.”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단멸론적 견해이다. 그러나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이 된다.

 

불교환경연대 교육장에서

 

불교환경연대 교육장에 도착했다. 그린담마홀이라고 한다. 장소가 매우 협소하다. 삼십평형대 아파트 거실 정도 되는 사이즈이다. 약 이십명 사람들이 빡빡하게 자리에 앉았다. 정평불 회원도 보였다. 이희선, 유병화, 사기순, 권정화, 최영희 선생이 참석했다. 김경호 선생은 최근 새로 오픈한 인터넷 신문 운판에 올릴 동영상을 촬영했다. 합천 평화의 집 이남재 원장도 왔다.

 

치바나 쇼이치 스님 초청대담에 모두 여섯 개 단체가 참여했다. 불교환경연대, 신대승네트워크, 실천불교승가회, 위드아시아, 정의평화불교연대, 합천평화의 집 이렇게 여섯 개 단체가 공동주최했다. 대부분 불교관련단체이다. 승가단체로서는 실천불교승가회(실승)가 유일하다. 이날 실승에서는 일문, 퇴휴스님 등 스님 네 명이 참석했다. 일문스님의 여는 말로 시작되었다. 사회는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유정길 선생이 보았다.

 




연단에는 세 명이 앉았다. 치바나 쇼이치 스님이 중앙에 앉았고 오른쪽에는 우석대 서승 석좌교수, 그리고 왼쪽에는 통역담당 이호윤 교수가 자리를 했다. 특히 서승 교수는 얼굴에 화상흔적이 매우 심하게 남아 있다.

 

서승 교수는 1945년 생으로 일본 교토에서 출생했다. 재일교포출신으로 서울대에서 유학중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서 동생 서준식과 함께 투옥되었다. 제일교포간첩단사건으로 무려 19년 동안 동생과 함께 감옥에서 살았다. 화상은 체포될 당시에 분신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동생 서준식 선생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옥중 19이라는 책이다. 책을 통하여 가혹한 감옥생활을 간접 체험했다.

 

오키나와는 어떤 곳일까?

 

서승교수가 간단하게 오키나와에 대하여 설명했다. 서교수에 따르면 만일 한국이 해방되지 않았더라면 오키나와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오키나와는 곳곳에 미군기지가 있다.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면적에 일본 주둔 미군 시설이 75%가 있다고 한다. 이는 전략적으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미군기지가 매우 많다. 한국이 해방되었어도 오키나와처럼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은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이 아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오키나와와 같은 처지라 볼 수 있다.

 

오키나와는 어떤 곳일까? 역사적으로 엄연한 독립국가였다. 역사적으로 1429년에 성립된 류큐(琉球)왕국이 그것이다. 그때 당시 중국에 조공을 했는데 조선과 같은 조공국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1609년 큐슈 남단에 있던 사츠마번에 의하여 무력으로 점령되었다. 공식적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된 것은 1872년 메이지 정부때이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27년동안 점령했다. 일본에 반환 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 스님은

 

서승 교수는 치바나 쇼이치 스님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했다. 치바나 쇼이치는 1948년 생으로 오키나와에서 태어났다. 반전 평화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87년 오키나와 국민체육대회에서 일장기를 붙태운 것이다.

 




치바나 쇼이치 스님은 오키나와 요미탄 의원으로 당선되어 12년 동안 미군기지 철수 등의 평화운동을 했다. 놀라운 것은 의원을 그만 두고 불교에 입문하여 스님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강력한 사회참여를 지향하는 정토진종의 스님이다.

 

이날 치바나 쇼이치 스님은 세 개의 깃발을 보여 주었다. 일장기와 유구국깃발과 해골깃발이다. 모두 스님의 삶과 관련 있는 것이다.

 

미국이 싫었어요.”

 

치바나 쇼이치 스님은 일장기를 불태운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한때 일장기를 달고자 했다. 그것은 미군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1945년부터 1972년 까지 27년 동안 미군이 입법, 행정, 사법 삼권을 행사 했는데 오키나와는 미국의 식민지와 다름 없었다.

 

치바나 쇼이치 스님은 젊은 시절 미국에 대항하여 투쟁했다그래서일까 오키나와는 1972년 다시 일본이 되었다. 오키나와에 다시 일장기가 걸린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투쟁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이지 그때 당시에는 몰랐다고 한다.

 




약소국 오키나와는 처음에는 중국의 조공국이었다. 이후 일본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미국이 점령했다. 다시 일본으로 넘어갔다. 미국점령 시절 반미운동 한 것에 대하여 미국이 싫었어요.”라고 말했다.

 

스님은 왜 미국이 싫다고 했을까? 섬이 온통 미군기지가 됨에 따라 환경이 파괴되는 것도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군사문화의 잔재라고 볼 수 있다. 미군이 장기 주둔함에 따라 커다란 사회문제가 생겼다. 그래서“18세에서 40세까지 여성 상당수가 매춘으로 전락했습니다.”라고 말했다.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에게 반환되었다. 그 결과 미국식에서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27년 동안 달러를 사용했는데 반환되고 나서부터는 엔화로 바뀐 것이다. 운전대도 바뀌었다. 미국식은 운전대가 좌측에 있지만 일본은 우측에 있다.

 

주인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자 변화가 많았다. 통화는 -달러-으로  바뀌었다. 운전대는 우측-좌측-우측으로 바뀌었다. 이런 혼란이 있게 된 것은 주권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언제쯤 좋은 날이 올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태극문양의 유구(琉球)국 깃발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군 기지는 남아 있다. 일본 주둔 미군의 70% 가량이 오키나와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군기지가 있는 한 오키나와에 평화는 없다. 그래서 미군기지 철수 운동을 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미국에 협력했다. 일본정부는 오키나와를 일본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키나와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1987년 일장기를 불태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오키나와를 일본이라 볼 수 있을까? 치바나 쇼이치 스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도 아니다. 오키나와는 유구국을 뿌리로 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오키나와 사람들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깃발을 하나 소개 했다. 놀랍게도 태극문양이 들어가 있는 깃발이다.

 



  

태극문양은 청색, 홍색, 황색으로 되어 있다. 세 개의 색깔이 원을 그리고 돌아가고 있는 형상이다. 스님에 따르면 주자학의 영향이라고 했다. 한국도 주자학의 영향을 받아서 태극기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키나와의 삼색 태극기는 한국의 이색태극기보다 더 오래 된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태극기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882년이다. 오키나와 태극기는 더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유구왕조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조공관계였는데 이에 대하여 조공형제국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키나와가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가진 어엿한 독립국가였음을 말한다.

 

해골깃발과 히노마루(日の丸)

 

치바나 쇼이치 스님은 마지막으로 깃발 하나를 펼쳤다. 가운데 붉은 원이 있고 원 주변에는 해골무더기가 있다. 붉은 원 때문에 일장기의 해를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붉은 원은 피를 뜻한다. 오키나와 상륙 당시에 희생된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오키나와 해골깃발이라고 볼 수 있다.

 




해골깃발은 집단자살과 관련이 있다. 미군이 들어 오면 남자는 죽임을 당하고 여자는 강간을 당한다는 말을 듣고 80여명이 서로가 서로를 찔러 죽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일본에서는 집단자결이라고 한다. 그러나 스님에 따르면 강요된 집단강제사입니다.”라고 말했다.

 

집단자살 유골은 치바나 쇼이치 스님이 발견했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흰 천에 해골이 가득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붉은 피를 상징하는 커다란 원을 그려 넣었다. 해골깃발을 펼치면서 이것이 우리 집의 가보입니다.”라고 말했다.

 

광주사람들은 오월이 되면 붉은 장미 꽃이 피로 보인다고 한다. 치바나 쇼이치 스님도 일장기를 보면 피로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1987년 체육대회 장에서 일장기를 불태운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는 일장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성조기 대신에 일장기가 올라가기를 바랬으나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미군기지는 그대로 있어서 오키나와는 여전히 기지촌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것이다.

 

일장기를 히노마루(日の丸)라고 한다. 히노마루를 보면 붉은 모양이 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히노마루는 전쟁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전쟁의 참상을 겪은 바 있는 오키나와에서는 더 이상 전쟁없는 평화의 시대를 바라고 있다. 성조기도 일장기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피로 물든 오키나와를 상징하듯이 해골깃발을 만들었다.

 

사미센을 켜며

 

오키나와의 역사를 보면 한()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노래를 불렀다. 일본 전통악기 사미센을 켜며 나직이 불렀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일장기와 해골기와 관련된 것이다.

 



 

사미센은 줄이 세 개인 현악기이다. 그런데 사미센은 류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16세기에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 전통악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에 따르면 오키나와에서 사미센은 세 사람에 한 개 꼴이라고 한다. 또 사미센을 켜지 못하면 남자도 아니라고 한다. 이쯤 되면 사미센은 오키나와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다.

 

스님은 사미센과 관련하여 놀라운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사미센 대는 흑단과 자단으로 된 것인데 대만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현은 중국에서 온 것이고, 가죽은 태국이나 자바에서 온 것이고, 켜는 것은 동남아 물소뼈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류큐왕국이 해상무역으로 번영했음을 나타내 주는 것 같다.

 




오키나와 독립에 대하여

 

오키나와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유사하다. 외세의 지배를 받은 것이 비슷하다. 똑같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본이 망하고 난 후에는 미군이 들어 왔다. 미군기지가 이곳저곳에 있는 것에서는 오키나와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힘이 없다 보니 외세의 지배를 받아 일본이 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일본속의 다른 나라이다. 천왕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또 일본은 좋은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압도적이다. 여학생들이 일장기를 시궁창에 버린 사건이 이를 증명한다.

 

어떤 사람이 스님에게오키나와는 왜 독립안합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스님은 분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의 철저한 동화정책을 들었다. 동물적 충성심에 세뇌 되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 독립이라는 말이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왜 스님이 되었습니까?”

 

한때 일장기를 불태우던 사람이 이제는 스님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왜 스님이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에 스님은 불교와의 인연을 이야기해 주었다.


치바나 쇼이치 스님은 스님이 되기 전에는 종교는 아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회참여를 한 어떤 스님을 본 것이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불교는 장례불교라 하여 수금하러 다니는 이미지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날 민중과 함께 하는 어떤 스님을 보고서 어느 종파입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신란의 정토진종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불교를 다시 보게 되었고, 불교가 대단한 파워를 지닌 종교인 줄 알았다고 한다.

 

스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이미 13세기에 불교개혁이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정토진종과 일련종이 등장한 것이다. 두 종파는 당시에 신흥종교였다. 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로 전환된 것이다.

 

도중에 탄압도 있었다. 정토진종은 이를 극복하고 현재 일본불교 최대 종파가 되었다. 그것은 천왕에게 머리 숙이지 않고 민중을 위한 사회문제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교와 첫 인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스님이 되고자 했을까?

 

치바나 쇼이치는 학생시절 학생운동을 했다. 그때 당시에는 나는 정당하다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육십살 까지 내가 옳다고 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것 보다 자신이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어리석은 것을 안 것이다.

 

육십비인생(六十非人生)이라는 말이 있다. 나이 육십이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 보니 모두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치바나 쇼이치도 육십이 되었을 때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지방의원을 그만 두고 승려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승려가 된지 이제 십년이 되었다.

 

정토진종은 반승반속이다. 결혼도 할 수 있고 머리도 기를 수 있다. 무엇보다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님이 되어서도 사회활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누군가 하지 않으면 세상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위하여

 

두 시간 반 동안 치바나 쇼이치 스님의 대담을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스님이 되기 전과 되고 난 후가 다르다. 이전에는 내가 정당하다라며 정의감으로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크게 바뀌지 않았다. 때로 절망도 했을 것이다.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화를 내면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고객과 싸우면 다시는 주문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의 최고책임자가 분노하면 전쟁이 날 수 있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분노하면 모든 것이 단절되고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활동가는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남들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 갈 때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개혁이 좌절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자기계발이 되어 있지 않다면 분노가 내부로 향할 것이다.

 

분노가 내부 조직으로 향하면 희생양을 만들지도 모른다. 분노가 자기자신에게 향하면 자포자기하게 될지 모른다. 어느 경우이든지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자기계발과 사회참여를 동시에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도 이익이 되고 사회에도 이익이 되는 삶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이다. 치바나 쇼이치 스님은 나이 육십에 이런 사실을 알았다. 이제 진정한 평화운동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19-06-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