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직접 만들자, 연성수선생의 국민개헌운동
광화문역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와 보니 천막이 쳐져 있다. 태극기부대 천막이다. 기습적으로 친 것이다. 저편에는 일단의 태극기부대 무리들이 보였다. 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있었다. 월요일 저녁임에도 시위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든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느릿느릿 이동하는 모습을 보니 다소 낭만적으로 보였다.
불과 3년전 까지만 해도 광화문은 진보세력들의 차지였다. 이제는 마치 공격과 수비가 교대된 듯 하다. 그들은 왜 광화문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도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사랑하는데 있어서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이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에무시네마를 향하여
2019년 5월 27일 저녁 서대문 경희궁 뒤에 있는 에무시네마로 향했다. 광화문역에서 내려서 꽤 긴 거리를 걸어갔다. 도중에 유병화선생을 만났다. 유선생이 연성수 선생 강연회 참석을 요청했다. 이에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여운을 남겨 둔 후에 당일날 가겠다고 했다.
연성수 선생은 정평불 단체카톡방에 모임을 알리는 홍보성 글을 올렸다. 연성수선생은 국민헌법과 관련한 글을 여러 차례 알렸는데 이를 불편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한번 와서 보라’는 식으로 글을 올린 것이다. 그것은 ‘매달 만나는 김근태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연성수선생이 22번째 연사로 초대받은 것이다.
행사장은 지하에 있다. 아래로 들어가 보니 작은 무대가 있다. 객석 뒤에는 주류와 음료수를 제공하는 바가 있다. 조명장치가 갖추어져 있어서 공연도 할 수 있고 강연도 할 수 있는 작은 극장이다. 주변을 보니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이희선 선생도 왔다. TV에서 본 사람들도 있다. 인재근여사, 함세웅신부, 이화용의사, 김태동 전교수의 얼굴도 보인다. 종종 종편에서 정치평론하는 사람 얼굴도 보인다. 김근태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 같다.
김근태를 한번도 본적이 없다. 매스컴에서만 보았다. 그래서일까 김근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정치인’이다. 이전에는 재야운동가이였으나 나중에 정치판에 뛰어 들었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이미지가 더 강하다. 검색해 보니 김근태는 2011년 사망했다. 8년이 지났음에도 추모하고 있다. ‘근태생각회’라 하여 매달 열리고 있는데 이번달로 22회째이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먼저 공연이 있었다. 저녁 7시부터 가수 안치환의 무대였다. 처음에 ‘아침이슬’을 시작으로 ‘솔아솔아’ ‘사랑은 꽃보다 아름다워’ 등을 불렀다. 앵콜 곡까지 30분 정도 열창했다.
안치환은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이야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은 다 아는데 선배들이 거나하게 취해서 들려주던 노래가 있습니다. 이를 기억해 놓고 나중에 음반으로 발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직이 “부용산 산허리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로 회오리바람…”라고 노래 불렀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는 부용산이다. 부용산은 어떤 노래일까? 일반인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슬픈 노래라고 한다. 운동권 사람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라고 한다. 운동권, 문인들이 술자리 등에서 불려지며 맥을 이어온 노래라고 한다.
부용산은 벌교읍 뒤에 있는 100미터도 되지 않은 야트막한 산이라고 한다. 6.25때 고향을 그리며 달밤에 구슬프게 부르던 노래가 부용산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일반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을 것이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출신성분이 좋았다는데
연성수 선생이 무대에 올라왔다. 늘 쓰고 다니는 작은 모자가 이제 낯 익다. 사회자와 대담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사회자가 소개한 것에 따르면 연성수 선생은 54년생으로 74년 서울대 식물학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75년 김상진의 분신과 관련된 사건으로 퇴학처분 되었고 감옥에 가게 되었다.
연성수 선생은 83년 민청련 사회부장을 맡았다. 이 일로 인하여 85년 김근태와 함께 투옥되었다. 김영삼 정부시절 한번 더 있다. 그래서 세 번 감옥에 갔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사회자는 10년 수배자로 살았다고 말했다.
연선생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고난에 찬 일생이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가난하게 산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스개 소리로 ‘출신성분이 좋았다’라고 말한다. 마치 김지하 시인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언급한 ‘기본계급’이 생각난다. 노동자, 농민출신이 기본계급이라는 것이다.
문화활동을 통해서
연성수 선생은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계기는 공릉동으로 학교 다닐 때 ‘탈춤반’이라 한다. 그때 당시 ‘장만철이 검은 옷을 입고 멋지게 서 있었다’라며 장선우 감독을 회상하기도 했다. 장선우감독과 함께 탈춤을 같이 했다고 한다.
연선생은 탈반에서 말뚝이춤과 무당춤을 잘 추었다고 한다. 이매방 선생 밑으로 들어갔다면 크게 성공했을지 모른다고 우스개 소리했다. 그래서일까 탈춤은 나중에 노동운동할 때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문화활동을 통해서 노동운동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활동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문화활동을 통해서 의식화 하는 것이 빠른 것임에도 노조에서 불온시 한 것이다. 노동과 문화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이다. 서로 조화롭게 운용하면 힘이 배가 될 수 있음에도 견재하는 것에 대하여 아쉬워 하는 것이다.
김근태에 대한 아쉬움
연선생은 김근태와 만남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70년대 운동을 하긴 했지만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운동권의 큰형 같았던 김근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처음 본 것은 83년 민청련이 창립되고 나서부터라고 했다. 그때 인상에 대하여 “너무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살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동네 큰형처럼 자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연성수선생에 따르면 김근태에 대하여 동네형님처럼 자상하고 친절하다고 했다. 그리고 선비스타일로 고지식한 면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논쟁하면 끝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곰같이 우직한 면도 있다고 했다.
감옥에서 단식했을 때 김근태를 만났다고 했다. 그때 모습이 마치 동면하고 있는 곰과 같았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에너지를 모아 치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고문 후유증을 치료하는 것을 말한다.
연성수선생은 감옥에서 출소한 김근태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얼굴이 맑고 평화로워 보였다. 재야운동할 때 사진 역시 자상하고 친절한 모습이다. 그런데 정치판에 들어가서 찍은 사진을 보니 이와 달랐다. 심각한 표정이 이전의 얼굴과 전혀 다른 것이다.
독재자의 얼굴은 초기와 말기가 차이가 많다고 한다. 초기에는 패기에 넘친 모습을 보여 주지만 말년 독재자의 모습은 무기력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노년에 이를수록 성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위안부할머니들이다. 처음과 마지막 얼굴을 보면 극적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연성수선생은 김근태의 변해 가는 얼굴을 보여 주면서 아쉬워했다. 그래서 “정치판에 뛰어 들지 말고 재야운동가로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정치판에 대한 실망의 의미도 담겨 있다.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야
연성수 선생은 노무현 정부시절 미얀마로 떠났다고 했다. 현실정치에서 한계를 본 것이다. 또한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을 비판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시절 운동권 출신들이 권력을 잡았으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권력을 어떻게 쓸 것인지,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한가지 예로 ‘민주화운동관련법’을 들고 있다.
민주정부가 들어 서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 희생이 있었다. 그러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정권이 바뀌었어도 찬밥신세가 되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일할 공간을 주었어야 했다. 지역에 활동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협동조합 같은 것이다. 주민평의회도 해당될 것이다. 사회곳곳에 근거지를 만드는 것이다.
지역에 활동센터가 만들어지면 그곳을 기반으로 하여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민주화유공자법’을 만들어 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금전적 보상보다는 민주화 공헌에 대한 정당한 평가, 그리고 사회개혁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적, 법적 장치를 통해 인적자원을 사회발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김근태가 살아 있다면 근거지 만드는 일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직접하자
연성수선생은 정치판에 들어가지 않았다.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고생해놓고 왜 정치안합니까?”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연성수선생은 정치판에 들어가지 않고 미얀마와 스리랑카로 수행하러 갔다. 지금은 정치권 밖에서 ‘국민개헌’운동을 하고 있다. 더 이상 정치인들에게 헌법개정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못하는 것을 국민들이 직접 하겠다는 것이다.
2016년 광화문촛불이 있었다. 국민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쫓아 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아직까지 얻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열심히 싸웠지지만 국민들에게는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다 가져 간 것이다.
연성수선생은 국민발안제와 국민소환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 등이 실려 있는 헌법개정안을 지난 4월 10일 발표했다. 총선이 끝나고 개헌이 논의될 때 관철시킬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나가는 것은 정치인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에게 맡겨 놓으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하자”라고 하는 것이다.
바닥의 힘으로
연성수선생은 어렵게 살아왔다. 대부분 사람들은 안락한 길을 가는데 연성수선생은 시대가 요청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 결과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 이렇게 살아온 배경에는 일종의 ‘깡’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겁나는 것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빼앗길 것도 없고 쥘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연선생은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에 대한 사진을 보고 미술하는 동료의 도움으로 판화를 찍어 배포했다. 그 작업이 위험하기도 했지만 또한 스릴이 있어서 영화를 볼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민청련 들어간 얘기도 했다.
83년 민청련 만든다는 얘기 들었다고 한다. 그때 탈춤반에서 한명 보내야 했다고 한다. 그때 ‘내가 하겠다. 더 이상 못참겠다. 화끈하게 하겠다.’라며 자청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 5.18 진혼굿을 처음 만들었는데 83년과 84년에 공연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연성수 선생은 85년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그때 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에 따른 내란음모 사건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고문을 하여 자필로 쓴 것을 받아내려 한 것이다. 고문에 못이겨 서명한다면 10년 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지 버텨서 집시법으로 풀려 나와야 했다. 그래서 버텼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바닥의 힘’이라고 했다.
사회 곳곳에 근거지를 만들어야
연성수선생은 바닥출신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빼앗길 것도 없는 것이다. 운동하기에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자애’와 ‘연민’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성수선생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요즘은 국민헌법 운동을 하고 있다. 대체 이런 파워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고난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큰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작은 어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거 민주화 운동하면서 겪었던 고난이 이제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연성수 선생은 국민헌법을 꿈꾸고 있다. 험난한 길이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고난, 억울함을 극복하면 커다란 힘이 생겨난다. 그 힘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의 행복과 존엄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 곳곳에 근거지를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2019-05-2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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