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마르크스가 불교도였다면 어땠을까? 2018불교학술대회 불교와 맑시즘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2. 22. 11:38

 

마르크스가 불교도였다면 어땠을까? 2018불교학술대회 불교와 맑시즘

 

 

강연장에 가면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연장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유목민이 오아시를 찾듯이 사람들이 강연장을 찾아 다니는 것은 지식에 대한 갈증일 것입니다. 그것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지식에 대한 갈애입니다. 이와 같이 강연장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은 현대판 지식유목민과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불교와 맑시즘을 주제로

 

2018 12 15일 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조계사 뒷편 총무원청사 건물에 있습니다. 나무카페에서 2층으로 올라가면 커다란 홀이 나오는데 오늘날 불교 지식의 향연장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불교학회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명칭은 ‘2018년도 추계학술대회입니다. 주제는 불교와 맑시즘입니다.

 




불교와 맑시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주제입니다. 이전에는 불교와 진화생물학에 대하여 학술대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다원 탄생 200주년 기념 학술대회였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오늘날 맑시즘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 보는 학술대회라 합니다.

 




학술대회는 오전과 오후 하루 종일 열렸습니다. 오전에는 이도흠교수의 포스트휴먼시대의 대안으로서 붓다와 마르크스의 대화와 손석춘교수의 마르크스주의 종교 비판과 불교의 사회인식이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오후에는 유승무교수의 맑스, 루만, 그리고 붓다 사회적인 것의 세 가지 관찰형식을 중심으로와 이진경교수의 연기법과 역사유물론 외부성의 사유에서 평등성의 사유로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종합토론시간에는 박경준교수가 좌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학술대회를 모두 다 듣지 못했습니다. 오후에 정평법회와 송년회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후 강연은 유승무교수의 강연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는 것은 기록 밖에 없습니다. 치열한 논쟁도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마치 야구결승전에서 환호하지만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 나간 그라운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학회에서는 165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학술지를 남겼습니다.

 

네 편의 논문을 주마간산격으로 읽어 보았습니다. 먼저 논문의 양이 읽는 이를 하여금 압도합니다. 다음으로 사용용어입니다. 불교학자가 아닌 보통불자의 입장에서 용어도 생소하고 더 생소한 것은 사람이름입니다. 마르크스는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만 논문에 등장하는 하버머스, 리만, 투르드 등 과 같은 철학자 이름은 낯설기만 합니다. 그러나 전공자 들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런게 회자 되는 용어나 이름일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와 맑스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사용합니다.

 

왜 기본소득제를 거론하는가

 

올해가 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되는 해라 합니다. 불교학회에서는 맑스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 맑스와 불교를 연계하여 학술대회를 연 것 입니다. 이에 대하여 불교학회장 김성철교수에 따르면 맑스주의가 부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90년대 공산권 국가의 몰락으로 인하여 맑스주의가 죽었는줄 알았는데 부활한 것에 대하여 최근 이상한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한 기본금이 제공 되고 청년기본금이 검토 되는 등 전에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요즘을 신자유시대라 합니다. 자유롭게 시장경쟁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자유경쟁한다면 자본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합니다. 이렇게 삼십년 가량 자유시장경쟁체제가 유지되다 보니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양극화 되었습니다. 소수에게 부과 편중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상황은 더욱 더 악화 될 것입니다. 더구나 노령인구의 증가에 따라 노인빈곤층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습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이하여 극소수의 사람들이 부의 대부분을 가져 가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미래는 장미빛 환상으로 가득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생존하기도 힘든 마치 지옥과 같은디스토피아(dystopia)’시대가 되리라고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됩니다. 이는 엔트로피법칙으로도 증명됩니다. 자유경쟁체제를 내버려 두면 부익부빈익빈으로 인하여 파국에 이를 것입니다. 맑스주의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선진국에서는 기본소득제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공평하게 일정금액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기본소득제는 국민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일정한 금액을 보장해 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런 발상이 나오게 된 것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저성장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에는 마이너스성장도 예상됩니다. 이와 같은 기본소득제는 성장의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기본소득제는 시대적 산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기본소득제를 거론 하는 정치인이 인기를 얻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불교와 맑시즘의 유사성에 대하여

 

발제자들은 불교와 맑시즘의 유사성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먼저 맑시즘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불교와 어떤 점이 유사한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발제자들은 공통적으로 불교의 연기법으로 맑시즘을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연기법은 어디에나 적용되는 만병통치약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불교와 맑시즘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일 마르크스가 불교를 알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칼 마르크스의 생몰연대를 보니 1818년에서 1883년입니다. 이 기간이라면 불교를 접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독일에서 법구경이 1869년에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접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영국에서 빠알리성전협회가 1881년 창설되어서 이후에 불교경전이 출간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의미 없는 것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칼 마르크스가 불교를 만났더라면 자본론과 같은 저술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후 전개된 맑시즘에 따른 공산주의 혁명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마르크스의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등사상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같은 견해에 대해서는 사견(邪見)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데

 

마르크스사상은 유물론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합니다. 이를 역사유물론이라 합니다. 역사유물론은 시대에 따라 시대의 사조를 구분한 것입니다. , 원시공산주의에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에 이르는 역사인식론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역사유물론에 대하여 변증법적유물론 또는 기계적 유물론이라 합니다. 맑시즘은 이와 같은 유물론은 물질을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유물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물질에 바탕을 둔 외도사상을 말합니다. 육사외도 중의 하나였던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견해가 바로 그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유물론 정형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이 있을 때 물질에 집착하고 물질에 탐착하면, 이와 같이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올바로 실천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도 없다. 네가지 광대한 존재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네 명의 인부가 상여에 시체를 싣고 가서 화장터에 조사를 읊조리지만 마침내 뼈는 표백되고 제물은 재가 된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 라는 견해가 생겨난다. (S24.5)

 

 

이것이 부처님 당시 유행했던 외도 유물론의 정형문으로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정형문에 따르면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보시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물론자들은 보시는 바보가 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고 현명한 자는 가진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돈을 빌려서 갚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유물론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부정합니다. 달리 말하면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내생도 없고 윤회도 없다고 합니다. 육체가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따라 죽게 되기 때문에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봅니다.

 

유물론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물질입니다.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했다고 봅니다. 물질과 정신이 서로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쪽이 무너지면 나머지도 무너져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래서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라 하여 모두 없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과학적 무신론에 대하여

 

불교와 맑시즘은 접점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물론에 기반한 맑시즘과 연기법에 기반한 불교와는 사상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유물론은 오로지 물질에 대한 것으로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되었다고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철저하게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행위를 하면 과보가 뒤따르기 때문에 유물론과 다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유물론에 대하여 단멸론으로 간주하여 삿된 견해로 봅니다.

 

부처님 당시 유물론을 보면 오늘날 과학적 무신론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맑시즘은 유물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불교보다는 과학적 무신론과 더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맑시즘이나 무신론이나 공통적으로 물질을 바탕으로 하는 유물론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은 물질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일까 자연과학자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차드 도킨스가 유명합니다. 도킨스에 따르면 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물질을 기반으로한 자연과학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말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근대 서양의 철학자들도 물질에 기반한 무신론을 주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 포이에르 바하가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 국민윤리 시간에 포이에르 바하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워낙 중요한 인물이라서 그가 말한 것을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시험에 나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포이에르 바하가 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신론에 대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물론에 바탕을 둔 무신론입니다.

 

포이에르 바하에 따르면 신은 단지 인간의 투사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유물론적 무신론은 최근 찰스 도킨스의 과학적 무신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라 볼 수 있습니다. 요즘과 같은 과학의 시대에는 유물론에 바탕을 둔 과학적 무신론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은 공통적으로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관심사는 오로지 현세입니다.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을 때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유물론적 무신론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세상의 행복뿐만 아니라 저 세상의 행복에 대해서도 말씀 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저 세상을 인정합니다. 저 세상은 피안을 말합니다. 거센 폭류의 흐름을 건너 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팔정도라는 뗏목을 타고 건너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맑시즘에서는 종교를 부정합니다.

 

레닌은 종교에 대하여 인민의 아편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종교는 아마도 서양의 기독교를 지칭한 것이라 봅니다. 만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불교를 알았다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거나 종교는 정신적인 독한 술이라는 말을 했을까?

 

공통점은 평등사상

 

유물론에 기반한 맑시즘과 연기법에 기반한 불교와의 접점을 찾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평등사상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계급의 평등입니다.

 

맑시즘이나 불교나 평등한 세상을 꿈꿉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코뮤니티(community)’를 구성해야 합니다. 일종의 공동생산 공동분배하는 방식입니다.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 사회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공산주의를 코뮤니즘(communism)이라 합니다. 불교에도 코뮤니니티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승가공동체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승가공동체 들어 가면 평등합니다.

 

부처님 당시 승가공동체 안에서는 사성계급이 모두 평등했습니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싸끼야족의 왕 밧디야는 자신의 이발사 우빨리와 함께 출가했습니다. 그런데 밧디야는 자신의 이발사를 먼저 출가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왕으로서 또는 왕족으로서 교만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승가동체는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네 가지 계급에 대한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먼저 들어 온 사람이 손위가 되기 때문에 법랍에 따라 자리 배정이 달리 되는 것 외에 호칭 등에서 평등했습니다. 승가공동체 안에서 호칭이 아위소(āvuso)’라 한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이 말은 벗이여또는 도반이여라는 뜻입니다. 공산주의사회에서 동무여하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승가공동체에서는 누구나 친구가 됩니다. 부처님의 상수제자 중의 하나인 사리뿟따에 대하여 벗이여 사리뿟따여라고 손아래 수행승이 친구부르듯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와 맑시즘의 공통점은 평등사상입니다. 그러나 평등사상을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극과 극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로지 현세의 행복을 바라는 유물론적 맑시즘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추구하지만, 정반대로 불교에서는 욕망을 소멸하여 완전한 평정의 세계 또는 평등의 세계에 이르고자 합니다. 맑시즘이 욕망이라는 세상의 흐름을 추구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욕망이라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역류도(逆流道: Patisotagami)를 추구합니다.

 

불교적 평등주의로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정체 내지는 마이너스성장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등주의입니다. 현재와 같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미래는 암담하고 절망적입니다. 이럴 때 불교적 해법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등주의’라 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평등사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S7.9)라 했습니다. 고급전단나무를 땔감으로 한 것이나 소똥을 말려 땔감으로 한 것이나 불이 붙습니다. 어떤 땔감이든지 화염과 광채, 그리고 빛깔에 있어서 동일합니다. 마찬가지로 불가촉천민이라도 가르침을 접하면 사쌍팔배의 성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불교의 평등사상은 상가(sagha)에서도 잘 구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상가는 사성계급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불가촉천민이라도 상가에 들어가면 모두 평등합니다. 왕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한 밧디야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저희 싸끼야 족들은 교만합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는 오랜 세월 우리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를 먼저 출가시켜주십시오.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 싸끼야족들의 싸끼야족 교만이 제거 될 것입니다.(Vin.II.180-184)라 했습니다. 왕족이나 이발사나 상가에서는 모두 평등함을 말합니다.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하에서는 더 이상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성장의 시대에서는 자본주의가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한계 내지 모순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안은 부처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잘 사는 평등사회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집단이 승가공동체입니다. 재가불자에게는 재가수행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공동체에서는 소욕지족과 베푸는 삶, 그리고 지혜로운 삶과 자비로운 삶을 추구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공동체가 미래 사회의 대안입니다. 기본소득제 등으로 맑시즘이 부활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물론에 바탕을 둔 물질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대는 이제 극단적인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평등주의를 요청합니다. 마르크스가 불교도였다면 어땠을까?

 

 

2018-12-22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