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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유익한 과보 고통은 해로운 과보,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9강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1. 9. 12:51

 

행복은 유익한 과보 고통은 해로운 과보,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9

 

 

 이것이 인생이다.(It’s life)” 이 말은 오래 전 영어회화 테이프에서 듣던 것입니다. 한때 미국에서 크게 히트 쳤던 TV프로이름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한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우리나라에서도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것을 본 바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다라 했을 때 이것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운명이라고도 생각해 볼 것 같습니다. 운명과도 같은 드라마틱한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운명과도 같은 삶은 사실 알고 보면 절절한 괴로움대한 이야기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운명적 고통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말로 치환 가능하리라 봅니다.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9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아홉 번째 강좌가 문화살롱 기룬에서 11 8일 저녁에 열렸습니다. 10회의 강연에서 이제 한번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아홉 차례 진행되면서 고정적으로 참석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혜숙, 유병화, 허태곤, 김용호, 박태동, 신성기 선생과 동출스님 그리고 본인입니다. 숫자는 얼마 안되지만 진지한 자세로 경청합니다.

 




조준호선생의 강연에 참석을 앞두고 이전주에 나누어준 논문을 미리 읽어 보았습니다. ‘초기불교에 있어 행복과 욕망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라 합니다. 2015 4 23일 고려대 철학연구소의 발표문을 수정보완한 논문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본래 논문제목은 까르마와 삼사라입니다.

 

모두 21페이지의 논문을 보니 이제까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불교관련 알음알이가 정리되는 듯 합니다. 논문의 양도 많지만 내용도 탄탄하기 때문에 밑줄 그어 가며 또한 형광메모리 펜으로 칠해 가며 읽었습니다. 못다 읽은 것은 전철로 이동하면서 읽었습니다. 모두 읽고 나니 뿌듯한 느낌이 왔습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단번에 해소되는 듯한 기분입니다.

 

행복이 왜 수온(受蘊)이고 결과일까?

 

논문에서 강조된 것을 두 가지 들라면 행복감은 수온(受蘊)이고 또한 행복감은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봅니다. 그러나 경전적 근거로 설명되는 것을 보니 틀림 없는 사실로 받아 들입니다. 더구나 명상과 관련된 체험으로도 증명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행복감이 오온에서 수온에 해당될까? 또 왜 행복감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해당되는 것일까? 특히 행복감이 결과에 해당되는 것에 대하여 논문 한글요약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온과 관련한 행복과 고통은 인과적 차원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인과의 차원에서 행복감은 좋다고 하여 무작정 얻으려고 하거나 지속시키려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느낌과 감정으로서 행복감은 원인적 행위에 대한 결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지속시키기에는 한계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사성제의 체계에서 보여주듯 고통이 싫다고 해서 바로 보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 대신 고통은 철저히 이해해야 할 성질이다. 철저하게 이해할 때 고통의 원인 또는 이유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조준호선생의 논문 요약을 보면 행복감을 사성제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행복 또는 행복감은 결과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는 고성제에 해됩니다. 고성제는 집성제라는 원인의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집성제가 원인이고 고성제가 결과입니다.

 

어떻게 해야 갈애를 없앨 수 있을까?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결과로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는 초전법륜경 집성제의 설명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으로서 집성제는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S56.11)라고 정의됩니다. 갈애가 고통의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갈애를 없앨 수 있을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아차림입니다. 그런데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느낌은 좋은 느낌(樂受)’, ‘싫은 느낌(苦受)’, ‘좋지도 싫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不苦不樂受)’을 말합니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번뇌가 일어납니다. 좋은 느낌이면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고, 싫은 느낌이면 밀쳐 내려 하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도저도 아닌 중립의 느낌일 때는 언제 어느 때 즐겁나 괴로운 느낌으로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리석음이라 합니다.

 

느낌은 갈애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는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라고 설명됩니다. 그런데 느낌이 갈애로 넘어 갈 때 루비콘 강을 건넜다로 설명됩니다. 되돌이킬 수 없음을 말합니다. 위화도 회군하는 것과 같습니다. 회군하면 군대를 되돌려 그대로 수도로 진격해 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갈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느낌이 일어 났을 때 갈애가 생깁니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됩니다. 집착 단계가 되면 더 이상 뗄래야 뗄 수 없습니다. 행위를 유발하고 말기 때문에 업의 과보로서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합니다. 그런데 태어남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는 태어남에 대하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 합니다. 결국 모든 존재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절망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지만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국 고통으로 귀결됩니다. 그런 행복은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십이연기에서 행(: sakhāra)이 앞서고 수(: vedanā)가 뒤에 오는 이유입니다. 또 사성제에서 집성제가 원인이고 고성제가 결과인 이유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행복 또는 행복감은 수온에 해당되고 결과라 했습니다.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느낌을 알아 차려 다시는 고통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유익한 과보, 고통은 해로운 과보

 

조준호선생에 따르면 행복에도 위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위계질서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도 높고 낮은 단계가 있어서 천차만별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저급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행복에서부터 궁극적 행복(parama sukha)’이라 볼 수 있는 열반에 이르기까지 행복에 대한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합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행복은 당연히 궁극적 행복입니다. 이는 법구경에서도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누구도 불행을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괴로운 자는 행복을 원하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더 많이 원한다. (Dukkhī sukha patthayati, sukhī bhiyyopi icchati)”(Vism.17.238)라 했습니다. 이것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본질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행복과 불행은 느낌에 대한 것으로 원인에 대한 결과로서 나타난 업보라는 사실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업보입니다. 이전 행위에 대한 과보가 행복과 불행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인위적으로 웃기운동을 한다든가 말로서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노래 불러도 그 순간일 뿐 나에게 닥친 불행은 가시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느낌은 결과이고 또한 느낌은 과보라는 사실은 아비담마논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붓다아비담마에 따르면 행복한 느낌에 대하여 행복한 느낌은 오직 하나의 마음, 즉 원인 없고 유익한 과보이며 행복이 함께한 신식의 마음과 결합한다.”(156p)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유익한 과보라는 말입니다. 지금 느끼는 행복 또는 행복감은 이전 행위에 대한 과보에 따른 것입니다. 고통스런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괴로움 또는 괴로운 느낌은 해로운 과보에 따른 것입니다.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것이 인생이다했을 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봅니다. 지금 잘살고 행복하다면 굳이 이것이 인생이다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행을 겪고 있는 자에게 이것이 운명이다’ ‘이것이 고통이다라는 생각이 들어갈 것입니다. 이는 결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고통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또 고통은 오온 중에서 수온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 느낌이 수온인가? 이는 초기경전에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다.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라 하여, 행복 또는 고통에 대하여 느낌(vedanā)’이라 정의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조준호선생의 논문을 보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성제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선생은 논문에서 도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표를 보면 고성제는 결과에 대한 것이고, 집성제는 원인에 대한 것입니다. 또 멸성제는 결과에 대한 것이고, 도성제는 원인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고성제와 집성제는 유전문에 대한 것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환멸문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고성제가 결과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청정도론에서 오직 이 [원인으로부터]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일어남을 말씀하셨다.”(Vism.16.30)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했을 때 이는 결과로서 나타난 고통스런 느낌입니다. 오온 중에 수온에 해당됩니다.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그렇게 느낌을 알아차려라라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선생은 고통이 나쁘기 때문에 바로 버리려 하거나 제거하려고 한다하더라도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라 했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싫다해서 바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철저하게 알고 이해하여야 하는 성격이라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알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악마 빠삐만은 “ ‘세존은 나에 대해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S4.1)라는 정형구가 있습니다. 마치 어두운 밤에 불을 켜면 일시에 환해 져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듯이,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이 무엇인지 안다면 고통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고성제입니다.

 

고성제는 결과로서 나타난 느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를 바꿀 수 없습니다. 단지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것도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세 번 굴린 형태로 알라고 했습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고성제에 대하여 처음 굴렸을 때는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Ida dukkha ariyasaccanti)”라고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굴렸을 때는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 (dukkha ariyasacca pariññeyyanti)라 하고, 세 번째 굴릴 때는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 (dukkha ariyasacca pariññātanti)”라 합니다. 이렇게 세 번 굴렸을 때 고통에 대하여 완전히 알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문제를 풀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은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문제를 잘 풀 수 있습니다. 고통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먼저 고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세 번에 걸쳐 굴려 알게 되었는데 핵심은 철저하게 아는 것(Pariññā: 遍知)’입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았을 때 해법이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pariññeyya), [원인을] 끊어야 하고(pahātabba), [멸을] 실현해야 하고(sacchikātabba), [도를] 닦아야 하는(bhāvetabba) 것으로, 갈애의 토대와 갈애와 갈애의 소멸과 갈애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로, 욕망(ālaya)과 욕망을 기뻐함과 욕망의 소멸과 욕망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로 오직 넷을 설하셨다.”(Vism.16.28)

 

 

청정도론을 보면 초전법륜경에서 사성제의 핵심단어를 나열했습니다. 즉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pariññeyya), 끊어야 하고(pahātabba), 실현해야 하고(sacchikātabba), 닦아야 하는(bhāvetabba) 것을 말합니다. 이를 한자어로 지(), (), (), ()라 합니다. 이는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Sn3.7)과 맛지마니까야 브라흐마유경’(M91)에서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Stn.558)라고 선언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견도(見道), 수행도(修行道), 무학도(無學道)

 

부처님 가르침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정교합니다. 마치 옛날시계 속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사성제입니다. 그래서일까 조준호선생은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불교는 고통의 철견으로 진리의 문으로 들어서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는 이미 범부가 아닌 진리의 흐름에 들어간 성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제행이 고통이라 볼 수 있다고 한다.”

 

 

사성제를 제대로 알면 일체가 고통임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사성제는 괴로움의 통찰로부터 시작 됩니다. 이를 철저히 하는 것(pariññeyya)이라 하여 철견이라 합니다. 고통을 뼈져리게 몸서리치게 아는 자만이 진리의 문에 설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꼰당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S56.11)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Dhamma cakkhu: 法眼)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성인의 흐름에 들어선 것입니다.

 

팔정도에서 정견(正見)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떻게 알아야 할까? 이번 논문에 따르면 괴로움이 결과에 해당된다는 것, 그리고 괴로움이 수온에 해당된다는 것도 해당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흐름에 들어간 성자들은 범부들이 느끼는 것과 거꾸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라고 합니다. 범부들의 행복관과는 정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추구입니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많은 수행승들의 경에 따르면 젊은 수행자는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S4.21)라 했습니다.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본 것입니다.

 

사성제를 이해 했을 때 진리의 흐름에 들어섭니다. 이를 견도(見道)라 합니다. 사성제를 완전하게 이해 했다면 흐름에 든 것이라 합니다. 다음으로는 팔정도를 실천하여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도(修行道)입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 되었을 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학도(無學道)’로서 아라한선언이라 합니다. 일종의 수행의 완성에 대한 깨달음의 오도송이라 볼 수 있습니다.

 

법회때 마다 초전법륜경을 독송한다면

 

초전법륜경을 접하면 가슴이 뜁니다. 그것은 아마 가르침에 대한 감탄일 것입니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세 번 굴리고, 이를 이해한 꼰당냐에게 법안이 열렸을 때 천지가 진동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초전법륜경이 법회 때 마다 독송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반야심경을 제대로 알면 감격한다고 합니다. 초전법륜경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장 핵심 가르침인 사성제를 알면 진리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성제를 안다면 자신있게 불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성제를 제대로 알면 가슴이 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놀라운 통찰을 제공하는 조준호선생 논문

 

조준호선생의 논문은 놀라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제까지 이런 논문, 이런 강연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올해 가을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10회 강연은 큰 수확입니다. 지금까지 아홉 번 참석하여 모두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조준호선생의 강연은 한마디로 건질 것이 있습니다. 이런 대중강연이 널리 확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불교방송(BBS)이나 불교TV(BTN)에서도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유튜브에도 올려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마도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로 시작되는 귀의문일 것입니다.

 

조준호선생의 논문을 보고 강연을 들으면 귀의문에 표현된 것처럼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듯 하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쁨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 왔었을 욕망과 행복에 대한 문제입니다. 욕망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합니다.

 

 

2018-11-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