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환멸연기 그거 하나로, 중론은 사유체계를 부수는 테크닉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31. 10:29

 

환멸연기 그거 하나로, 중론은 사유체계를 부수는 테크닉

 

 

중론이 어렵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중관이라 불리웁니다. 중론의 게송을 한마디씩 하면 무언가 있어보이고 무언가 유식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기법만 알면 테크닉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기법만 알면 10분 이내에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는 이와 같은 테크닉에 대하여 환멸연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구부정이 바로 환멸연기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 기법만 알면 10분이면 중관학을 모두 이해 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나머지 게송은 연습문제 푸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관학의 테크닉 환멸연기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게송이 2 관거래품에 있습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는 놈을 떠나서는 가는 작용을 얻을 수 없다.

가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가는 놈이 있을 수 있겠는가?”(2-7)

 

 



여기서 첫 번째 구의 핵심은 가는 놈이 간다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비가 내린다와 같이 단어 두 개, 즉 주어와 술어가 결합되어 문장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비가 내린다와 같이 의미가 중복되어서 있어서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가는 놈이 간다라 했을 때 가는 놈이란 주체이고 간다는 가는 작용을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의 사건만 벌어지고 있는데 생각 속에서 주어와 술어를 만들어 분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말을 게송에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환멸연기 그거 하나로

 

가는 놈이 간다에서 주체를 빼 버리면 가는 작용이 없을 것입니다. 가는 작용이 없다면 당연히 가는 놈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연기송에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구절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수의 중론에 따르면 이것은 없기 때문에 저것도 없어서 연기법의 유전문을 부정합니다. 여기서 이것이란 고정된 실체를 뜻합니다. 그러나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없다라 한다면 용수의 중론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용수의 중론에서는 이것이 없다라 해야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래서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라는 환멸연기 하나로 언어로 표현된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기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게송을 보면 먼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유전연기를 부정합니다. 다음으로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 하여 환멸연기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가는 놈이 없기 때문에 가는 작용도 없어서 가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가는 놈이 있을 수 있겠는가?”(2-7)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환멸연기에 따른 테크닉입니다.

 

의미중복의 오류

 

김성철교수는 ‘2-7’게송이 환멸연기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어지는 게송을 설명하기 위한 예비단계라 볼 수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가는 놈이 간다

가는 것이 두 개가 있게 된다.

첫째는 가는 놈의 가는 것이고

둘째는 가는 작용의 가는 것이다.”(2-10)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이 게송을 보고 비가 온다라거나 바람이 분다라는 말을 개발하여 중관학을 설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가는 놈이 간다비가 내린다는 구조가 같습니다.

 

가는 놈이 간다고 했을 때 간다가 두 번 있게 됩니다. 이는 비가 내린다라 했을 때 비가 두 번 내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의미중복입니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분석해 보면 말에 오류가 있음을 말합니다. 중관에서는 이렇게 언설로 표현된 것에 대한 오류를 환멸연기로 잡아 내어서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중관학의 뼈대를 뼈대를 이루는 게송

 

중관학은 가는 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그것을 이해하는 사유방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이어 지는 게송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허물이 있다.

가는 것 없이 가는 놈이 있어서,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하는 것이다.”(2-11)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중론에서 이런 식의 게송이 거의 대부분이라 합니다. 이 세 개의 게송 ‘2-7, 2-10, 2-11’이 중관학의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말합니다. 중관에서는 모순이 되는 말을 지적하여 언설로 이루어진 사유방식에 오류가 있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중론은 사유체계를 부수는 테크닉

 

게송에서 가는 놈이 간다라는 말을 좀더 쉽게 말하면 철수가 간다라 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수는 어떤 철수일까? 앉아 있는 철수인지, 누워 있는 철수인지, 젊은 철수인지, 늙은 철수인지 알 수 없습니다.

 

철수라는 말은 이름에 불과합니다. 이는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왜 그런가? 무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아인자가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그래서 가는 놈이 간다라는 말은 모순이 있는데 이런 말을 하는 자에게 허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가는 놈이 없다면 가는 작용도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는 놈이 간다라고 말한다면 가는 것 없이 가는 놈이 있어서,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2-11)라 하여 환멸연기로 논파하고 있습니다.

 

가는 것 없이 가는 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이렇게 중론에서 환멸연기 기법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환멸연기를 말합니다. 반대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유전연기는 중론에서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환멸연기 하나로 언어체계로 이루어진 사유의 모순을 부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중론은 테크닉에 불과하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빈데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

 

니까야에는 중론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중론에서 말하는 진제와 속제라는 이제론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언어로 진리를 설했습니다. 그럼에도 후대 논사들은 언어로 표현한 것은 부정확한 것이라 합니다.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정도로 봅니다. 진리는 언설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서 뜻과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진리에 대하여 뜻과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비밀가르침이 되어 버립니다. 염화미소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전승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난다여,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 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스런 가르침이 없습니다. 이는 이띠붓따까에서“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It.121)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팔만사천 법문으로 모두 남김없이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언어로 남긴 것입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문자로 된 경전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람들은 부처님이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다.”라 하여 언어와 문자로 표현되어 있는 경전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뜻과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중론에서도 언어로 표현된 것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있습니다. 언어체계에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빈데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습니다. 설령 언어체계가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습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경,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전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이라는 구분교 형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경전에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법집(法執)이라 하여 부정한다면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고 결국 부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삼보를 부정하게 됩니다.

 

중론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삼보를 부정하면 불자라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을 불자라 하지만 초기경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불자라 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 조사의 어록에 의지한다면 그는 조교(祖敎)를 믿는 자가 되고, 불자라 하지만 조사의 가르침에 의지한다면 조자(祖子)가 될 것입니다. 불교인들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자자와 포살이 있는 고귀한 승가에 의지함으로 인해 불자가 됩니다.

 

중론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일종의 논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연기법에서 환멸연기라는 반쪽만 활용하는 논서입니다. 논서가 경장에 우선할 수 없습니다. 경장 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율장입니다. 그래서 빠알리 삼장에서는 순서가 율, , 론입니다.

 

논서를 인생관이나 가치관으로 삼았을 때 가르침을 무시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오로지 환멸연기 그거 하나로 설명되는 중론에 인생을 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

 

빠알리 삼장은 평생친구

 

부처님 가르침은 환멸연기뿐만 아니라 유전연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건에 따라 생성되고 조건에 따라 소멸되는 연기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공이니 공성이니 하는 말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연기법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 불과 450수 가량되는 중론 게송에 목숨 걸 필요 없습니다. 팔만사천 법문에 우리가 고민하는 모든 것이 실려 있습니다. 빠알리 삼장이야말로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2018-10-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