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권위에 의존하는 한국불교,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7강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26. 12:08

 

권위에 의존하는 한국불교,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7

 

 

거짓말이 난무하는 법정에서

 

법정은 거짓말이 난무하는 곳입니다. 그래서일까 법정에 서면 나는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라고 선서합니다. 이런 장면은 청문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법정이나 청문회에서는 왜 사실 보다 진실만을 말하길 바랄까?

 

사실과 진실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전에 따르면 진실은 거짓이 없는 사실을 뜻하고,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의미합니다. 거짓말이 난무하는 법정에서 진실선언을 요청하는 것은 거짓 없는 사실을 말해 주기를 바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도강좌 일곱 번째 이야기

 

조준호 선생의 인도강좌 일곱 번째는 사실과 진실에 대한 이야기 위주로 진행되었습니다. 사실과 진실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먼저 단어가 완전히 다름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2018 10 25일 문화살롱 기룬에서 열린 인도강좌 일곱 번째 이야기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부따(bhuta)와 땃차(taccha)

 

빠알리어로 사실을 부따(bhuta)라 하고, 진실을 땃차(taccha)라 합니다. 부따와 땃짜라는 말은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도 보입니다. 부처님은 외도들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비방했을 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D1)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iti'peta bhūta, iti'peta taccha를 번역한 말입니다. 여기서 부따는 사실로, 땃차는 진실로 번역 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이러하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진실을 뜻하는 땃차에 대하여 그렇다의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부따(bhūta)‘bhavati’의 괴거분사형으로 존재를 뜻하는 ‘become; existed’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真実, 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또 땃차(taccha)‘true; real’의 뜻으로 사실 그 자체의 의미로 사용되어 여실(如實)’의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땃짜가 부따 보다 더 사실이고 더 진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실지견(如實知見)에 대하여

 

불교에 대하여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하여 불교의 궁극의 경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 선생은 잘못 사용한 것이라 합니다. 왜 그럴까? 이는 여실지견이라는 말을 빠알리어로 풀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실지견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 ñāadassana)’ 라 합니다. 이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도 이와 같이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 있는 그대로 완전히 청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imesu catusu ariyasaccesu eva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yathābhūta ñāadassana na suvisuddha 뫠냐)”(S56.11)라 하여 ‘yathābhūta ñāadassana라는 말이 나옵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의 실상을 알고 봄을 말합니다. 그런데 존재의 실상을 알기 위해 사성제를 세 번 굴렸다고 합니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존재의 실상을 한번이 아니라 세 번 굴려서 알고 보게 되었을 때 완전하게 청정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S56.11)라는 앎과 봄이 생겨나서 깨달음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실지견은 존재의 실상에 대하여 여러 번 알고 보아 진실이 규명되는 과정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존재의 실상 그 자체라거나 궁극의 경지가 아님을 말합니다. 이는 여실지견이라는 말에 사용된 부따가 진실 그 자체를 뜻하기 보다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전단계로서 존재 그 자체를 뜻하는 사실임을 말합니다.

 

수행의 결과로서의 삼법인

 

사실과 진실은 다른 것입니다. 여실지견은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지혜가 여실지견입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았을 때 비로서 진실을 알게 되어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를 초기경전에서는 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i) 이라 합니다.

 

지혜에 의한 해탈은 특별한 신통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 선생은 삼법인으로 설명했습니다. 법구경에 삼법인과 관련된 게송이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abbe sakhārā aniccā 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7)

 

“Sabbe sakhārā dukkhā 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Dhp278)

 

 

“Sabbe dhammā anattā ti,

yadā paññāya passati,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ā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 (Dhp279)

 

 

불교인치고 삼법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불교의 진수라 볼 수 있고 불교의 결정판이라 볼 수 있는 삼법인은 법구경에서 세 개의 게송으로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법구경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지혜(paññā), 괴로움(dukkha), 청정(visuddhi)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똑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조준호 선생은 수행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단지 머리를 굴려서 사유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알아야 함을 말합니다.

 

지혜는 아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 합니다. 이는 게송에서 지혜로 본다면 (paññāya passati)”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지혜를 본다고 했을 때 본다는 것은 빳사띠(passati)를 말합니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통찰한다또는 꿰뚫어 본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의 결과로서 삼법인을 체득하게 되는데 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의 결과로서 조건지어진 유위법(sakhārā)’이 무상(aniccā) 하고 괴로운 것(dukkha)이고, ‘유위법과 무위법(Sabbe dhammā)’이 모두 실체가 없다는 것(anattā)’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정을 바탕으로 한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

 

조준호 선생에 따르면 존재의 실상을 보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동시에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존재의 실상을 볼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마타가 전제되는 위빠사나이고, 사마타는 바로 위빠사나라 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둘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불교현실에서는 위빠사나만으로도 삼법인을 통찰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은 한국의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 보다 외국의 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슈미츠 하우젠이나 푸셍 등이 선정수행 없이 삼법인과 같은 진리를 통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을 때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 사조는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경전을 피상적으로 보았거나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봅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너무나 분명합니다. 삼법인을 통찰하는 것은 선정의 바탕에서 통찰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실에 대한 지혜(法住智)에 대하여’(2018-07-3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이는 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i)’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스럽게 전승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설하셨는데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지혜에 의한 해탈, 즉 혜해탈에 대해서도 명백히 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혜해탈에 대하여 위빠사나수행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처럼위빠사나 수행만으로도 통찰지를 얻은 자를 ‘sukkhavipassata’라 합니다. 이를 한자어로 건관자(乾觀者)라 합니다. 그러나 최근 경향에 따르면 건관자에 대하여 부정적입니다. 선정 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만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혜에 의한 해탈은 모든 형성된 것을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통찰에 의한 해탈이라고 볼 때, 선정의 상태도 지혜에 의한 해탈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지혜에 의한 해탈에 선정이 없다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다.(성전협 상윳따2,367번 각주)라 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수시마의 경’(S12.70)에 따르면 육신통이 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이 가능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신통과 같은 비밀스런 가르침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정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고 해서 선정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지혜에 의한 해탈, 즉 혜해탈자는 선정을 바탕으로 이룬 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지혜로 해탈한 님의 경’(A9.44)을 보면 지혜에 의한 해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경에 따르면 벗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듭니다. 그는 지혜로 그것을 분명히 압니다. 세존께서는 이러한 경우 그 특정한 관점에서 그 분을 지혜로 해탈한 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선정에 드는 것 자체가 혜해탈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법구경에서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 하여 선정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중도가 깨달음이다?

 

사람들은 권위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외국학자들이 선정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 크게 동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큰스님들의 법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에서 중도를 주장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오십여년전인 6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 그때 당시와 지금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세계가 글로벌화 됨에 따라 교류가 빈번해졌고 정보통신과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부처님 원음이라는 니까야가 번역되어 널리 확산되고 있고 또한 남방 테라와다에서 수행한 불교인들도 많아 졌습니다. 그럼에도 오십년전 큰스님이 설한 것을 금과옥조로 삼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중도로 깨달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 초전법륜경(S56.11)에 따르면 고락에 대하여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S56.11)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중도론자들이 말하는 근거가 되는 구절일 것입니다. 또한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S56.11)라 하여 중도가 곧 팔정도임을 말합니다. 과연 부처님이 중도로 깨달았다.’라는 말이 바른 것일까?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중도는 곧 팔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중도가 깨달음이라는 말은 성립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팔정도는 사성제에서 도성제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도성제는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도성제인 팔정도를 중도로 하여 깨달음이라 한다면, 팔정도는 목적론이 되어 버립니다.

 

팔정도는 목적론이라기 보다는 방법론에 가깝습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S56.11)라 하여 깨달음의 길로 가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중도가 진정한 깨달음이 되려면 팔정도는 멸성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성제에서 멸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S56.11)라 하여, 멸성제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에서 말한 중도가 곧 깨달음이라는 말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권위에 의존하는 한국불교

 

진리탐구에 있어서 그 어떤 권위도 그대로 받아 들여서는 안됩니다. 이는 부처님이 깔라마의 경’(A3.65)에서 말씀 하신 것으로도 확인됩니다. 그래서 “1)소문이나 2)전승이나..,” (A3.65)라 했습니다. 그런데 조준호 선생은 “1)계시된 가르침이나 (계시 성전에 따른) 성자들의 가르침에 의지해서도 안 되고, 2)옛날부터 전래(전승)되는 말(전설, 설화, 신화 그리고 고사성어 등)이나 경전에 담긴 가르침이라고 해서도 안되며,”라고 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달리 번역했습니다.

 

조준호선생은 소문(anussava)’에 대하여는 계시된 가르침이나 (계시 성전에 따른) 성자들의 가르침이라 했고, ‘전승(paramparā)’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전래(전승)되는 말(전설, 설화, 신화 그리고 고사성어 등)이나 경전에 담긴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또한 그럴듯하게 들리는 유창한 말이나 논리로서 그것이 적당하게 보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이지 말라.”라고 번역 했습니다. 우리의 스승이니까하는 생각에 무조건 따르지 말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누군가 불교에 대하여 말하지만 곧이 곧대로 믿지 말고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 대조해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스스로 체험해 보는 것입니다.

 

외국학자가 말했다고 하여 큰스님이 말했다고 하여 무조건 따르는 것은 깔라마의 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부처님이 설한 경전을 확인하고 수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불교의 궁극적 진리라 볼 수 있는 삼법인 역시 사유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정을 바탕으로 한 수행의 결과로서 알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외국학자의 견해나 큰스님의 권위에 크게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삼매 체험속에서 반복적으로

 

흔히 여실지견한다고 합니다. 사실을 알고 봄에 따라 진실이 드러남을 말합니다. 삼법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 선생은 삼매 체험속에서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알고 봄에 따라 사실로 드러나는 것이 삼법인입니다.”라 했습니다. 선정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은 가능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선정수행의 결과로서 삼법인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멸현상로서 가장 기본인 제행무상을 통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초기경전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S22.15)

 

 

2018-10-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