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논리 하나로, 중관학의 반논리학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18. 16:15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논리 하나로, 중관학의 반논리학

 

 

여러분 조심하셔야 됩니다. 너무나 그럴 듯 하기 때문에 여기에 매달리면 그 다음에는 가치판단이 상실 상태에 빠져 버립니다. 선도 악도 없고 하늘땅이 뒤집히고 무얼 할지 모릅니다. 아노미 상태에 빠집니다.”이 말은 김성철 교수가 중관학 강좌에서 한 말입니다.

 

공사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튜브에서 김성철 교수의 중관학 강좌를 듣고 있습니다. 강좌명은 ‘STB콜로키움입니다. 모두 10강으로 되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글은 2강 중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공의 논리에 지나치게 매몰 되지 말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 중론은 테크닉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중론에 대하여 사상이나 신념체계로 삼는다면 그는 허무공에 빠지고 막행막식하게 될지 모릅니다. 특히 교학적 체계가 없는 자가 중론의 그럴싸한 논리를 들었을 때 가치판단이 상실 되어 미친 자처럼 행위 할 것이라 합니다. 단지 논리를 부수는 테크닉에 불과한 기법을 사상체계로 삼을 때 악취공에 빠질 것입니다. 그래서 김성철 교수는 공을 공부할 때는 열심히 하지만 딱 책장 덮은 다음에는 잊어버려야 해요.”라고 말합니다.

 

중론은 고정관념을 해체 시켜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는 언설로 표현된 개념에 대한 해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김성철 교수는 중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 다시 한번 명심할 것은 세속에서 생활할 때는 철저하게 분별해야 되요. 분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씻어 주는 것이 공사상입니다. 공사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라고 당부합니다.

 

STB콜로키움 중관학 강좌

 

유튜브에서 김성철 교수의 중관학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특히 ‘STB콜로키움 중관학 강좌는 이번이 두 번째 입니다. 1년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듣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거의 기억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들은 것은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번 두 번째 듣는 것은 메모해 가며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로 써서 정리하려 합니다.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중관학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특수학문으로서 중관학이고, 또하나는 보편학문으로서의 중관학입니다. 전자의 경우 아비달마를 비판하는 것으로 초기불전의 연기설에 근거하야 반야경의 공사상을 논증한다.”라고 설명됩니다. 후자는 반논리학으로 인간의 논리적 사유 전체를 비판한다.”라고 설명됩니다. 일반적으로 중론을 공부한다면 전자 보다 후자가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논리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중관학의 반논리학

 

중관학을 반논리학이라 합니다. 이제까지 익숙했던 언어적 논리를 해체하는 것이라 하여 논리로 논리를 부순다.’라 합니다. 이에 세 가지를 해체합니다. 그것은 개념론, 판단론, 추리론을 말합니다. 여기서 개념론은 실체를 갖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개념론은 연기한 것이기에 공하다라는 논리로 부수어집니다. 판단론은 어떤 사실과 일치함을 말하는데, 이는 사구 판단에서 각각 증익, 손익, 상위, 희론의 오류에 빠지기 때문에 논파됩니다. 추리론은 타당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상반된 추론으로 논파됩니다.

 

육체나 영혼 처럼 단어 하나면 개념이라 합니다. 사람이 죽는다또는 비가 내린다처럼 단어가 두 개 모이면 판단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단어가 세 개 모이면 추론이 됩니다. 추론의 예를 든다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은 삼단논법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개념, 판단, 추론으로 머리가 돌아가지만 중관학에서는 모두 틀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개념, 판단, 추론이 틀린 것일까?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논리 하나로

 

개념이란 무엇일까? 김성철 교수는 큰 방’ ‘작은 방으로 설명합니다. 여기 방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방이 커 보일 수도 있고 작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큰 방보다 더 큰 방이 있고, 큰 방보다 또 더 큰 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한 소급하다 보면 큰 방이나 작은 방이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이에 대하여 연기이기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큰 방이 있으면 작은 방이 있기 때문에 연기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 되어 있기 때문에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판단론이란 무엇일까? 김성철 교수는 판단론에 대하여 먼저 개념 두 개가 모이면 판단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비가 내린다.’와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비인데 또 내리는 비가 되어 버립니다. ‘꽃이 핀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관학에서는 개념의 실체성을 비판합니다. 개념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연기법으로 비판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환멸 연기 하나만으로 비판한다는 사실입니다. 연기송을 보면 “1)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2)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3)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4)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로 되어 있어서 딱 네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이중 중관학에서 개념을 부수는데 활용하는 것은 두 번째 것인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구절 하나입니다.

 

연기로 개념을 논파 하는데 있어서 긍정적 언표가 아닌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만약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유전연기를 사용하면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큰 방이 있기 때문에 작은 방이 있다.”라 한다면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무한소급하다 보면 큰 방은 원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연기의 환멸문에 해당되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부정적 언표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큰 방이 없어서 작은 방이 없다.”라거나 비가 없으면 내림도 없다.”라는 식으로 부정적 연기로 표현 됩니다.

 

중론에 따르면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고 합니다. 또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개념은 공한 것입니다. 판단에 대해서는 사구판단 부정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라 했을 때 경우의 수는 네 가지입니다.

 

마음과 뇌는 다르다고 하면 뇌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마음과 뇌는 같다고 하면 유물론이 될 것입니다. ‘같으면서도 다르다라고 말하면 이는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무언가 그럴 듯 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라고 주장한다면 신비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관학에서는 이 네 가지가 모두 가짜라 하여 부정합니다. 이른바 사구부정입니다.

 

네 가지 판단에 대하여 부정하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념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연기법 중에서 부정적 언표로 되어 있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환멸적 연기로 논파합니다.

 

선사들 수행법에도 중관사상이

 

중론을 보면 수 많은 게송이 등장합니다.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개념의 실체성 비판, 판단의 사실성 비판, 추론의 타성성비판이라 설명합니다. 그런데 개념의 실체성 비판은 선불교의 선사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큰 스님들의 수행법에는 중관사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무애행이나 막행막식 하는 요인도 될 것입니다. 선사들이나 큰스님들이 선문답할 때 동문서답 하는 것도 중관사상의 영향이라 합니다.

 

실제로 보는 것은 콸콸흘러 가는 변화일뿐

 

중관학을 공부하다 보면 궤변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서양철학계에서도 인정되는것으로 철저하게 논증된 것이라 합니다. 중론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그 보는 것은 자기 자신 그 자체,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 자체

그 어떤 것이, ()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저 다른 것들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44, 3-2)

 



 

우리는 눈으로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눈은 스스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한다는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거울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울은 단지 대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실제로 보는 것은 콸콸흘러 가는 변화일뿐이며 항상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제행무상으로 설명합니다.

 

불은 연료가 수반되어야

 

본래 무일물이라 합니다. 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훨훨 타는 것이 불입니다. 불은 외따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큰 방이나 ()’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불은 연료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연료가 없으면 불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론 게송에서는 연료가 없기에 불이 없고 불이 없기에 연료가 없다.”라 합니다. 불이 없는 것에 대하여 연기송의 환멸문인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는 부정적 언표로 논파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쓰임이 있기 전까지는 정체불명이고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 죽음 자체가 허구이다.”라 합니다.

 

지혜는 허물어져서 이루어지고

 

김성철 교수는 중관학 4강에서 유식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도 있고 대상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유식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 하여 오로지 마음뿐이고 대상이 없다고 합니다. 또 유경무식(有境無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내가 체험한 것은 대상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유식무경이나 유경무식은 같은 말이라 합니다.

 

유식에서 일체 마음뿐이라면 이런 논리도 성립합니다.“일체가 마음이라면 마음이라 할 것도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 아닌 것이 있어야만 마음이라는 개념이 성립함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부처, , 똥 등 여러 가지 용어에 대하여 그 쓰임새에 대하여 다양하게 설명합니다.

 

밥을 예로 든다면 먹는 것도 밥이라 하지만 촉식, 의사식, 식식도 밥입니다. 일체가 밥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일체가 부처이고, 일체가 우주이고, 일체가 똥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마음이라면 마음이라 할 것이 없듯이, 모두가 부처라면 부처라 할 것도 없고, 모두가 밥이라면 밥이라 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개념의 해체입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고착된 고정관념을 부수는 것입니다.

 

우주를 예로 든다면 ()=우주=모든 것(一切)’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가운데 있는 우주라는 말이 우리가 개념적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야의 지혜로 보았을 때는 ()’으로 절대부정이고, 화엄의 지혜로 보았을 때는 모든 것(一切)’이 되어 절대긍정이 됩니다. 그런데 해체해서 본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반야나 화엄이나 같은 것이라 합니다.

 

공으로 대표되는 반야나 모든 것으로 대표되는 화엄이나 공통적인 것은 개념의 해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성철 교수는 지혜는 허물어져서 이루어지고 지식은 쌓어서 이루어집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선사들이 부처에 대하여 마른 똥막대기라 한 것은 개념의 해체에 해당됩니다.

 

바깥에 나가서는 공 입에도 꺼내지 말고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반야는 발견된 진리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누구나 체득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에게나 해당됩니다. 초기불교의 토대 위에서 공사상을 접하면 문제 없을 것입니다. 이는 법에 대한 집착을 버림을 말합니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이처럼 법집을 내려 놓기 위한 것이 중론입니다. 그래서 중론에서는 언설로 된 개념론, 판단론, 추리론을 비판합니다. 그럼에도 초심자가 공사상을 잘못 사용한다면 독이 될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불리한 점도 말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사람들은 대개 불리한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장점만 말하거나 자랑하거나 과장하기 일쑤입니다. 자신의 단점이나 고쳐야 할 점, 약점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성철 교수는 공사상의 위험성에 대하여 강연 도중에 수 차례 언급합니다. 그래서 강연 말미에 여러분 공에 대해 강의 들었지만 절대 바깥에 나가서는 공 입에도 꺼내지 말고 떠올리지도 마십시오.”라고 신신 당부했습니다. 중관학의 권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2018-10-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