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분노와 폭력이 투영된 피(血)의 제사,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5강
아힝사에 대하여
비폭력 저항주의 상징은 간디입니다. 특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 대하여 ‘아힝사(ahiṁsa)’라 합니다. 간디의 아힝사는 힌두교 사상의 전유물일까?
상윳따니까야에 ‘아힝싸까의 경’(S7.5)이 있습니다. 바라문 아힝싸카가 부처님에게 “고따마여, 저는 아힝싸까입니다. 고따마여, 저는 아힝싸까입니다.”라 합니다. 바라문 자신의 이름을 아힝싸까라 했습니다. 아힝싸까(Ahiṁsaka)라는 말은 ‘해치지 않음(不害)’의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 대규모 동물희생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바라문은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자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불해자’라고 칭하는 바라문에게 “그대의 이름처럼 그렇다면 그대야말로 불살생자일 것이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습니다.
Yo ca kāyena vācāya
manasā ca na hiṃsati,
Sa ce ahiṃsako hoti
yo paraṃ na vihiṃsatīti.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해치지 않는
참으로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아힝싸까가 되리.”(S7.5)
이름이 아힝싸까라 하여 불해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더. 행위로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또 아힝사가 반드시 불살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적 폭력과 정신적 폭력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해치지 않는 자’에 대하여 진정한 아힝사라 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주의에 따른 아힝사는 힌두교가 아니라 불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희생양에 의한 피의 제사
조준호 선생의 인도이야기 다섯 번째는 희생제에 대한 것입니다. 이를 ‘피제사’라고도 했습니다. 제사 지낼 때 살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피제사는 전세계적으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볼 수 있는 현상이라 합니다.
피제사의 흔적은 천주교의 미사의식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희생제와 피제사에 대하여 조준호 선생은 인간의 욕망과 행복이 투영된 것이라 했습니다. 길흉화복을 주관 하는 신에게 잘 보아달라는 기도와 찬탄, 그리고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제사행위를 말합니다. 문제는 희생을 통한 ‘피의 제사’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바이블에는 피제사 흔적이 많습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사제는 이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나머지는 피는 번제단 밑바닥에 쏟아야 한다.”(레위4,25)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1요한1,7)라 했습니다. 이처럼 빈번하게 피제사 이야기가 바이블에 등장합니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피의 제사
초기경전에도 피제사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조준호 선생의 자료에 따르면 우파가경(잡아함89)과 장신경(잡아함93)을 예로 들었습니다. 경에 따르면 “바라문들은 항상 사성대회를 칭찬합니다.”라 했습니다. 여기서 사성대회(邪盛大會)는 희생제를 말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야즈나(Yajna)’라 합니다.
잡아함경에 실려 있는 피제사 이야기는 상윳따니까야 ‘제사의 경 (Yaññasutta)’(S3.9)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꼬쌀라 국의 빠세나디 왕이 큰 제사(yañña)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경에 따르면 “오백 마리의 큰 황소와 오백 마리의 황소와 오백 마리의 암소와 오백 마리의 산양과 오백 마리의 양들이 제사를 위해서 기둥에 묶여 있었다.” (S3.9)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물을 합하면 모두 2,500마리가 됩니다.
‘두(Du)-사(Sa)-나(Na)-소(So)’이야기
고대인도에서 대규모 피제사를 지내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법구경 60번 게송 인연담인 ‘어떤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Annatarapurisavatthu)’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Annatarapurisavatthu)
어느 축제날 꼬쌀라 국의 왕 빠쎄나디는 뿐다리까라는 흰 코끼리를 타고 왕의 위엄을 갖추어 싸밧티 시를 시계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그런데 칠층 저택의 가장 높은 베란다에서 한 가난한 남자의 아내가 왕을 쳐다 보고는 사라졌다. 왕에게는 보름달이 나타났다가 구름 속에 다시 들어 간 것이다.
왕은 정신을 잃고 코끼리 위에서 떨어질 뻔 하였다. 왕은 그녀가 결혼했는지를 알아보고 결혼 한 것을 알자 그 남편을 제거하기로 하고 그를 불로 시종으로 만든 다음 ‘일 요자나 떨어진 강으로 가서 적색대지와 청백수련을 가져와 저녁 목욕시간 전까지 가져오라.’라고 말했다. 불가능한 일을 시켜 항명죄로 처벌하려고 했다.
그는 여행객에게 자신의 밥의 일부를 나누어 주며 여행하다가 강으로 가서 강물에 밥을 던지며 용왕에게 빠쎄나디 왕의 계략을 말하고 적색대지와 청백수련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용왕에게 그것들을 받아 받아 싸밧티 시로 돌아 왔으나 성벽은 봉쇄되어 있었다. 그는 적색대지와 청백수련을 성벽에 붙이고 싸밧티 시의 시민들에게 ‘나는 왕의 지시대로 이행했으나 왕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호소 했다.
빠쎄나디 왕은 우연히 성에서 얼굴을 마주친 한 여인에게 사랑에 빠져 그녀를 차지할 욕심으로 그녀의 남편을 제거하고자 했다. 죄 많은 사랑 때문에 밤새도록 왕은 잠을 못이루고 사람이 끓는 물속에서 내지르는 듯 한 두-사-나-소라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악몽에 시달렸다.
왕은 사제인 바라문에게 해몽을 부탁했다. 그 바라문은 모든 종류의 뭇삶들, 100마리의 코끼리, 100마리의 말, 100마리의 황소, 100마리의 암소, 100마리의 염소, 100마리의 당나귀, 100마리의 산양, 100마리의 돼지, 100명의 소년, 100명의 소녀를 희생시키는 큰 제사를 통해서만 위협적인 공포를 미연에 방지하고 왕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왕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나의 목숨을 구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큰 희생제를 준비하도록 시켰다. 왕은 바라문에 ‘모든 종류의 뭇삶들을 빨리 마련하라.’라고 시켰다.
바라문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필요한 것 보다 많은 뭇삶들을 동원시켰다. 500마리의 큰 황소와 500마리의 황소와 500마리의 암소와 500마리의 산양과 500마리의 양들이 제사를 위해서 기둥에 묶였다. 또한 왕의 노예와 심부름꾼과 하인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처벌을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면서 슬피 울며 희생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친지를 위하여 비탄해하며 땅이 갈라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왕비 말리까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왕에게 가서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고는 부처님을 찾아 갔다. 부처님께서는 빠쎄나디에게 꿈의 참다운 뜻을 일러주었다.
꿈에서의 비명은 수천 년 전에 바라나씨의 젊은 상인들이 간통한 뒤에 지옥의 불속에 떨어졌는데, 그들 네 명의 지옥주민들의 경고였다. ‘두(du)’는 ‘우리가 행한 악한 일, 가진 재산을 주지 않고 가진 재산으로 피난처를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고, ‘사(sa)’는 ‘육만년을 지옥에서 삶아져 지냈으니 언제 끝날 것인가?’라는 뜻이고, ‘나(na)’는 ‘끝이 없으니 언제 죄악이 끝날 것인가?’라는 뜻이다. ‘소(so)’는 ‘내가 여기를 나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관대하고 계행을 지키고 선행을 하리라.’라는 뜻이었다.
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희생제를 준비하는 것이 소용없는 짓임을 알게 된 왕은 그 준비를 거두었다. 그러자 부처님께 ‘잠못 이루는 자에게 하룻 밤이 얼마나 긴 것인가’를 말했고, 왕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던 사람은 ‘일 요자나가 얼마나 먼 것인가’를 토로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사람에게 밤은 얼마나 긴가를 말했고 다른 사람은 일 요자나가 얼마나 먼가를 말했다.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Dhp 60)’라고 가르쳤다.
빠쎄나디왕은 부처님께 절을 하고 가서 그 뭇삶들을 기둥에서 풀어주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들도 속박을 풀어주고 머리를 감기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들은 말리까 왕비의 덕행을 칭송하며,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신 자애로운 말리까 왕비는 만수무강하옵서소!’라고 말했다.
(Annatarapurisavatthu-어떤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 법구경 60번 게송 인연담)
법구경 60번 게송 인연담을 보면 상윳따니까야 제사의 경을 보충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니까야가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구조로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인연담에서도 2,500마리의 동물이 희생되려 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왕비 말리까에 의해서 희생제는 그만 두게 됩니다. 동물의 희생으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생한 과보를 받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두(Du)-사(Sa)-나(Na)-소(So)’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인신공희(purisamedha)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의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는 숫따니빠따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서도 등장합니다. 경에 따르면 “그래서 수레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말의 희생제, 인간의 희생제, 핀을 던지는 제사, 쏘마를 마시는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 이러한 제사를 지내고, 바라문들에게 재물을 주었습니다.”(Stn.303)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희생제(purisamedha)’가 있습니다. 바라문 제사에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人身供犧), 즉 피의 제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피의 제사를 부정했습니다. 이는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에서 칼로 소들이 베어지자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 아수라, 나찰 들이 일제히 “불법적인 일이다.(adhammo iti pakkanduṃ)”(Stn.310)라고 대신하여 말하게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제사를 부정하지 않은 부처님
바라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위하여 대규모 희생제를 왕에게 권유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희생제는 공덕이 있을까?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제사의 경’에서 이렇게 게송을 읊었습니다.
“말을 희생하는 제사, 사람을 희생하는 제사,
나무 봉이 던져진 곳에 제단 쌓는 제사,
승리의 축배를 드는 제사,
무차(無遮)의 제사는
많은 수고만 있을 뿐 공덕은 크지 않네.
산양과 양과 소 등을
희생하는 그러한 제사에
올바른 길을 가는
위대한 선인들은 참여하지 않는다네.
거창한 행사 없이 언제나
가문에서 대를 이어 내려온
산양과 양과 소 등을 희생하지 않는 제사
올바른 길을 가는 위대한 선인들은
그러한 제사에 참여한다네.
현자들은 살생이 없는 제사를 행하니
그 제사는 큰 공덕을 가져오네.
훌륭한 제사를 행하는 자에게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은 없네.
살생이 없는 제사는 위대한 것
하늘사람조차 기뻐한다네.”(S3.9)
게송을 보면 부처님은 제사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동물이나 인간을 희생하는 피의 제사는 부정했습니다. 부처님은 희생제만 아니라면 오히려 제사를 장려 했습니다. 또한 제사를 하면 공덕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어떻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
부처님은 희생제 없는 제사를 장려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사를 지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쿳다까니까야 ‘담장 밖의 경’(Khp.7)을 보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음식과 관련하여‘담장밖의 경’에 따르면 “제철의 정갈하고 훌륭하고 알맞은 음식과 음료를 헌공하오니”(Khp.7)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철 (kālena)’이라는 말은 제철에 나는 음식을 말합니다. 그런 음식에 대하여 ‘정갈하고 훌륭하다(Suciṃ paṇītaṃ)’고 했습니다. 정갈하다는 말은 순수한 음식을 말합니다. 다름 아닌 제철에 나는 곡식이나 나물, 과일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제철에 나는 것들로 제사상을 차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제사상은 동물이나 인간의 희생으로 인한 피의 제사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살생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채식 위주의 식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제사상에 대하여 “풍요로운 음식의 성찬”(Khp.7)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제사를 지내면 공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제사지내야하는가? ‘담장 밖의 경’에 따르면 아귀가 되어 죽은 조상들입니다. 이는 “담장 밖의 거리 모퉁이에 있으면서 가신 친지들이 자기 집을 찾아와서 문기둥에 서있나이다.”(Khp.7)라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조상들에게 여러가지 음식과 많은 음료를 차렸으나 이들을 알아 차리지 못하는 것은 뭇삶들의 업으로 인한 것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제철에 나는 음식으로 살생없는 제사를 지내면 큰 공덕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자들이 기일에 제사 지낼 때 육류나 술을 제사상에 올려 놓는 행위를 금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절에서 재를 지낼 때 일체 육류와 술이 올라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로지 밥과 나물과 과일 위주입니다. 또 술 대신 청정한 음료가 올라갑니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에서는 제사 지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에 따른 대속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지역에서나 희생제는 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브라만교에서도 피의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희생하는 제사에 대하여 “많은 수고만 있을 뿐, 공덕은 크지 않네.”라며 부정했습니다. 이와 같은 희생제는 주로 신을 믿는 종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고등종교라 불리우는 유일신교에서도 희생제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천주교 미사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희생제의 흔적은 문명화된 오늘날에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인재나 천재가 발생했을 때 목사들이 발언하는 것에서 발견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났습니다. 전국민이 충격에 빠졌고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때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어린 학생들이 희생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뜻이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나라가 침몰하려 하니 어린 꽃다운 학생들을 침몰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전형적인 희생제, 피제사를 말합니다.
바이블에서는 희생제 이야기는 매우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분의 아들 예수의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줍니다.”(1요한1,7)와 같은 ‘대속론’입니다. 희생제 이야기는 바이블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심청전 이야기도 일종의 희생제이자 대속론입니다.
분노가 내부로 향했을 때
피의 제사에서 희생당하는 자들은 힘없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전쟁포로나 여자 등 힘없는 소수가 피제사에 제물이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 탈북자, 특정지역 출신 등 힘없는 소수가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모임이나 단체에서도 희생제의 흔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사회에 대한 정의를 부르짓는 집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이 좌절 되었을 때 분노가 내부로 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럴 때 누군가 희생양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노가 특정인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특정인에게 향하면 욕먹은 자를 욕하고, 맞은 자를 또 때리는 가학적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는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를”(S1.71)이라는 게송이 잘 말해 줍니다. 분노(독) 하면서 쾌감(꿀)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사디스트처럼 가학(加虐)하면서 쾌감을 즐기는 것과 같습니다.
사디스트적 가학은 불교단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개혁이 좌절된 것에 대하여 희생양을 필요로 합니다. 대상이 스님이 될 수도 있고 재가불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지목되면 마치 집단으로 린치를 가하듯이 언어폭력을 행사합니다. 희생양으로 피의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분노와 폭력이 투영된 피(血)의 제사
누군가를 희생하여 나의 죄를 대신하게 하는 것은 매우 폭력적 행위입니다. 대속 개념으로 인하여 수많은 동물이 희생되었고 사람들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와 같은 희생제로 인하여 오계에서 불살생가 가장 앞서 나온 이유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 합니다.
아힝사는 불살생을 뜻하기도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비폭력입니다. 그런데 신체적 폭력 뿐만 아니라 언어적 폭력과 심지어 정신적 폭력도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모든 폭력에는 공통적으로 욕망과 분노가 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정도 정사유에 대하여 “욕망을 여읜 사유를 하고, 분노를 여윈 사유를 하고,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S45.8)라 했습니다.
힘 없는 소수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는 불살생계를 어긴 것입니다. 또한 희생양을 삼아 자신의 죄를 대신 하게 하려는 행위는 욕망이고 분노이고 폭력이어서 팔정도의 정사유를 어긴 것이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속을 위한 희생제는 인간의 욕망과 분노와 폭력이 투영된 피(血)의 제사입니다.
2018-10-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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