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공을 연기로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신상환 선생의 중론강좌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6. 22:08

 

공을 연기로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신상환 선생의 중론강좌

 

 

있다고 하면 상견에 빠지고 없다고 하면 단견에 빠진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윤회가 있다라고 하면 상견에 빠지기 때문에 영원주의자라 하고, ‘윤회가 없다라고 하면 단견에 빠져서 허무주의자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있다 또는 없다라는 것은 실체론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론식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 하여 쌍으로 부정하면 된다고 합니다. 신상환 선생의 중론강좌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신상환 선생의 중론강좌

 

중론강좌를 듣고 있습니다. 10 5일부터 11 2일까지 매주 금요일에 열립니다. 모두 5강입니다. 장소는 불교여성개발원 1층입니다. 조계사 맞은편에 있고 조계사불교대학 바로 옆에 있습니다. 개별강좌는 3만원이고 5강을 한꺼번에 신청하면 12만원입니다. 5강 모두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니까야강독모임과 두 번 겹치기 때문에 세 번 가능합니다.

 

10 5일 첫 번째 강연이 열렸습니다. 불교여성개발원 1층 지혜실에는 총 60개의 좌석이 마련 되어 있는데 거의 꽉 찼습니다. 최근 이렇게 열띤 강좌는 처음 봅니다. 회당 강연비가 상당함에도 열기가 매우 뜨거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중론에 대한 흥미뿐만 아니라 강사에 대한 기대도 있을 것입니다. 강사 신상환 선생은 파워포인트를 이용하여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중론을 설명했습니다.

 




첫번째 강연은 지난 강좌 복습이라 합니다. 중론 1-16품에 대한 복습입니다. 그래서일까 주로 파워포인트 위주로 리뷰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중론의 경우 계단 오르기식 강의는 아니라 합니다. 벽돌쌓기 식으로 처음부터 들어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도중에 들어도 됨을 말합니다.

 

(Why)와 어떻게(How)에 대하여

 

중론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신상환 선생은 겁먹지 마십시오.”라 말합니다. 핵심만 알면 따라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체계적 강연으로 머리 속에서 정리가 잘 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머리를 많이 쓰는 것을 요합니다. 치매 예방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합니다.

 

신상환선생이 말한 것을 놓치지 않고 메모해 두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쓴 것을 나중에 읽어 보면 기억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글로서 남기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정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파워포인트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이 (Why)’어떻게(How)’에 대한 것입니다. 누군가 ?’라고 의문하면 이는 철학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물리적 세계를 다루는 과학도 같은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누군가 어떻게(How)’라 한다면 이는 종교적 영역이라 합니다. 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며 의문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어떻게에 대한 문제는 상윳따니까야에서도 등장합니다.

 

상윳따니까야 몰리야 팍구나의 경’(S12.12)에 따르면, 존자 몰리야 팍구나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며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러한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라며 물어야 올바른 질문이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내가 누굴까?’ 또는 세상은 유한한가?’등으로 형이상학적 질문하면 이는 희론으로서 고와 고소멸 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뜻으로 연기법적 사유를 해야 함을 말씀 했습니다.

 

공을 연기로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신상환 선생이 파워포인트 첫 페이지에서 (Why)’어떻게(How)’를 이야기한 것은 연기법적 사유에 대한 것이라 봅니다. 중론에서 다른 것은 모두 논파되지만 연기법 하나만큼은 논파 되지 않습니다. 이것 마저 부수어 버린다면 불교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공을 항상 연기로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공이 곧 연기임을 말합니다. 이는 중론 24 18번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 것으로도 확인됩니다.

 

 

연기인 그것

바로 그것을 공성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에 의지하여 시설된 것

그 자체가 바로 중도이다.”(24-18)

 

 

연기가 곧 공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공성을 논하는 것은 한마디로 희론을 부수기 위한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어떤 뜻을 정의하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언어는 세상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언어에 매여 있을 때 거침 없이 변화 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는 설일체유부와 경량부가 대상에 집중하여 법을 분석하는 것과는 대비됩니다.

 

중관학파에서는 인식주체가 대상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신상환 선생은 파워포인트 자료에서 유식학파는 인식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하고, 중관학파에서는 인식주체의 대상의 그침 없는 연기성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에 대하여 현상으로 번역합니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런 현상을 말합니다.

 




대승불교의 아버지이자 제2의 붓다

 

중론에서는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언설의 세계가 있고 또 하나는 연기실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연기실상의 세계에서 본다면 언설의 세계는 모두 부정됩니다. 이에 대하여 신상환 선생은 연기법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버린다.”라고 했습니다. 연기법 마저 버린다면 더 이상 불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론은 용수에 의해서 시작 되었습니다. 용수의 근본중송에 대하여 후대 사람들이 주석을 달아 중론이라 한 것입니다. 한역으로는 중관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용수를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합니다. 또 용수에 대하여 제2의 붓다라 합니다. 용수에 대하여 왜 이런 칭호를 붙여 주었을까?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한걸음 더 들어 갔기 때문이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면 수행승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했습니다. 연기송을 보면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용수는 이것을 의심했습니다. 과연 이것은 있는가?”라 한 것입니다. 용수는 연기적인 것만 존재할 뿐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발상은 혁명적입니다. 이로 인하여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불리우고 제2의 붓다가 되었습니다.

 

()와 무아(無我)의 투쟁사

 

흔히 인도사상사에 대하여 아()와 무아(無我)의 투쟁사라 합니다. 누군가 영혼은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영혼을 뜻하는 아뜨만을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용수는 영혼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라 했습니다. 만일 영혼이 있다고 하면 상견에 빠지고, 영혼이 없다면 단견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론에서는 아와 무아에 대해서 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라 하여 쌍으로 부정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용수는 무아론도 부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아에 대해서도 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신상환 선생은 존재에 대하여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A는 존재하는 것이다: A

2) A는 존재 하지 않는다: –A

3) A는 존재하고 A는 존재하지 않는다:A and –A

4) A는 존재하지 않고 A는 존재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A and -(-A)

 

 

이와 같은 네 가지 중에서 중론에서는 네 번째 항을 취합니다. 모두 쌍으로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연기실상에 따른 것입니다. 무언가 다른 형태로 끊임 없이 변화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 것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고, 없던 것이 생겨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신상환 선생은 무언가 다른 형태로 변화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중론을 사상적 신조로 삼았을 때

 

흔히 중론하면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중론의 특징이 아니다라고 표현 되어서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론으로 언어체계로 되어 있는 개념이 모두 부수어집니다. 연기법을 제외하고 부처님이 설한 것도 부정됩니다. 그런데 중론을 사상으로 삼으면 매우 위험하다고 합니다. 논리를 논리로 부수는 테크닉 불과한 중론을 사상적 신조로 삼았을 때 허무공에 빠져 막행막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론을 공부할 때는 책장을 덮는 순간 잊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중론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재해석 했을 때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신상환 선생은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한다면 당연히 윤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공의 논리로 모든 것을 공한 것으로 보는 자들의 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한테 맞는 가르침이 있다고 했습니다.

 

중론이 자신에 맞는 자는 중론의 논리로 가르침을 재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기복으로 보일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그런 불교가 맞다는 것입니다. 업과 윤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중론의 공의 논리로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린다면 저항에 부딪칠 것입니다. 딱딱한 중론 보다는 팔만사천의 초기경전이 훨씬 더 마음을 풍부하게 해줍니다.

 

 

2018-10-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