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지배 우월주의가 만들어낸 아리안(Arian), 조준호선생의 인도는 마음의 고향,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2강
“과거와 현재 속에 미래가 담겨있다.” 이 말은 조준호 선생의 인도강좌 두 번째 시간에 한 말입니다. 인도라는 나라는 대륙에 준하는 나라로서 유럽대륙과 맞먹는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 보다 다양성입니다.
인도의 다양성
인도아대륙에서는 크게 호주-아시아계, 드라비다계, 아리안계, 몽골계 이렇게 네 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종의 다양성 못지 않게 언어 역시 수 많은 공영어가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20개 가량이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인종집단과 어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강연 자막에는 “인도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다인종, 다민족, 다언어, 다문화, 다종교 사회”라 했습니다. 그리고 인도라는 나라에 대하여 “다양성 속에 통일성, 통일성 속에 다양성의 사회.”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국을 인종의 도가니라 합니다. 인종의 도가니에도 은연중에 인종차별이 있다고 합니다. 지식인층에서는 드러내놓고 차별하지 않지만 은근하게 차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인이 정점에 있고, 그 다음이 흑인, 그 다음이 히스페닉, 그리고 동양인이 최하위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에 가면 흑인 보다 더 아래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카스트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사성계급이라 하여 브라만, 크샤뜨리아, 바이샤, 수드라와 같은 계급입니다. 그런데 카스트에도 속하지 않는 계급이 있는데 불가촉천민이라 합니다. 이처럼 인도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다인종, 다민족, 다언어, 다문화, 다종교 사회인데 이에 대하여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고, 통일성 속에 다양성이 있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요즘 한국사회를 다문화 사회라 합니다. 다문화라는 말이 나온 것은 불과 십년 안팍입니다. 이전에는 단일민족이라 나라의 정체성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글로벌화 됨에 따라 한국에도 다인종, 다민족, 다언어, 다문화, 다종교 사회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점차 긴장과 갈등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느 종족일까?
인도에는 네 가지 어족과 20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인종과 언어의 도가니라 볼 수 있습니다. 조준호 선생에 따르면 한동네에서도 우르드어를 쓰는 사람, 힌디어를 쓰는 사람 등 말이 서로 다를 정도라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언어가 있다보니 인도사람들은 언어 습득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종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곳이 인도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느 인종에 속하는 것일까?
부처님에 대하여 당연히 아리안족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조준호 선생이 참고용으로 제공한 논문 ‘붓다의 인종족 기원에 대한 고찰’을 보면 반드시 아리안족일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도에서 인종집단과 어군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리안계통의 인종이라도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고, 반면 비아리안 계통이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조준호 선생은 눈문 말미에 “여러 가지 점에서 필자는 석가족을 인도 전반의 역사에서 보여주듯이 혼혈이 상당히 진행된 부족으로 본다.”라 했습니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불자들은 부처님이 어떤 종족에 속하는지 관심이 많습니다. 수 많은 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이 어떤 종족에 속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부처님이 카스트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 선생은 논문에서 “불교는 어떠한 인종적, 민족적, 계급적 선민의식을 배제하기 때문이다.”라 했습니다. 이런 말은 실제로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그대는 어떤 가문 출신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의 삭발한 모습을 보고서 바라문 출신이 아닐 것으로 생각해서 물어 본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단에서는 바라문계급뿐만 아니라 모든 사성계급 출신들이 평등하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말했습니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
부처님은 출생을 묻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바라문인지 아닌지 따지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또 태생으로 차별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따져야 할 것은 행위라 했습니다.
바라문이 농사를 지으면 농부가 되고, 바라문이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천민이 수행을 하면 성자가 됩니다. 이는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에서 “노예도 신체적으로 자제를 하고, 언어적으로 자제를 하고, 정신적으로 자제를 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닦으면,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D2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앞에 차별없다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붙는 다고 했습니다. 불가촉천민도 가르침을 실천하며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아쌀라야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쌀라야나여, 만약에 귀족가문, 왕족 가문,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이 사라수, 사라라수, 전단수, 또는 발담마수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있고, 광채와 광명이 있어, 바로 그 불꽃으로만 불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도 개 먹이통, 돼지 먹이통, 세탁통이나 엘란다 나무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없고, 광채와 광명이 없어, 그 불꽃으로는 불을 만들 수 없습니까?” (M92
고급 전단향 목재에서 붙는 불이나, 소똥 말린 것에서 붙는 불이나 모두 같습니다. 어느 땔감이든지 불의 화염과 광채와 광명은 동일합니다. 인종과 언어와 차별하여 계급을 만들어 놓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는 모두 평등합니다.
부처님의 평등사상은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유효합니다. 비록 승가와 재가는 길이 달라도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는 평등합니다. 어떤 땔감에서 불이 붙듯 부처님의 가르침에 태생적으로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리야(ariya)는 수식어
부처님이 아리안족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비아리안계통일 수도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니면 혼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도사람들을 보면 부처님의 상호를 대강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도성지 순례 가서 본 인도인들의 평균치입니다. 대개 가무잡잡한 피부에 유럽인종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여러 인종간의 혼혈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스님은 처음 인도에 가서 실망했다고 합니다.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인도인들을 보고서 부처님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치 부처님이 흑인출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몹시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백인 우월주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봅니다.
어떤 이는 아리안족이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부처님도 유럽의 백인처럼 피부가 흰색이 유럽계통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준호 선생에 따르면, 백인 우월주의 상징과 같은 아리안이라는 말은 본래 불교경전에서는 아리야(ariya)라 하여 수식어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백인지배 우월주의가 만들어낸 아리안(Arian)
사성제의 경우 ‘짜따리 아리야 삿짜(chattari ariya Sacca)’라 하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리야는 ‘noble’의 뜻으로 수식어로 사용됐습니다. 팔정도를 빠알리어로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ariyo aṭṭhaṅgiko maggo)’라 하는데 이는 아리야라는 말이 팔정도를 수식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수식어 불과한 아리야라는 말이 유럽에서 인종을 뜻하는 아리안으로 변질 되었을 때 백인우월주의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아리안족을 백인 우월주의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미국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리야니즘(Arianism)을 백인 우월주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아리야라는 말은 인종과는 관련 없는 수식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대 유럽에서 통용된 아리안이라는 말은 백인지배 우월주의가 만들어낸 인종차별적 용어라는 사실입니다.
2018-09-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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