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부처님은 사상의 종결자,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6강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20. 21:06

 

부처님은 사상의 종결자,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6

 

 

조준호선생의 인도이야기 여섯 번째는 근원과 본질에 대한 이해와 역사입니다. 이를 욕망과 행복 그리고 세계관의 문제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 불교가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한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인도에서도 신에 의한 창조론으로 시작 되었으나, 창조론이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에 따라 갖가지 사조가 난무했습니다. 브라흐마나나 사마나 어느 것 하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갖가지 사상은 부처님의 연기와 업의 가르침으로 모두 파사(破邪)됩니다.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2018 10 18일 목요일 저녁 문화살롱 기룬에서 조준호선생의 인도강좌를 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오는 고정멤버들이 있습니다. 모두 열 번의 강좌에 완주할 사람들로 보여집니다. 비록 참여자는 많지 않지만 강연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 진지합니다. 주어진 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이번주 인도이야기 큰 주제는 욕망과 행복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붙인다면 고통일 것입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해왔지만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는 고대인도에서 신의론이나 숙명론, 우연론 등에서 보여집니다.

 

욕심이 있으면 없는 것도 만들어낸다.”

 

신의론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유일신교와 유사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바라문교의 창조주에 대하여 전지자, 주관자,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조물주, 최존자, 창조자, 권능자, 아버지 등으로 묘사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지전능한 신이 등장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 봅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 선생은 욕심이 있으면 없는 것도 만들어낸다.”라고 했는데, 창조주를 상정하는 것에 대하여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신의 종교에서는 궁극적 실재 또는 존재의 근원, 근본실체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브라만교의 경우 개인적 실체로서의 아뜨만과 외부의 실체로서 브라흐마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실체론에 대하여 조준호 선생은 인간을 슬픔과 비탄으로 몰아가는 요인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M22)을 들고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은 ‘이것이 세계이며, 이것이 자아이다. 나는 죽은 뒤에도 상주하고 견고하고 지속하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여래 또는 여래의 제자로부터 모든 견해의 관점, 선입견, 편견, 집착, 경향을 뿌리 뽑고 모든 형성을 중지하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고 갈애를 부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열반하기 위해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들었다면, 그는 ‘나는 단멸할 것이다. 나는 파멸할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곤혹스러워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안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해 혼란될 수 있다.(M22)

 

 



영혼과 창조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부처님 설법을 들었을 때 매우 당혹스러워 할 것이라 합니다. 자신의 신념체계가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탄해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라 합니다. 이는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고 믿는 영원주의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원주의자의 당혹감은 실체라고 여겼던 것이 사라졌을 때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부처님이 하느님(브라흐마) 바까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볼 수 없도록 신통을 행사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 없는 것을 추구하려는 존재에 대하여 나는 그 존재를 긍정하지 않고 어떠한 환희에도 집착하지 않았네.(M49)라고 게송을 읊었습니다.

 

부처님은 영원히 살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하느님 바까에게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하느님도 윤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이는 자아와 세계가 영원하다고 믿는 영원주의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좌절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실체론적 세계관에 집착했을 때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이론이 왜 먹혀 들어갔을까?

 

사마나와 관련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여섯 외도의 스승의 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도 스승의 가르침 또한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그 시대가 요청하는 것에 부응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쩌면 시류에 편승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육사외도의 스승 중에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물질로 보아 정신도 물질에서 나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함께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살아 있을 때 남의 돈을 빌려서 갚지 말고 써 버려라.”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도덕적 관념으로 본다면 도저히 용인 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 때 당시에는 이런 주장이 의외로 먹혀 들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때 당시 사회상이 반영된 것이라 합니다.

 

육사외도의 스승 중에 뿌라나 깟싸빠가 있습니다. 뿌라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과보를 인정하지 않아 도덕부정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아도 과보를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살생에 대해서는 단지 칼이 7요소 사이를 지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쁜 짓 하고도 잘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입장에서 보았을 때 말도 안되는 이론이 왜 먹혀 들어갔을까?

 

갠지스 평원의 충적토는 농산물 생산에 매우 적합하여 이모작은 물론 삼모작이 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경제력은 상업을 증대시켰고 잉여자본에 따라 도시가 발달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시에서의 삶은 농촌과 달리 익명적 삶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 해도 잘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뿌라나 깟싸빠의 도덕부정론은 어쩌면 시대가 요청한 사조임에 틀림 없습니다.

 

육사외도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이나교의 니간타가 고행을 강조한 것도 따르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선생은 그 시대의 욕망과 행복이 반영된 것이라 했는데 이는 그러한 사상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사상의 종결자

 

삼종외도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업과 업의 결과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무작설에 대하여 조준호 선생은 준비된 자료에서 도경을 인용하여 자기 생활 가운데에는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도무지 적극적인 의지도 없고 방편도 없을 것이다.”라 했습니다. 결국 의지방편의 문제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1)에서는 의도정진이라 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외도의 가르침을 따르면 의지도 없고 정진도 없이기 때문에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연기법에 따른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의도가 있고 정진이 있어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준호 선생은 브라만교와 육사외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이처럼 불교는 당시 일반 대중은 물론 전문적인 종교가나 철학자가 취한 모든 형태의 세계관, 인간관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이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불교가 시작할 때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해 인류 역사에 있어 왔던 또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입장들을 검토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은 외부의 절대자인 신이나 내부의 운명적인 결정이 아니며 나아가 우연도 아니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해 주고 계신다.”

 

 

부처님 당시에 고대인도에서는 사상적 혼란이 있었지만 요즘 말로 부처님은 사상의 종결자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기법으로 모든 사상을 논파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준호 선생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갖가지 미신으로부터 계몽시켜준 깨달음으로 가장 큰 공헌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라 했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 공부를 통해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자라고 강조합니다.

 

 

 

2018-10-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