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중론을 인생관으로 삼았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27. 14:43

 

중론을 인생관으로 삼았을 때

 

 

수평선은 어디에 있는가?

 

바닷가에 가면 수평선이 보입니다. 수평선은 하늘의 영역에 속할까 바다의 영역에 속할까? 수평선이 하늘에 속한다면 바다가 서운해 할 것이고, 반면에 수평선이 바다에 속한다면 하늘이 섭섭해 할 것입니다. 과연 수평선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김성철 교수의 유튜브 중관학 강좌에서 본 것입니다.

 

중관학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부숩니다. 특히 언설로 된 것을 깨 버립니다. 머리 굴려 생각하는 모든 것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평선에 대하여 머리를 굴려 보면 사구분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1)수평선은 하늘이다, 2)수평선은 바다이다, 3)수평선은 하늘이면서 바다이다, 4)수평선은 하늘도아니고 바다도 아니다.’라고 네 가지 구문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네 가지 모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사구분별의 오류

 

사구분별에서 1구는 증견이라 하고, 2구는 손감견, 3구는 상위견, 4구는 희론견이라 합니다.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비가 내린다라 했을 때, 내리는 비가 또 내리는 것이 되어 의미중복의 오류()’가 되어 1구가 부정됩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라 하면, 내리지 않는 비는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사실위배의 오류(損減見)’가 되어 2구가 부정됩니다. ‘비가 내리기도 하고 내리지 않는다라 하면, 서로 공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호모순의 오류(相違見)’가 되어 3구가 부정됩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면, 말장난이 되어 언어유희의 오류(戱論見)’이 되어 4구가 부정됩니다.

 

머리 굴리지 말라고

 

수평선은 분명히 있습니다. 비도 분명히 내립니다. 그러나 사구로 비판하면 모두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관학의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머리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뇌가 작동하면 다 오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성철 교수는 요즘 뇌과학 유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중관학의 요점은 뇌를 제거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수평선이야기는 공간적인 것에 대한 예입니다. 시간적인 것으로 징소리를 들 수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소리가 갑자기 나서 긴여운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이때 종소리는 침묵의 순간에 속할까 소리의 순간에 속할까? 이에 대하여 사구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네 가지에 다 속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종소리는 났습니다. 그러나 사구비판에 따르면 종소리는 사구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무엇이 시작 되었다거나 무엇이 이렇게 생겼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법실상의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머리 굴려 분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중관학에 따르면 어떤 것도 끝까지 가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상가나 철학자들, 또는 과학자들은 끝까지 추구하다 멈추어서 이것이다.”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초기경전에서 외도들이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사밧티 시에는 많은 다양한 이교도의 수행자들, 성직자들, 유행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견해와 신념을 지니고 또한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다양한 견해에 지지하며 의존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Ud.66)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Ud.66)라고 주장했습니다.

 

입에 칼을 물고 싸우는 이유는

 

외도들의 주장을 보면 공통적으로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idameva sacca moghamaññan)”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진술에서 이것이야말로 진리라는 주장은 선입견(purimadiṭṭhi)’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는 주장은 증상견(uttaradiṭṭhi)’이라 합니다. 우다나와 맛지마니까야 등 초기경전에서는 앞에 언급한 두 가지 외에 영혼과 육체는 같다.’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 등 열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다나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찔렀다.”(Ud.66)

 

 

열 가지 사상에 대하여 서로 진리라고 주장 했을 때 반박하는 논리에 대해서 설전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찔렀다.’라 했습니다. 사상과 사상이 서로 충돌 했을 때 역사적으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극우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인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우다나에서 열 가지 사상에 대하여 부정했습니다. 이는 중관학에서 사구비판이라 하여 언설에서 오류를 지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다나에 따르면 부처님은 눈먼 봉사의 비유를 들어 비판했습니다. 외도들이 주장하는 열 가지 사상에 대하여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이여라며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들이 코끼리 만지기식이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일부만을 보았을 때

 

코끼리비유는 우다나에서만 보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눈먼봉사와 코끼리 비유를 든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는 진리의 일부만을 본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누군가 세상은 유한하다라 했을 때 한면만 본 것일뿐 전체를 보지 못함을 선천적으로 눈먼 장님이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외도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교의 유행자들은 눈이 멀었고 눈이 없어서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이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Ud.67)

 

 

외도들이 서로 입에 칼을 문 듯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은 진리의 전부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눈이 있어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어서 장님들처럼 코끼리 뒷다리, 앞다리, , 머리 만지기 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눈이 있는 자들이 보았을 때는 하나의 코미디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이 한쪽 관점만 본다면, 서로 말다툼을 벌이고 논쟁한다.” (Ud.68)라고 했습니다.

 

중관에서 이것이란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뿐입니다.”라 합니다. 때로 책상을 탕탕 치면서 이것뿐이라니까요.”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경전도 볼 필요도 없고 참선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 말 들을 필요도 없이 자신의 입만 바라 보라는 듯이 말합니다.

 

중관에서도 이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관에서 말하는 이것은 부정됩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큰방과 작은방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연기송에서 1구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 하는데 중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큰방 보다 더 큰방이 있듯이 무한소급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중론 1 관인연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결과가 발생할 때

이것을 조건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비연(非緣)이라고 하지 않겠느냐?”(1-5)

 

 

이 게송은 조건에 대한 관찰입니다. 그런데 중관에서는 연기적 조건마저 부정해 버립니다. 이것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저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 이것이 어떻게 조건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환멸연기로 유전연기를 부정

 

중관게송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연기송에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imasmi sati ida hoti. Imassuppādā ida uppajjati. Imasmi asati ida na hoti.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라고 분명히 말씀 했습니다. 그럼에도 중관게송을 보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는 말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잘못된 것일까? 김성철 교수는 항아리와 진흙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진흙은 항아리를 만들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진흙을 조건으로 항아리가 만들어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흙만 있을 뿐 아직 항아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진흙은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항아리라는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 진흙이 항아리의 재료가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원인이 규정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조건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작은 불을 지피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불이 붙기 전에는 장작은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세계에서는 원인으로 인하여 결과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인식의 세계에서는 결과 때문에 인식이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이 붙어야만 장작이었구나라고 인식됨을 말합니다. 따라서 중관에서는 결과가 없으면 원인도 아니다.”라 합니다. 이는 연기송에서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Imasmi asati ida na hoti: 若無此卽無彼)”라 하여 환멸연기의 논리로 유전연기를 부정합니다.

 

환멸연기는 중관논리 공식

 

환멸연기는 중관논리 공식으로 활용됩니다. 중론게송 450여 수 중에서 논리적 게송은 삼분의 일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은 환멸연기로 연기송의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imasmi sati ida hoti: 若有此卽有彼)라는 유전연기마저 부수어 버립니다. 중관에서는 환멸연기가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됩니다. 외도들이 말하는 세계는 영원하다.’ 등의 열 가지 사변논리는 모두 환멸연기로 논파됩니다.

 

사변적 견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 중론과 같은 게송은 보이지 않습니다. 맛지마니까야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M72)세상은 유한한가?’등의 열 가지 사변적 논리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열 가지 사변적 견해에 대하여 견해의 정글등으로 설명하고 올바로 깨닫게 하기 위한 것도,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M72)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백해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사변적 견해를 논파했을까? 중론에서 보는 것처럼 오로지 환멸연기 하나로만 논파했을까?

 

부처님은 사변적 견해에 대하여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접근방식은 중관에서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사변적 견해를 사라지게 하는 것에 대하여 모든 나를 만드는 것, 모든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을 부수는 것이라 했습니다. 오온이 무아인 것을 안다면 해탈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변적인 견해에 대한 논파입니다. 구체적으로 불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연기법으로 설명한 불의 비유

 

중관에서도 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불이 붙어야만 불이라는 것입니다. 불이 붙기 전에는 불이 아님을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라 하여 오로지 환멸연기 하나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연기의 유전문과 조건문 모두 할용하여 설명합니다.

 

부처님이 밧차곳따에게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르는가?”(M72)라고 묻습니다. 이에 밧차곳따는 그 불은 섶과 나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릅니다.”라 하여 연기송에서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 하여 조건발생적 연기로 설명합니다.

 

밧차곳따의 답변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연기의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으로 불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론에 따르면 불이 탄다라는 말은 의미중복이 되어 사실위배의 오류가 되어 성립되지 않습니다. 중론에서 유전연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중론에서는 오로지 환멸연기 하나만 성립됩니다.

 

불이 타면 꺼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불은 연료를 조건으로 타오르는데, 불이 꺼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이곳에서 동쪽이나 서쪽이나 북쪽이나 남쪽의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M72)라며 묻습니다. 이에 밧차는 그런 질문은 타당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불은 섶과 나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르고, 그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이 없으므로 꺼져버린다고 여깁니다.”라고 답변합니다.

 

불의 비유를 보면 유전연기와 환멸연기에 따른 것입니다. 존재와 비존재도 유전연기와 환멸연기로 설명됩니다. 이는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 유전연기로 허무주의가 논파되고, 환멸연기로 영원주의가 논파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유무중도는 용수가 중론에서 언급한 유무중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유무중도를 설명할 때 반드시 유전연기와 환멸연기로 연기법을 설합니다. 오로지 환멸연기 하나로 중도를 설명하는 중관과는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구부정(四句否定)

 

부처님은 밧차곳따에게 연기의 유전과 환멸로 불의 비유를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꺼진 불로 비유했습니다. 열반을 성취한 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오온으로 설명으로 설명합니다.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밧차여,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물질로써 여래를 묘사하려고 하지만, 여래에게 그 물질은 끊어졌습니다. 여래는 물질의 뿌리를 끊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밧차여, 참으로 여래는 물질이라고 여겨지는 것에서 해탈하여,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바닥을 알 수 없어 마치 커다란 바다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M72)

 

 

, , 치라는 땔감이 다하여 불이 꺼진 아라한에게 있어서 자아관념은 없습니다. 무아의 아라한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자아관념을 가진 자에게는 삶이 있고 죽음이 있어서 오온의 죽음과 함께 지은 업에 따라 재생하게 되지만, 자아관념이 파괴된 무아의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말은 아예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아 불사가 됩니다.

 

불사의 아라한은 불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온이 무아인 자에 대하여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란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M72)라고 말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구부정(四句否定)일 것입니다.

 

니까야와 중론의 중도사상은 어떻게 다른가?

 

용수의 중론은 팔불중도(八不中道)를 근본으로 합니다. 그런데 니까에세도 다양한 중도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언급되어 있는 중도를 보면, 유무중도 (有無中道, S12.15), 자타중도(自他中道, S12.17), 단상중도(斷常中道, S12.17), 일이중도(一異中道, S12.35), 고락중도(苦樂中道, S56.11), 오염중도(汚染中道, M3) 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연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도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표현됩니다.

 

용수의 팔불중도는 개념의 실체성 비판, 판단의 사실성 비판, 추론의 타성성비판으로 성립합니다. 또한 이른바 사구부정에 대해서는 연기송의 환멸론을 테크닉으로 활용합니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된 것에 대하여 분별이라 하는데 이는 실상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다고 부정됩니다. 명사가 아닌 동사로 표현된다면 어느 정도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늘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선사들은 분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법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설명했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대표적입니다. 이와 같이 분석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M99)라 하여 스스로 분별론자 (Vibhajjavādin)라 했습니다.

 

중관에서는 분별해서는 안됩니다. 머리를 굴려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분별망상하는 것이라 했고, 입만 벙긋하면 어긋난다고 하여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용수의 중론에 따른 중도사상은 연기의 환멸문 테크닉을 이용한 희론의 적멸에 바탕을 둔 것으로 단순하고 빈곤합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보는 부처님의 중도사상은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에 바탕을 둔 것으로 다양하고 풍요롭습니다.  

 

중론을 인생관으로 삼았을 때

 

중관에서는 희론의 적멸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오도송을 보면 개념타파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또한 선사들이 부처에 대하여 마른 똥막대기 등으로 표현한 것도 일종의 분별하게 하지 않기 위함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철저하게 분별을 요청합니다.

 

분별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중관학을 배울 때는 분별하지 말아야 하지만 현실로 돌아 올 때는 철저하게 분별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중관 또는 중론을 인생관으로 삼았을 때는 현실과 괴리가 발생하여 방향을 잃어 버릴 수 있음을 말합니다. 단지 테크닉에 불과한 중론을 인생관내지 사상의 체계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2018-10-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