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시간의 흐름에 배중률(排中律)을 적용하면, 김성철교수 중관학 강좌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30. 17:33

 

시간의 흐름에 배중률(排中律)을 적용하면, 김성철교수 중관학 강좌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가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라고 번역됩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마음 역시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왜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을까?

 

김성철교수의 중관학강좌를 유튜브로 보고 있습니다. 말이 빠르기 때문에 한번 들어서는 잘 이해 하지 못합니다. 여러 번 들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노트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노트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써 보는 것입니다. 김성철교수의 STB콜로키움 33 중관학 7에서 중론 제2관거래품의 시간에 대해서 요약해 보았습니다.

 

중론 중에 제일 짜릿한 게송

 

김성철교수는 제2관거래품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소개하면서 중론 중에 제일 짜릿한 게송입니다.”라 했습니다. 과연 어떤 내용이길래 짜릿하다는 것일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미 가버린 것에는 가는 것이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역시 가는 것이 없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것은 없다.”(2-1)

 



 

이 게송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현재의 마음에 대하여 얻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게송에서는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것은 없다.”라 했습니다.

 

이 게송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가고 옴은 외부 세계에 실재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라고 결론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분명히 가고 오는데 외부세계에 실재 하지 않는다니! 허깨비들이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시간의 흐름에 배중률(排中律)을 적용하면

 

김성철 교수는 현재심불가득에 대하여 배중률(排中律)로 설명합니다. 배중률은 principle of excluded middle’라 하여 논리학중의 하나입니다. 시간의 흐름에다 배중률을 적용하면 위와 같은 게송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배중률은 인터넷백과사전에 따르면 A B도 아니고, B가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없다.”라는 원리를 말하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3자 배척의 원리라고도 한다. 형식논리학 용어로서 어느 것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이 있는 경우,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고, 다른 하나가 참이면 하나는 거짓이라는 경우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적 제3자는 인정되지 않는 논리법칙을 말한다. 고전논리학에서는 배중률이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과 함께 논리학의 근본원리로 되어 있으나, 현대 기호논리학은 이를 공리(公理)로 인정하지 않고 공리에서 도출되는 하나의 정리(定理)로 보고 있을 뿐이다. 다치논리학(多値論理學)은 제3자 배척의 원리는 부정하지만, 다치논리학에서 사용되는 논리치(論理値) 1을 더한 배척의 원리는 인정한다. (배중률, principle of excluded middle, 排中律)

 

 

배중률은 3자 배척의 원리라 합니다. 이를 시간에 적용하면 가버린 것과 오지 않는 것만 있을 뿐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간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중론에 따르면 과거는 지나가 버려서 만날 수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만날 수 없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틈에 끼여서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틈이 없기 때문에

 

성현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기 때문에 항상 현재를 살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론에 따르면 이런 말은 여지 없이 무너집니다. 과거와 미래시간은 물론 현재의 시간도 없기 때문이라 합니다. 과거, 미래, 현재가 실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실재한다고 믿는 다는 것입니다.

 

용수의 중론에 따르면 과거, 미래, 현재는 외부 세계에 실재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생각 속에서만 있을 뿐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불을 예로 든다면, “이미 타버린 불은 타고 있지 않다. 아직 타고 있지 않은 불은 타고 있지 않다. 지금 타는 불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런가? 틈이 없기 때문이라 합니다. 따라서 ‘2-1’게송의 골격으로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움직임은 포착된다

 

중론의 논리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현재는 엄연히 있는 것이고 불은 타고 있고 소리는 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비 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를 논적(論敵)의 반박이라 합니다. 중론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움직임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있다.

[]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있는] 그 가운데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 있다.

그러므로 가고 있는 중인 것은 간다.”(2-2)

 

 

이미 지나간 것이나 오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금 움직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이동 했을 때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에 또 이렇게 반박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나눌 수 없음을 말합니다. 무한히 나누어지기 때문에 현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움직임은 포착됩니다. 대체 이 움직임은 무엇일까?

 

현재는 생각 속에 있다는데

 

현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론에서는 현재는 없다고 합니다. 있다면 생각속에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움직임은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미분으로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에 따른 일체유심조의 논증이라 합니다.

 

중관학에서는 세상을 무너뜨립니다. 아니 세상에 아무것도 없음을 폭로하는 것이 중관학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가 들리고 윤곽이 보입니다. 또 시간이 지나 가는 것이 보입니다. 대체 이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바깥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를 일체유심조라 합니다.

일체유심조의 논증

 

물체가 이동하면 동시에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빠르기가 보일 뿐입니다. 매순간 빠르기가 보입니다. 이를 속도라 합니다. 여기서 속도는 이동거리를 이동시간으로 나누는 것(v=s/t)입니다. 시속 60키로라 하면 이동거리를 이동시간으로 나눈 것입니다.

 

마음의 속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현재의 속도를 구할 때는 순간의 속도를 말합니다. 앞찰라와 뒷찰라의 길이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순간의 속도는 제로에 가까이 갈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제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시간이 제로가 된다면, 수학에서는 분모가 제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속도는 불능(v=s/0)’이거나 부정(v=0/0)’이 되어 버립니다.

 

속도에 대한 불능과 부정을 해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뉴턴이 발견한 미분입니다. 움직임을 수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간을 미세하게 나누면 시간은 제로에 수렴됩니다.

 

앞찰라와 뒷찰라의 거리를 제로로 수렴하는 시간으로 나누었을 때 미분이 됩니다. 이때 속도감(v)은 시간(t), 공간(s)과 다른 차원(등식의 좌변)에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움직임인 마음속에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체유심조의 논증입니다.

 

속도감에 대하여

 

유식학에 따르면 순간속도일 때 움직임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속에 있다고 봅니다. 시간과 거리는 물리 세계에 있어서 3차원 시공간 세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순간속도는 시공간과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그래서 속도를 마음속에 있다고 하여 속도감이라 합니다.

 

시속 60키로나 시속 100키로 등 시시각각 변하는 속도는 마음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앞찰라와 뒷찰라를 비교하여 의미를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빠르다거나 느리다고 합니다.

 

일체유심조는 빠르기(速度)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변화하는 것들에 대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를 혜능스님의 움직임에 대한 통찰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심동입니다. 기둥에 나부끼는 깃발()은 번동(幡動)도 아니고 풍동(風動)도 아니라 심동(心動)’이라는 것입니다.

 

주관적으로 보면 세상의 끝을 볼 수 있다

 

육근이 있습니다.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은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근(意根)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을 뿌리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경량부에서 말하는 마음발생이론이라 합니다.

 

마음이 발생하는 것은 육근이 육경을 인식할 때 가능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관적 시점을 말합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세상의 생겨남에 대한 경을 보면,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S35.107)라고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객관화 하거나 대상화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객관화 시켰을 때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마치 세상은 영원한가?’ 등으로 의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주관적으로 본다면 끝장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로히땃싸의 경에서 부처님은 세계의 끝을 걸어서는 도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 했습니다.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중관학은 수억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라 했습니다. 아무리 물리학이 발달해도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생각의 끝에 이르렀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끝은 외부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세계에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흑백논리 한계를 알면 세상의 한계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 있는 미분기계이다.”

 

안이비설신의에서 의근은 물질이 아니라 심법이라 합니다. 여기서 심법은 앞찰라의 육식이다.”라고 정의됩니다. 앞찰라의 여섯 가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의근입니다. 혜능의 심동이 이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모든 의미는 앞찰라와 뒷찰라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만일 앞찰라와 뒷찰라가 차이가 없다면 바위덩어리나 나무토막처럼 정신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체의 경우 앞찰라와 뒷찰라를 비교하여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심법인데, 이를 심동이라고 하기도 하고 속도감이라고 합니다.

 

속도감과 같은 마음의 작용에 대하여 러시아 불교학자 체르바스키(Stcherbatsky)사람은 누구나 살아 있는 미분기계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마음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 움직임을 파악하기 때문에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정의될 수 없다

 

금강경에서는 현재심불가득이라 하여 현재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금강경과 노파의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노파가 스님은 지금 점심을 드시려 하는데 과거심 불가들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늗데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 하시오.”라는 말입니다. 노파가 말한 점심(點心)마음에 점을 찍다라는 말입니다.

 

마음에 점을 찍을 수 없습니다. 어느 것이 현재의 마음인지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금강경에 실려 있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는 말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초기경전에 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언표형식의 경(Niruttipatha sutta)’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미 생겨났고 나타나 있는 의식은 있다라고 언표되고, ‘있다라고 표명되고, ‘있다라고 시설된다. 그것에 대하여 있었다라고 정의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라고도 정의되지 않는다.”(S22.62)

 

 

오온에서 의식에 대한 것으로 현재를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생겨났고 나타나 있는 의식은 현재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단지 언표, 즉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날 뿐 말로 정의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시간을 제로로 수렴하는 미분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하여 있었다라고 정의되지 않고, ‘있을 것이다라고도 정의되지 않는다.” (S22.62)라 했는데, 이는 현재를 말로 정의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현재라는 말은 정의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라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언표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나 미래의 오온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무작론자들마저 삼시(三時)를 구별한다

 

경에 따르면 우리들이 과거, 미래, 현재라고 이름 붙인 것인 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작론자들은 업과 업의 작용이라는 인과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커다란 마흔의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인과가 없다는 이론, 행위의 결과가 없다는 이론, 허무주의를 주장하는 자들”(M117)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무작론자들마저 과거, 미래, 현재라는 삼시(三時)를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결점 없는 언표의 형식

 

우리들이 삶을 살면서 과거, 미래, 현재 삼시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전찰라와 이후찰라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유식에서처럼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현상들은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혜능이 심동이라 하여 마음이 움직인다고 했지만 깃발이 움직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앞찰라와 후찰라의 차이에 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금강경에서는 현재가 없다고 하여 마음의 점을 찍을 수 없다고 합니다. 또 중론에서는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것은 없다.”(2-1)라 하여 현재는 없다고 합니다. 가버린 것과 오지 않는 것만 있을 뿐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미래, 현재는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현명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혼동하지 않는, 과거에도 혼동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혼동하지 않고, 미래에도 혼동하지 않게 될, 결점 없는 언표의 형식, 표명의 형식, 시설의 형식이 세 가지 있다.”(S22.62)

 

 

여기서 언표, 표명, 시설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오온에 대하여 과거, 미래, 현재로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있다든가 있을 것이다로 정의되지 않는 언어적 표현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부정한다면 무인론자, 무작론자, 허무론자일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누군가 모든 것은 공한 것이다라 모두 없다고 부정한다면 업의 작용을 부정한다면 외도라 볼 수 있습니다.

 

삼시(三時)에 대한 무작론자들의 딜레마

 

부처님은 과거, 미래, 현재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혼동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하여 결점 없는언표의 형식이라 했습니다. 삼시를 구분하는 것이 결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삼시구분은 과거의 부처님에 의해 거부 되지 않았고, 현재의 부처님에 의해 거부 되지 않고 미래의 부처님에 의해서도 거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거나 모든 것은 공하다하여 삼시를 부정한다면 인과를 부정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인과를 부정하는 무작론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 욱깔리 주민 밧싸와 방냐는 무인론자, 무작론자, 허무론자이다. 그들도 나의 언어의 형식, 명칭의 형식, 시설의 형식을 비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유감스러워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경멸당하고 비웃음을 당하고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S22.62)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자들은 삼시를 부정합니다. 과거, 미래, 현재가 없어져야 업의 작용이 부정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삼시를 설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삼시를 설했음에도 외도들이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만일 외도들이 부처님이 언표로 설한 삼시를 비난한다면 그들은 자가당착에 빠질 것입니다. 삼시를 인정하면 업과 업의 작용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자신들의 무작론이 부정될 것이고, 반대로 삼시를 부정하면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무인론자, 무작론자, 허무론자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경멸당하고 비웃음 당할 것이라 합니다.

 

현재를 철저하게 관찰하라고

 

현대인들은 초, 분을 다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공한 것이라 하여 과거의 마음도 없고, 미래의 마음도 없고, 현재의 마음도 없어서 오로지 생각속에만 있는 것이라 여긴다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고 세상은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수화풍 사대로 느끼는 현실이 있습니다. 현실은 엄격하게 인과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중관에서는 현재의 시간이나 공간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오로지 마음의 작용으로 봅니다. 깃발에 바람이 나부낌에도 마음이 움직이는 심동(心動)으로 봅니다.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여겼을 때 이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되고, 금강경의 대미를 장식하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하여 꿈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온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현재를 잡을 수 없다고 하여 현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맞지만 현재를 붙잡을 수 없다고 하여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것은 없다.”(2-1)라는 중론 게송에서처럼 현재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현재를 철저하게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29)

 

 

2018-10-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