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중도로 욕망의 비실재성 통찰한다,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8강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1. 2. 22:25

 

중도로 욕망의 비실재성 통찰한다,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8강

 

 

언젠가 소설을 읽었는데 끈적끈적한 욕망이라는 말이 와 닿았습니다. 소설가는 왜 끈적끈적 하다고 했을까? 아마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이렇게 표현 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욕망은 고통이라는 사실입니다. 욕망을 추구하며 살지만 항상 고통으로 귀결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욕망은 발생되는 것이고 욕망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조준호 선생의 인도이야기 여덟 번째는 욕망의 비실재성에 대한 불교적 통찰입니다.

 

욕망의 비실재성에 대한 불교적 통찰

 

이번 조준호선생의 인도이야기 큰 주제는 인도사상,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입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알아야 할 것은 욕망입니다. 111 8강에서는 논문욕망의 비실재성에 대한 불교적 통찰위주로 강연했습니다.

 

논문은 22페이지에 달하는 긴 길이의 역작입니다. 2009년도에 불교학연구 제24호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욕망의 발생과정에 대하여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문구 하나 하나가 소중해서 마치 경전을 대하는 것처럼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마치 욕망이란 무엇입니까?’에 대하여 이것이 욕망입니다.’라고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욕망을 욕망으로 끊을 수 있을까?

 

욕망은 대개 악하고 불건전하기 때문에 부정적입니다. 그럼에도 긍정적 욕망도 있습니다. 찬다(chanda)가 대표적입니다. 이때 찬다는 의욕으로 사용됩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말합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바라문의 경’(S51.15)에서는 의욕을 의욕으로서 끊는다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욕망을 욕망으로 끊을 수 있을까? 금주를 선언한 자가 술을 보면 유혹에 견디지못할 것입니다. 금연한 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독을 독으로 제독하듯이, 욕망을 욕망으로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면 다릅니다.

 

경에 따르면 아난다는 바라문에게 승원에 가고 싶은 의욕이 있더라도, 그 승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 때문에 생겨난 의욕은 소멸합니까?” (S51.15)라고 물어 봅니다. 마치 배고픈 자가 음식을 먹고 나면 진수성찬에 더 이상 미련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기 의욕도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면 더 이상 성취하려는 의욕이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렇게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예전에 거룩한 경지를 성취하기 위한 의욕이 있었더라도 거룩한 님이 되면 거기에서 유래한 의욕은 소멸되며, 그에게 예전에 거룩한 지위를 성취하기 위한 정진이 있었더라도 거룩한 님이 되면 거기에서 유래한 정진은 소멸되며, 그에게 예전에 거룩한 지위를 성취하기 위한 마음이 있었더라도 거룩한 님이 되면 거기에서 유래한 마음은 소멸되며, 그에게 예전에 거룩한 지위를 성취하기 위한 탐구가 있었더라도 거룩한 님이 되면 거기에서 유래한 탐구는 소멸됩니다.”(S51.15)

 



 

아난다는 바라문에게 의욕, 정진, 마음, 탐구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요소들은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한 일종의 뗏목과 같은 것입니다. 욕망은 버려야 할 악하고 불건전한 것(akusala)이긴 하지만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와 같은 것입니다. 마치 독을 독으로 제독하듯이, 작은 번뇌로 큰번뇌를 물리치는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화두를 들어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욕망은 선천적 잠재성향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과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욕망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욕망은 탐, , 치 중의 하나로서 모든 번뇌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욕계(欲界)’라 하고 욕망으로 태어난 자들이라 하여 욕생(欲生)’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욕망은 뿌리가 깊습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선생은 논문에서 아누사야(anusaya)로 설명합니다. 이를 수면(隨眠)이라 번역했습니다. 잠재성향을 말합니다.

 

갓난아기는 천진난만 합니다. 그래서일까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어린 아이 마음을 닮고자 천진불(天眞佛)’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 말룽끼야뿟따의 경’(M64)에 따르면 천진불사상은 외도사상입니다. 왜 그럴까?

 

외도들은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장애가 내부적으로 없다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장애는 잠복해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면서 점차 드러나기 시작해서 사춘기가 되면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모습은 찾아 보기 힘듭니다. 그래서일까 중2가 가장 무섭다고 합니다. 성욕이라는 욕망이 일어나면 잠재성향이 드러나게 되는데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로 인하여 죄업을 짓기 쉽습니다.

 

 

탐욕이라는 잠재성향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외도들은 번뇌가 사람을 공격할 때만 묶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접촉할 때만 번뇌가 일어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조준호선생은 논문에서 욕망이 이미 선천적 경향성이라 했습니다. 욕망이라는 번뇌가 잠재 되어 있기 때문에 욕계에서 욕계중생으로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번뇌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중도로 욕망의 비실재성 통찰

 

욕망은 접촉할 때마다 일어납니다. 그러나 접촉하기 전에 이미 잠재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욕망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치 금연한 자가 담배를 보면 흡연 욕구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전에 행위에 대한 과보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욕망의 기원에 대하여 조준호선생은 자타중도(自他中道)로 설명했습니다.

 

욕망은 번뇌로서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됩니다. 상윳따니까야 아쩰라 깟싸빠의 경’(S12.17)에서 괴로움에 대하여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외도 깟싸빠가 부처님에게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라고 물어 봅니다. 이에 부초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어서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합니까?”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라며 묻습니다. 그때 마다 부처님은 깟싸빠여, 그렇지 않습니다.”라 하여 모두 부정합니다. 중론식으로 말하면 사구부정입니다.

 

부처님은 외도 깟싸빠에게 행위 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로 설명해줍니다. 그래서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 하다면 이는 영원주의 견해와 같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다르다면 허무주의견해라 했습니다. 그러나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구모두 연기법으로 부정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라며 연기의 유전문과 연기의 환멸문을 설합니다. 이를 자타중도(自他中道)라 합니다.

 

조준호선생에 따르면 욕망의 비실재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자타중도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것은 조건적으로 연기되어 있어서 자작, 타작, 자타작, 비자비타무인작 이렇게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성립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는 중론에서 말하는 사구부정과 같습니다. 중론에서 사구부정할 때는 환멸연기 하나의 기법으로 말의 논리를 부수는 것이지만,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법은 유전연기와 환멸연기 모두 사용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중론에서 말하는 중도와 부처님이 설하신 중도는 다른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중도는 단상중도, 유무중도, 일이중도, 자타중도, 고락중도, 오염중도 등 매우 다양합니다. 공통적으로 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떠한 것도 독립된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욕망도 당연히 실체가 없습니다. 괴로움도 실체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조건적 계기로 존재합니다.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할 뿐입니다.

 

양 손바닥을 부딪치면 소리가 나듯이

 

조준호선생은 욕망의 비실재성에 대하여 불교는 욕망과 관련한 존재 문제를 통찰한 철학체계이다.”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욕망의 기원과 과정을 밝히고 이를 극복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결국 불교에 의하면 욕망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깊은 뿌리를 가진 존재의 잠재적 성향이다. (欲生)으로 와서 쉬지 않고 욕계(欲界)를 구성해내다가 다시 욕생으로 간다. 하지만 욕망은 나라는 주체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상세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주체와 대상세계 등과의 상호교섭[]속에 일어난다. 마치 양 손바닥을 부딪치면 소리가 나듯이. 때문에 욕망은 올 때 오는 것이 있을 수 없고 갈 때도 가는 곳이 있을 수 없다. 왜 욕망의 끝이 허망할 수밖에 없는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욕망은 끝없이 자기소모적이다. 다시 허망함을 채우기 위해서 욕망 행위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마치 바다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생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바닷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래서 괴롭다[一切皆苦]. 그리고 욕망이 극복되어야만 또한 여기에 있다.”

 

욕계중생은 욕망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욕망은 이미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욕망을 뿌리로 하여 태어난 중생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욕망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인간이나 축생이나 먹는 것과 번식하는 것에 충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갈증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괴로운 것이라 했습니다.

 

허망한 것에 목숨 걸었을 때

 

부처님은 욕망에서 벗어나라고 했습니다. 이는 선정 정형구에서 그 수행승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D1)과 같은 정형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욕망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욕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선정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초기경전 가르침으로 욕망의 발생구조와 본질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욕망의 발생구조와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욕망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가르침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욕망은 무상한 것으로 실체가 없고 또한 비실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허망한 것에 목숨 걸었을 때 남는 것은 괴로움뿐이라는 사실입니다.

 

 

2018-11-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