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의 행복에 대하여, 조준호선생의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10강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머물러 있을 때 이것을 행복한 삶이라 합니다. 조준호선생의 불교강좌 ‘인도불교,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강연에서 강조한 것입니다.
가을 한철을 기룬에서
조준호선생의 강연이 마침내 회향되었습니다. 지난 2018년 9월 6일부터 문화살롱기룬에서 매주 목요일 열렸습니다. 열번째 강좌가 2018년 11월 15일에 열림으로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열번 모두 참석하여 완주했습니다. 그리고 강연이 끝날 때마다 후기를 작성했습니다. 이번 후기는 열번째입니다.
가을 한철을 조준호선생의 강좌와 함께 보냈습니다. 매주 목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장충동에 있는 문화살롱 기룬으로 향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숫자가 너무 적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숫자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배움의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두번 또는 두세번 빠지고 끝까지 참석한 사람은 이혜숙, 허태곤, 유병화, 박태동, 김용호, 신성기 선생과 동출스님입니다. 이번 조준호선생의 강연은 불교아카데미가 주최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가 주관하고 NRF한국연구단이 후원했습니다.
유병화선생의 대중공양
마지막 강연회날에 자유롭게 보내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매번 두시간 동안 강연만 듣는 것에서 변화를 주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강연날에는 짧게 이야기하고 밖에 나가 식사하는 것이 어떻느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병화선생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습니다. 먹거리를 준비해 와서 함께 공양하자고 했습니다. 일종의 대중공양입니다. 이에 모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합니다. 포만감이 있는 상태에서 여유롭게 구경하는 것이 좋음을 말합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저녁 일곱시 강연을 듣다 보면 밥먹을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기룬에서는 빵과 과자 음료 같은 간단한 먹거리를 준비했습니다. 간단히 때우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강연에서는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사찰음식전문가 유병화선생은 집에서 음식을 준비 해 왔습니다. 밥과 반찬, 그리고 그릇 등을 한보따리 가져 왔는데 무게가 상당히 나갑니다. 이것을 전철로 운반했다고 합니다. 강연이 시작 되기 전에 펼쳐 놓았는데 훌륭한 식단이 되었습니다.
식단을 보면 모두 채식입니다. 오신채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화학조미료도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풍성하게 보이는 것은 민들레입니다. 이날 행사를 위하여 참사람의 향기 서산법당 농장에서 손수 따온 것이라 합니다. 이밖에도 오래 묵어 숙성된 장아찌와 백김치, 야채튀김도 있습니다. 여섯 접시에 반찬종류만 해도 열가지 가량됩니다. 여기에 맑은 무우국과 콩이 들어간 잡곡밥까지 있어서 그야말로 풍성한 웰빙식단이 되었습니다.
왜 음식절제 해야 하는가
조준호선생의 인도불교강연 주제는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입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줄일 수가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욕망을 줄이면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될 것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밥먹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탐욕으로 먹고 분노로 먹습니다. 그러다보니 육류와 주류가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채식으로만, 그것도 자극이 없는 음식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몸이 청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음식절제는 중요합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괴로운 느낌이 적어지고 목숨을 보존하며 더디 늙어가리.”(S3.13)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숫따니빠따에서는“배를 가득 채우지 말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적게 하고 탐욕을 일으키지 마십시요.”(Stn.707)라 했습니다. 법구경에서는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Dhp7)라 했습니다. 음식에 적당량을 알고 음식을 절제 하는 것은 욕망을 감소하기 위한 수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욕망을 넘어 행복으로
오신채가 없는 청정한 음식을 먹고 마지막 강연에 임했습니다. 평소와 달리 긴탁자에서 진행했습니다. 조준호선생은 이날도 어김 없이 프린트물을 준비해왔습니다. 이제까지 10회 강연하면서 주로 이전에 썼던 두툼한 논문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20여페이지에 달하는 욕망과 행복에 대한 것입니다.
욕망과 행복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욕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불행해지고, 반대로 욕망을 소멸하는 삶을 살면 행복해짐을 말합니다. 이런 욕망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습니다. 찬다(chanda)와 같은 열의를 말합니다. 선정에 몰두하는 것도 깨달음을 지향하는 것도 열의와 같은 욕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욕망은 탐욕이나 갈애와 같이 부정적인 것입니다.
이번 열번째 강연에서는 주로 선정의 행복과 열반의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강연제목이 말해주듯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욕망을 넘었을 때 그에 대한 보상으로 행복이 자연스럽게 따라옴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선생은 ‘요가, 삼매의 깨달음’이라는 약20페이지 달하는 긴논문을 소개 했습니다. 부제는 ‘초기불교에 나타난 행복감과 차제적 고양단계’입니다. 2016년 12월 30일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불교학보 77집에 실린 것입니다.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강연을 통하여 조준호선생의 욕망과 행복에 대한 장문의 논문을 접했습니다. 주옥과 같은 논문을 접한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 봅니다. 아직까지 이런 글을 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이 정리가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이 짜 맞추어지는 듯합니다. 그래서 밑줄을 치고 형광메모리펜으로 강조하고 전철에서도 보았습니다. 여러 번 읽음으로 인하여 나의 것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십여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다 소개할 수 없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책으로 나올 것이라 합니다. 이제까지 욕망과 행복이라는 주제로 쓴 여러 편의 논문을 한데 모아 조만간 책으로 출간할 것이라 합니다.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희소식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
논문 ‘초기불교에 나타난 행복감과 차제적 고양단계’을 보면 서론과 결론에 대강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실려 있습니다. 삼매와 깨달음과 관련하여 초기경전과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행복감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입니다. 결론에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에 대한 것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정은 소멸구조로서 괴로움의 조건을 차례로 환멸해가는 구조이다. 색계선정이든 무색계선정이든 선정의 전반이 모두 환멸의 행복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정단계가 올라갈수록 행복감의 수준과 질이 고양된다. 이러한 선정의 행복단계는 마찬가지로 욕망의 문제와 관련하여 삼계라는 존재의 위계가 설명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선정으로 인한 행복은 현법락주(現法樂住: diṭṭhadhamma sukha vihāra), 즉 ‘지금 여기라는 현전성(現前性: diṭṭhadhamma)’의 확립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초기불교의 선정은 본래 행복단계의 수준을 고양시켜 나가는 실천철학이라 할 수 있다. 거꾸로 불교에서 설명하는 행복감의 고양단계에 대한 설명체계는 그대로 불교의 선정 체계에 대한 설명체계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조준호, 초기불교에 나타난 행복감의 차제적 고양단계)
결론부의 핵심단어는 현법락주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말합니다. 행복은 저멀리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척단신의 이몸과 마음에 있음을 말합니다.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가도 세상의 끝은 볼 수 없지만 이몸과 마음안에서는 끝장을 볼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이라 했습니다.
환멸적 차제로 설명된 행복
결론부위의 키워드는 ‘환멸구조’와 ‘현법락주(現法樂住)’가 키워드입니다. 환멸구조와 관련하여 행복도 환멸구조로 설명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마치 십이연기에서 괴로움이 환멸연기로 소멸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선정단계에서도 오욕, 사유, 숙고, 희열 등의 법이 환멸적으로 소멸되어 궁극적으로 지각과 느낌도 소멸되어서 열반이라는 최상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에 대한 환멸적 구조의 시작은 접촉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삼사화합촉이라 하여 접촉이 발생하면 그에 따라 느낌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로 전개되는 길이고, 또 하나는 느낌을 조건으로 지각이 전개되는 길입니다. 전자는 십이연기의 길이고, 후자는 번뇌망상의 길입니다. 모두 괴로움을 야기하는 유전문입니다.
논문에서는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것과 관련하여 선정에서 환멸적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십이연기에서 환멸연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맛지마니까야 ‘마두삔디까경’(M18)에서는 삼사화합촉에 따른 분별망상(papañca saññā saṅkha)이 일어나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를 옮겨 보면 “눈과 대상을 조건으로 안식이 일어나고 이들 세 가지 화합을 촉(觸)이 일어난다. 다시 촉에서 受가 일어난다. 그는 수에 대한 상(想)이 일어나고, 상이 일어난 것에 심(尋)이 일어나며, 심이 일어난 것에 망상이 일어나고, 망상을 연유하여 사람에게 과거-미래-현재에 눈으로 인식되는 대상과 함께 분별망상이 일어난다.”(M18)로 설명됩니다. 즉 촉-수-상-심-망상-분별망상순으로 전개됩니다. 분별망상은 괴로움을 야기합니다. 분별망상이 일어나는 순서와 역순이 선정에 있어서 환멸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 (S41.6)을 들 수 있습니다.
‘까마부의 경’에 따르면 두 번째 선정에서는 사유(vitakka)와 숙고(vicāra)가 소멸되는데 이는 ‘언어적 형성의 소멸’과 관련 있고, 네 번째 선정에서는 호흡(āṇāpana)이 소멸되는데 이는 ‘신체적 형성의 소멸’과 관련이 있고, 마지막으로 상수멸정에서는 느낌(vedanā)과 지각(saññā)이 소멸되는데 이는 정신적 형성의 소멸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차제는 선정단계와 일치합니다.
아홉 가지 선정은 모두 행복이다
상수멸정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지각과 느낌이 소멸되었음에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열반의 행복에 대한 경’ (A9.34)을 보면 싸리뿟따가 우다인의 질문에 대하여 “벗이여, 바로 거기에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답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초선부터 상수멸정에 이르기까지 선정 전단계가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네 번째 선정에 대하여 행복은 없고 평온만 있을 뿐이라 합니다. 이는네 번째 선정에서 “행복과 고통이 버려지고”라는 정형구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 이상 선정에서 행복은 없다고 합니다. 설령 네 번째 선정에서 행복이 버려지고라 했지만 이는 ‘상대적 행복감이 그친 상태’로 설명됩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아홉 가지 선정은 모두 행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 선정에 대하여 사념청정으로 설명됩니다. 세 번째 선정의 행복마저 사라져 평온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도 사띠가 있는 지극히 청정한 상태입니다. 행복이 사라졌다고 해서 행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수행승들의 경’(S36.20)에 따르면 아홉 가지 선정단계가 모두 행복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네 번째 선정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뭇삶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S36.20)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정형구는 아홉 가지 선정에 공통으로 적용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선정이든지 선정 그 자체는 행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왜 열반을 최상의 행복이라 하는가
행복의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오욕에 따른 행복도 행복이고 선정의 행복도 행복입니다. 설령 상수멸정에서 정신적 형성의 소멸에 이르러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행복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 (A9.34)라 했는데, 이말은 법구경에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는 말과 일치합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즉 마음이 없는 상태도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최상의 행복 또는 궁극적 행복이라 하여 ‘빠라마수카(paramaṃ sukha)’라 합니다. 이렇게 행복에도 위계가 있는 것입니다.
조준호선생은 논문의 결론에서‘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강조합니다. 이말은 빠알리어 ‘diṭṭhadhamma’를 번역한 말로 한역으로는 현법(現法)이라 하고, 영어로는 ‘Here and Now’라 합니다. 딧따담마라는 말은 초기경전에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S1.10)라는 게송에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딧따담마라는 말은 현세(現世)라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열반은 죽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몸과 마음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이룰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현법열반 또는 현세열반이라 합니다.
아라한의 삶에 대하여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입니다. 열반은 죽어서 성취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성취되는 것이라 합니다. 지금 여기는 현세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런데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 합니다. 이것 이상 행복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의 삶은 어떤 것일까?
조준호선생은 열번째 강연에서 보조사상 52집에 실릴 논문의 일부를 소개 했습니다. 그것은 ‘초기불교의 궁극적 행복과 이상적 인간’이라는 주제의 논문입니다. 논문 요약에 따르면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 했습니다. 최상의 행복을 성취한 아라한은 당연히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아라한에 대하여 완전한 경지라 했습니다. 번뇌에 대하여 어떤 흔들림도 없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조준호선생은 ‘불가역적(不可逆的)’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아라한의 삶의 방식은 어떤 것일까? 조준호선생은 논문에서 희로애락을 초월한 인격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아라한이 화를 내거나 괴로운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깨달았다고 하는 자가 화를 내거나 탐욕을 부린다면 그는 더 이상 깨달은 자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스님은 제자들을 훈육하기 위하여 ‘자비의 분노’라는 이름으로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순간 번뇌에 지배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라한은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에 대하여 “완벽하게 감정, 생각, 그리고 의지를 통제하여 번민하지 않은 인격으로 그려진다. 늘 선정의 진중한 침묵과 존재의 심연에 맞닿은 깊은 시선, 한없는 자비 그리고 한결 같은 초연함 등으로 열반성취자의 삶의 방식은 그려진다.”라 했습니다.
아라한은 이상적인 인간상입니다. 욕망하는 사람들과 결코 섞일 수 없는 차가움과 냉정함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욕망의 세상으로부터 떠나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살아가는 모습은 아닙니다. 항상 중생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는 탁발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선언에서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S4.5)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보살행입니다.
아라한의 삶에 대하여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사라진 자입니다. 화를 낼 수도 없고 탐욕을 부릴 수도 없습니다. 더 이상 집착할 수 없는 삶입니다. 항상 행복한 상태의 아라한은 모든 심리적 질병을 극복한 자입니다. 이런 아라한에게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4)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 (Thag.654)
이와 같은 두 게송이 아라한의 인생관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라한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죽음에서도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불사라 합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집착으로 인하여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온에 집착하는 한 늙고 병들어 죽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아라한은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도 환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일꾼이 월급을 기다리듯 때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때’는 완전한 열반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법문집을 보면 아라한에 대하여 “고용된 사람이 그저 월급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죽음이 올날만을 기디린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에게는 죽고자 하는 욕구마저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바라는 것이 한가지 있다면 완전한 열반일 것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심심하거나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654번 게송에서와 같이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라는 문구로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아라한에게 있어서는 늘 사띠가 유지 되고 있는 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늘 지금 현재를 살고 있다면 영원히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사(不死)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불사는 불생(不生)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열반에 대하여 불생불사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꺼진 불로 묘사합니다. 탐, 진, 치라는 연료가 모두 소진 되었을 때 불이 꺼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늘 사띠를 유지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리의 길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십회 강연이 모두 끝났습니다. 가을 한철을 장충동 문화살롱 기룬에 매주 목요일 가는 것으로 보냈습니다. 개근을 했고 모두 후기를 남겼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초기불교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느 정도 정리 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한불교학자의 치열한 연구에 따른 결과라 봅니다.
가을 한철 강연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숫자가 얼마 되지 않음에도 주어진 두시간이 금방 흘러갈 정도로 몰입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녁 있는 삶을 즐길 때 소수의 사람들은 진리와 함께 했습니다. 대부분 불교에 대하여 아는 시니어들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길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 금이 아닙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양서는 아닙니다. 유명하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은 아닙니다. 주변을 잘 살펴 보면 훌륭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을 한철 이런 배움의 기회를 주신 조준호선생에게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2018-11-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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