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인간을 실존적 존재라고 하는데, 날로 먹는 실존주의

담마다사 이병욱 2020. 2. 21. 17:29

 

인간을 실존적 존재라고 하는데, 날로 먹는 실존주의

 

 

초기경전을 보면 용어에 대한 궁금증을 말하는 것이 있다. 경에서 벗이여, 지각, 지각이라고 하는데, 벗이여, 어떻게 지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M43)라고 말하는 식이다. 여기서 지각은 오온 중의 하나로서 빠알리어로 산냐(saññā)를 말한다. 이러한 용어는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지각은 개념적인 파악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기에 책상이 있다면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지각은 외부 대상을 지향함에 따라 발생한다. 경에서는 여섯 가지 지각이 있다. 명칭지어진 형상에 대한 지각, 소리에 대한 지각, 맛에 대한 지각, 감촉에 대한 지각, 사실에 대한 지각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각주나 주석을 보지 않으면 알아내기 힘들다. 모든 용어가 그렇다. 특히 철학용어가 그렇다.

 

날로 먹는 실존주의

 

어떤이는 실존이라는 말을 즐겨쓴다. 이럴 때 자꾸 실존, 실존이라고 말하는데, 실존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며 물어보고 싶어 진다. 물론 인터넷포탈에서 검색하여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마치 고상하고 고급스런 용어처럼 보이는 실존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요즘 유튜브에서 5분뚝딱철학을 즐겨 보고 있다. 김필영선생이 진행하는 일종의 철학개요에 대한 것이다. 선생은 날로 먹는다라는 말을 했다. 본래 철학은 어려운 것인데 유튜브에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도표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림이나 사진을 곁들이고 음성효과까지 가미한다. 그래서 8분가량 보고 있으면 개념이 잡힌다. 그래서 날로 먹는다고 했을 것이다.

 

실존이란 무엇일까? 날로먹는 강의에 따르면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자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거기서부터 가치가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치는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가치라고 했다. 이것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라고 했다.

 

인간에게 본질은 있을까?

 

사르트르 실존주의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자라고 했다. 그냥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피투성(被投性: Thrownness)이라고 한다. 인간이 태어난 목적이나 기능, 가치 이런 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냥 실존하는 존재자라는 것이다.

 

실존과 함께 쓰이는 말이 본질이다. 그렇다면 실존과 본질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김필영선생에 따르면 실존이라는 말과 본질이라는 말만 알면 사르트르 철학의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본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의자를 예로 들어 볼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의자가 있다. 모양도 다르고 색깔도 다른 의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모두 의자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의자가 된다. 의자의 본질은 사람이 앉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본질이라는 말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나 목적을 말한다. 의자의 본질은 앉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의자가 존재하는 이유나 목적이 될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본질이 있다. 신발의 본질은 발을 보호하는 것이고, 우산의 본질은 비를 피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인간도 본질이 있을까? 인간을 자세히 보면 모두 다르다. 인종이 다르면 피부색깔도 다르고 생긴모습도 다르다. 그럼에도 모두 인간이라고 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유할 수 있는 동물이다. 인간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유의 능력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유할 수 없어도 인간인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인간한테는 본질이 없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존재하는 이유, 목적, 기능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여기 누구 태어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태어난 사람 있나요?”라고 묻는다. 그냥 태어나지는 것이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냥 태어났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자라는 것이다. 이를 앞서 언급된 피투성이라고 한다. 이처럼 인간은 실존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자유는 있지만

 

사르트로 철학에 따르면 본질과 실존은 다른 것이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실존적 존재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라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주어진 역할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런 제약도 없어서 완벽한 자유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어떤 주어진 사명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도 그것은 내 자유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방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말했다. 이는 선택으로 설명된다.

 

인간은 매순간 선택에 직면해 있다. 오늘 점심때 무엇을 먹을지 자유이다. 그런데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는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확장하면 결혼을 해야 할지, 직장생활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선택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것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선택은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선택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한테 주어진 기능이나 목적이 없으니까 정답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안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불안한 것은 정답이 없는 문제지를 받은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불안을 피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자기기만을 말한다. 자기자신을 속이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마치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샐러리맨이 마치 샐러리맨이 천직인 것처럼 일하는 것도 해당된다. 마치 자신에게 이것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자기를 스로 속이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직장에서 10, 20, 30년을 넘어 정년때까지 버티는 것도 일종의 자기기만에 해당될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선택은 어려운 것이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답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했다. 사실은 모든 것이 다 정답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나한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했을 때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년까지 버티는 것도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지금 내가 선택한 것은

 

사람들은 자유를 꿈꾼다. 이렇게 자영업자로 살면서 글을 쓰는 것도 선택이다.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면 가치 있는 일이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선택한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이는 욕망과도 관련이 있다. 나의 욕망에 따른 선택이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또한 내가 해야 할일을 하겠다고 하면, 나의 의무가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거기에서 가치가 생겨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다 정답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매순간 선택을 한다. 또 매일 선택을 한다. 그러면서 미래로 나아간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안하기는 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하면서 자신을 계속 미래로 던진다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인간을 기투(企投)하는 존재라고 한다.

 

기투는 자신을 던지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기투란 인간이 현재를 넘어서 미래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던지는 실존의 방식이라고 한다. 다만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선택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매순간 선택해야 한다. 그럼에도 머뭇하거나 남에게 물어 본다면 이는 선택에 따른 책임을 조금이라도 전가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는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답인양 행동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마음대로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의 선택은 인간의 보편적인 선택이기 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만든 가치는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가치가 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 앙가주망이라고 한다. 영어로 Engagement라고 하는데 구속, 제약, 계약의 뜻이다.

 

앙가주망은 정치나 사회문제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사회적 책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막행막식하며 살 수 없다. 나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적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는 상호의존적 연기에 따르면 나의 선택은 상대방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선택은 자유이다. 다만 선택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 초기경전에서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본다.”(D2.40)라는 문구가 생각난다.

 

실존적 존재라고 하는데

 

유튜브에서 본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날로 먹는 것이나 다름 없다. 어려운 철학이론을 도표화 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지식인이 우리는 실존적 존재이다.”라고 말했을 때 도대체 실존적 존재라는 말이 몹시 궁금했는데 불과 8분에 지나지 않는 유튜브동영상을 보았을 때 개념이 잡혔다. 그래서 날로 먹는다고했다.

 

우리는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로서 우리가 어떤 것을 해도 자유이고, 그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거기서 가치가 나온다는 것, 그리고 그 그 가치는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가치라는 것, 이것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라고 한다. 앞으로 누군가 우리는 실존적 존재라고 했을 때 이제 그 뜻을 알만하다.

 

 

2020-02-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