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회

달동네가 아닌 산동네인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20. 3. 22. 12:18

 

달동네가 아닌 산동네인 이유

 

 

흔히 구라 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구라는 거짓말의 뜻이다. 사전에서는 거짓말의 속된말이라고 했다. 저속한 말이고 비속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구라라는 이름을 가진 연예인도 있다. 개그맨은 말로서 웃기는데 이름의 이미지가 있어서일까 거짓말이라는 선입견이 앞선다.

 

작가중에서도 구라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작가 황석영을 말한다. 황석영작가는 자신을 황구라라고 소개했다. 유튜브에서 본 것이다. 유튜브 서핑을 하다가 ‘[GMC풀강연] 어떤 이야기가 살아남는가-황석영라는 타이틀을 가진 영상물이 걸려든 것이다,

 

유튜브에서 황석영작가는 황구라가 된 사연을 말했다. 소설 장길산을 연재할 때라고 한다. 소설은 장장 10년 연재되었다고 한다. 연재가 길어지자 언제 끝날지 몰라서 기자들이 황구라는 별명을 불러 주었다는 것이다. 말을 잘해서 황구라가 된 것이 아니라 연재가 길어져서 황구라가 되었음을 말했다.

 

작가는 황구라가 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이미지관리하는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대중강연에서 자신의 별명을 소개할 정도이다. 보통사람들과 다른 그릇임을 알 수 있다. 어떤 것도 담아 낼 수 있는 큰 그릇을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감이라 볼 수 있다. 구라라는 말을 듣는 것에 게의치 않는 통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황석영작가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GMC강에서는 45분 강연했는데 금방지나간 것 같다. 막 시작하려는데 끝난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황석영작가는 소설도 잘 쓰지만 말을 잘해서 황구라고 하는 것 같다.

 

전태일 다큐를 모티브로

 

유튜브에서 황석영작가의 GMC강연을 듣고 메모해 두었다. 기록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국 같은 말을 그냥 놓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강연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작가는 먼저 전태일에 대하여 얘기했다. 최근 소설을 썼는데 전태일에 대한 다큐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전태일다큐에서 감명 깊게 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전태일을 고용했던 사장의 인터뷰를 보고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태일다큐에서 사장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처음에 미싱 한두대로 시작했으나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여러 대가 되어서 사람들을 고용했는데 그 중에 전태일도 있었다고 한다.

 

전태일은 노동의 열악함과 빈곤한 삶에 대하여 고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분신으로 모순과 위선을 고발한 것이다. 그런데 전태일을 고용한 사장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터뷰 도중에 그렇게 형편이 어려운 줄 알았으면 도와 주었을텐데.”라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태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어린 나이에 분신한 노동자로 알고 있는 것이다. 검색해 보니 1970년의 일이다. 그의 나이 22세때 죽은 것이다. 초등학교를 4학년에 중퇴하고 17세 때부터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한 것으로 되어 있다.

 

황석영 작가는 전태일다큐를 보고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고 했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전태일의 분신에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으나 전태일의 사장 인터뷰를 보고서 두 개의 포커스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장의 입장에서 본 것에 댓하여 자본주의의 회한이라고 말했다. 전태일의 죽음도 중요하지만 사장의 회한도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함을 말한다. 그래서 사장의 인터뷰를 보고 이를 모티브로 삼아 쓴 소설이 해질 무렵이라고 했다.

 

소설 해질 무렵

 

소설 해질 무렵은 어떤 내용일까? 황석영작가는 산동네이야기라고 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60대 초반이라고 했다. 흔히 말하는 베이붐세대이다. 또 산업화세대라고도 했다.

 

소설 해질 무렵2015년에 출간되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한국전쟁이 막 끝나고 시작된 베이붐세대 선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마 1953년에서 1955년생 사이일 것이다. 그렇다고 황석영 작가의 나이와 같은 것은 아니다. 강연에서 작가는 자신의 나이가 74세라고 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60대초반 주인공은 산동네출신이다. 주인공은 가난한 동네를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건축사업을 하여 성공했다. 그리고 출세도 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산동네를 벗어난 것이다.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이 살던 산동네를 가게 되었다. 놀랍게도 산동네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당시에 소녀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여전히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녀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산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에서는 할머니 이외에 20대 알바하는 여성도 등장한다. 또 할머니의 아들도 등장한다. 할머니의 아들은 비정규직이라고 했다. 소설에서는 동반자살과 고독사도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고독사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다 이런 세상에 살다가 내 자식들에게 넘겨 주게 되었는지 우리가 뭔 잘못을 했는지.”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했다.

 

소설을 읽어 보지 않았다. 확석영작가로부터 대충 스토리를 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크게 공감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산동네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산동네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나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일지 모른다.

 

산동네에서 살았는데

 

어렸을 적에 산동네에서 살았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을 산동네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고등학교 6년동안 산 것이다. 그 중에서도 초등학교 시절 3학년때 본 산동네는 난민촌 같았다. 공동화장실이 있었고 공동우물을 사용하던 시절이다. 급수차가 오면 줄을 서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때가 1969년도의 일이다.

 

유년시절은 시골에서 자랐다. 서울로 오게 된 것은 가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비가 오지 않아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이다. 어느 해 여름 밤에 저 멀리 산등성이에 불이 오르는 것을 보고서 마을 어른들이 기우제 지낸다고 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가뭄이 있었다. 지금 알아 보니 1966년과 1967년 두 해에 걸쳐 영호남지역에 가뭄이 극심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더 이상 농사지어먹고 살 수가 없어서 고향을 떠났다. 마치 남부여대하고 피난열차를 탄 것과 같다.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60년대는 서울이 급팽창하던 시절이다. 탈농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절이기도 하다. 마치 유럽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미국이민선을 타듯이, 농사만 지어먹고 살던 사람들이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서울로 간 것이다.

 

이농민들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서울변두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리잡은 곳이 삼양동산동네이다. 그때 당시 사람들은 산동네에 산다고 하여 산동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TV드라마에서는 달동네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때 당시 달동네라는 말은 없었다.

 

달동네가 아닌 산동네인 이유

 

산동네는 모든 것이 열악했다. 수도도 화장실도 없었다. 동네 가운데 우물이 있어서 길러 먹었다. 급수차가 오면 길 줄이 형성되었다. 물지게를 지고 져나르기도 했다. 동네 가운데 화장실이 있었다. 공동화장실을 말한다. 지금도 기억 나는 것은 낙서이다. 화장실에는 온갖 낙서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보기에 민망한 것이 많았다.

 

농촌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사투리 때문에 말 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갑자기 환경이 변하게 되자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유년시절 달밤에 동무들과 놀던 기억 등 아무것도 모르고 자란 천진난만한 시절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래서 난민촌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짐을 싸기도 했다. 그러나 미수에 그쳤다. 아마 친척이 있는 시골로 가고자 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봄에 서울로 전학 왔다. 졸업할 때 5회였다고 하니 전학 왔을 때 학교가 생겨난지 2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 콩나물교실이라고 한다. 그때 초등학교가 그랬다. 한반에 80여명 되었다. 서울인구가 갑자기 불어나자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색해 보니 1969년 당시 서울인구는 477만명이었다. 68년에는 430만명, 67년에는 396만명이다. 1961년에는 258만명이었다. 1970년에는 544만명이었으니 10년만에 두 배 증가한 것이다.

 

1960년대 서울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더 이상 농사를 지어먹고 살 수 없어서 마치 난민처럼 서울로 몰려 든 것이다. 그에 따라 모든 것이 부족했다. 주택도 부족하고 학교도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산비탈에 집을 짓고 살았다.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어서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동네에도 학교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북한산 정기받아로 시작 교가 일부구절이다. 북한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북한산을 강조한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근처 학교 교가에서 북한산 정기 받지 않은 학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초등학교 이름은 송천국민학교였다.

 

왜 송천국민학교라고 했을까? 보이는 것은 오로지 따닥따닥 붙은 집밖에 없고 소나무도 개울도 없는데 왜 송천이라고 했을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울이 팽창되기 전에는 소나무도 있었고 개울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송천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학교이름도 송촌국민학교가 된 것이다. 소나무와 개울도 없는 삭막한 곳이긴 했지만 이름만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황석영작가의 산동네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왜 그때 당시 살던 사람들은 왜산동네 산다라고 했을까에 대한 것이다. 산동네라는 말은 공원도 없고 나무 한구루도 없는 삭막한 회색지대 천지였기 때문에 이름과는 이미지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달동네가 아닌 산동네라고 불렀을까? 이에 대하여 지번을 떠 올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편지를 쓸 때 주소를 적어야 하는데 반드시73번지 박아무게 댁내라고 썼다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도로명주소를 연상케 하듯이 산73번지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산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정구역상의 동이름 다음에 마치 도로명 같은 이라는 문자를 쓴 것이다. 그래서 북한산73’이 아니라 그냥 삼양동 산73’이라고 한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산동네에서 번지수는 여러 집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주소에서 73번지라고 했을 때 산비탈에 있는 여러 채의 집을 한데 묶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허가 집이 난립되어 있음을 말한다. 지번은 하나이지만 수많은 무허가 집이 있기 때문에 지번 다음에는 반드시 집주인이름을 써야 했다. 전세사는 사람이라면 집주인이름을 쓰고 난 다음 수신자 이름을 써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73번지 박아무게 댁내 누구라는 식으로 긴 주소가 된 것이다.

 

TV드라마에서는 산동네라는 말대신 달동네라고 했다. 그러나 달동네 지번은 없을 것이다. 산동네 지번을 산73번지라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본다면 달동네 지번은 73’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지번은 없다.


달동네라는 말은 낭만적이다. 그러나 산동네라는 말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는 지번이 말해준다. 산이라는 지번으로 인하여 산동네라고도 했을 것이다.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길레?

 

소설속에서 할머니는 전태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산동네에서 살았지만 한번도 산동네를 떠나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산동네를 떠나 본 적이 없이 산동네를 고향처럼 눌러 산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동네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산동네가 고향인 것이다. 그래서 산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그리워할 것이다. 반면에 산동네를 떠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 60대초반의 주인공이 바로 그 사람이다.

 

소설속에서 주인공은 사업을 하여 성공하고 출세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산동네탈출에 대하여 대견해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고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할지 모른다. 여기서 소설속의 주인공은 전태일의 사장역할과 같은 사람이다.

 

다큐에서 전태일의 사장은 그렇게 어려운 줄 알았으면 도와주었어야 했는데.”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황석영작가는 자본주의의 회환이라고 했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생각해 보니 잘못되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60대 초반 남자는 산동네에서 탈출하고자 했다. 노력해서 돈도 벌고 출세도 했다. 이런 것만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천박한 자본주의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기성세대는 생활력만 자랑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같잖은 생활력으로 이루고나서 돌아보니까 아무것도 후대에 돌려줄 것이 없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만의 성공만을 위해 달려왔을 뿐 후대사람들에게 남겨 준 것이 없음을 말한다.

 

육십비인생(六十非人生)이라는 말이 있다. 나이가 육십이 되어 지난날을 회상에 보니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잘못 살았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소설속의 60대 초반 주인공은 자신의 성공과 출세만을 말했을 때 젊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공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베이비붐세대이자 산업화세대는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하는 등 노력하면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는 노력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성공스토리를 들려주는 것에 대하여 같잖은 생활력을 자랑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에 황석영은 소설속에서 고독사 하는 산동네 할머니의 입을 빌어서 어떻게 하다 이런 세상을 살았는지, 어떻게 하다 자식들에게도 가난을 넘겨주게 되었는지, 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길레?”라고 말했다.

 

산동네를 벗어난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산동네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자식도 산동네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가난은 대물림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식이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산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쩌다 우리사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열심히 살았음에도 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라며 고독사한다면 이는 사회적 책임이 클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강연에서 기성세대가 같잖은 생활력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같이 협력해서 제도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산동네를 찾아가 보니

 

황석영작가의 산동네 이야기를 듣고 초등학교 시절을 소환했다. 그때 그시절이 무엇이든지 처음 겪은 것은 생생하기 마련이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서 그때 그시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난민촌 같은 산동네는 그대로 있는지, 혹시 그때 알던 사람이 여전히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구글로 찾아가보기로 했다. 찾아가 보니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난다. 옛날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타워형 고층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이다. 그 옛날 마치 난민촌을 연상케 하던 집들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구조물이 들어선 것이다. 옛날 공동우물과 공동화장실이 있었던 자리에는 삼각산동주민센터라는 명칭을 가진 산뜻한 건물이 자리잡았다.

 




산비탈을 힘겹게 올라다니며 중고등학교시절을 보냈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산동네를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는데 산동네가 사라진 것을 보니 추억도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한가지 다행스런 것은 초등학교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송천초등학교는 변한 것이 없다. 건물도 그대로이고 운동장도 그대로이다. 학교 주변 집들도 그대로이다. 송천동이라 하여 소나무와 개울이 흐르던 곳이었으나 집들만 빽빽하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5회였으니 이제 48회가 될 것이다.

 

산동네에서 초등학교 후반부를 보내고 중고등학교를 또 보냈다. 초등학교는 한반에 80여명이나 되는 콩나물시루 같았다. 종로 5가 부근에 있었던 중학교 다닐 때는 늘 만원버스에 시달려야 했다. 그시절 산동네는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때 당시 활력넘치던 산동네는 여전히 동영상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2020-03-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