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한마리 모기가 되고자
모기소리에 잠을 깼다. 도중에 깼다가 다시 잠들어 잘 자고 있었는데 “앵앵” 거리는 소리에 깬 것이다. 높이가 15층이나 되는 아파트에 어떻게 들어왔을까? 모기의 비행능력은 높이에 제한이 없는 것일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을까?
모기와의 동거는 유쾌하지 않다. 앵앵 거리는 존재 자체가 불쾌하다. 어떻게해서든지 잡아야 한다. 얼굴에 붙기 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모기도 진화하는 것 같다. 표면적이 가장 넓은 얼굴보다는 노출된 팔이나 다리를 공략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부어오른 곳은 가렵기 그지없다.
모기 때문에 단잠을 깼다. 모기향을 꺼내서 퇴치하고자 한다. 모기 한마리 때문에 기분이 잡쳤다. 히루 일과 출발을 모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그런 한편으로 모기와의 동거는 불가피할 것도 같다. 잡혀 지지 않는다면 수행의 방편으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앵앵 거릴 때 “앵앵 거리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수행력이 뒷바침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기소리를 듣는 순간 오로지 잡아야 겠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그래 왔다. 앵앵 거리는 소리에 자비심은 없다. 불살생계가 있기는 하지만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기장을 만들 수도 없다. 전자모기향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수행의 척도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기가 앵앵 거릴 때 “앵앵 거리네.”라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면 그는 수행자일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모기가 되어 보는 것이다. 에스엔에스상에서, 특히 페이스북에서 한마리 모기가 되어 보는 것이다. 남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거론하는 것이다. 민감한 주제를 건드려 보는 것이다. 공무원연금 같은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 글을 쓰면 불편해하는 것 같다. 이는 ‘좋아요’추천 급감으로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자신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가족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하는 것에 대해 민감하다. 부동산투기나 공무원연금, 불로소득에 대해 글을 쓰면 침묵한다. 불편해서 일 것이다. 때로 불쾌해할지 모른다. 이런 경우 한마리 모기가 되는 것 같다.
스님들에 대해서도 글을 쓴다. 정법을 말하지 않는 스님들이 대상이다. 어떤 경우에는 법명을 들어 저격한다. 이런 글쓰기에 불편해하는 스님들도 있다. 불교 내부문제를 굳이 밖에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가능하면 좋은 이야기를 쓰자고 말한다. 이런 경우 한마리 모기가 되는 것 같다.
오늘밤에도 모기는 찾아올 것이다. 전자모기향을 준비해야 한다. 잡으면 더 좋다. 도시모기는 진화가 되어서인지 얼굴에 붙지 않는다. 모기와의 동거는 불가피하다. 앵앵거릴 때 앵앵거린다고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이는 수행력을 필요로 한다. 또 한편으로 사회의 모기가 되고자 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을 거론하는 것이다. 건들면 불쾌하고 불편한 것들이다. 세상에 한마리 모기가 되고자 한다.
2020-10-0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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