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올해 유행은 천연염색목도리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13. 09:03

 

올해 유행은 천연염색목도리일까?

 

 

선물을 받았다. 택배로 전송되어 온 것을 보니 유자차와 목도리이다. 유자차는 스틱형으로 된 것이다. 꿀유자차라 하여 한박스 가득 들어 있다. 목도리는 비교적 얇은 천에 천연염색한 것처럼 되어 있다. 양모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다, 페친, 페이스북친구가 보내온 것이다.

 

 

 

 

십일전 쯤에 페이스북 메신저를 받았다. 페이스북 메신저는 기피 대상이다. 자꾸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로만 한정해 놓았다. 그렇더니 메신저공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 이번에는 반가운 메신저였다. 평소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던 B선생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B선생은 미니국화화분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가을이 깊어 감에 따라 아마 지인들에게 선물할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한번도 직접 대면이 없고 오로지 페이스북에서 글로서만 소통하고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마음을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정일 것이다. 인정이 있기에 아름다운 마음을 낸 것이라 생각한다.

 

국화는 생물이다. 저 먼 남도에서 안양까지 택배로 전달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잘 될지 장담을 못하는 것 같다. 주소를 알려 달라고 해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종종 선물을 받는다. 특히 페이스북을 하고 나서부터 많이 받았다. 저 먼 거제도에서 생굴을 한박스 받은 적도 있다. 비구니 스님이 보내온 것이다. 더 먼 제주도에서는 귤농사를 짓는 페친이 귤을 한박스 보내 주었다. 페친이자 정평불회원이기도 한 법우님은 된장과 간장 세트를 보내 주었다. 부천에 사는 법우님은 좌선용 방석과 곳감을 보내 주었다. 서울 강남에서 나폴리 커피를 보내 준 페친도 있다. 이 밖에도 책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다. 모두 다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주는 사람은 기억한다. 그러나 받는 사람은 쉽게 잊어 버린다. 회사 다닐 때 신입사원 시절의 일이다. 동기가 몇 만원 꾸어 달라고 했다. 아마 차비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갑을 탈탈 털어서 주었다. 그런데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날 작심을 하고 빌려간 돈 갚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줬잖아?”라며 큰 소리 치는 것이었다. 순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받은 적이 없는데 주었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 그래서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라며 기억력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받은 적이 없다. 둘 만의 일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다. 돈 준 사람은 끝까지 기억하지만 받은 사람은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한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후 부터는 멀리 하게 되었다.

 

선물을 보내 주겠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딱 잘라 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이유없이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글을 보고서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매일매일 의무적 글쓰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 글 중에서 가슴을 울리는 글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감히 말하건데 매일매일 법보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자만이라면 자만일 것이다.

 

선물을 보내겠다고 할 때 수용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마음을 내었기 때문이다. 선물을 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선법이 된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을 때 선업이 된다.

 

보시하는 것은 공덕이 되는 행위이다. 그래서 니까에서도 보시공덕을 강조한다. 축생에게 먹을 것을 주어도 백배의 갚음이 기대된다고 했다. 심지어 오계를 지키지 않는 부도덕한 자에게 보시를 해도 천배의 갚음이 기대된다고 했다. 오계를 지키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 일반사람에게 보시하면 얼마의 갚음이 기대될까? 놀랍게도 십만배라고 했다. 축생과 부도덕한 자는 백배와 천배로 그다지 차이가 없지만, 부도덕한 자와 도덕적인 자는 천배와 십만배로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벌어진다.

 

수행자에게 보시하면 얼마가 기대될까? 경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난 밖의 사람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천억배의 갚음이 기대된다.”(M142.9)라고 했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난 밖의 사람은 이교도를 말한다. 이교도도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있다면 수행자로 보는 것이다. 또는 성자의 흐름에 아직 들어 가지 못한 수행자도 해당된다고 본다. 무려 천억배라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 즉 수다원에게 보시하면 어떤 과보를 받을까? 경에 따르면 그 보시는 셀 수 없고 헤아일 수 없는 갚음이 기대된다.”(M142.9)라고 했다.

 

보시는 청정한 자에게 해야 과보가 크다.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 보다도 걸인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훨씬 더 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인도에서 걸인은 당당하다고 말한다. “원달러 원달러를 외치면서 적선(積善)을 강요하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부도덕한 자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 또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그 갚음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금강경에서는 상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고 했다. 이를 무주상보시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티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보시했다고 떠벌리고 다니지 말라는 말과 같다. 보시했으면 그 순간 깨끗이 잊어버려야 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내가 보시했다라 하여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이는 순수한 보시가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 아낌없이 주라고 했다.

 

초기불교에 서른 가지 초월의 길(tisapārami)’이 있다. 이는 십바라밀에 대하여 일반적, 우월적, 승의적 바라밀로 구분했기 때문에 삼십가지 바라밀이 되는 것이다.

 

보시바라밀(dāna-pāramī)을 보면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정도일까? 테리가타 서문 주석에 따르면 예를 들어, 아내들-아이들-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이다.”(Jat.I.73, 테리가타 18번 각주) 라고 했다.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것이 빠라미(pārami), 즉 초월의 길이다. 빠라미는 대승불교에서 빠라미따(paramita)라고 한다. 빠라미라는 말은 건너감을 뜻한다. 저 언덕으로 건너감을 말한다. 그래서 완성의 뜻도 있고 과정의 뜻도 있다.

 

십바라밀행을 한다고 했을 때 이는 과정으로서의 초월의 길이다. 부처가 되는 과정을 말한다. 부처가 되는 과정에서는 아낌없이 줄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들이다.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이라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신체 일부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손가락을 소신공양하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목숨까지 버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몸을 던져 먹잇감이 되는 자따까 이야기가 이를 말한다. 이렇게 십바라밀에서 보시는 상상을 초월한다.

 

B선생은 국화미니화분을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실험삼아 지인에게 보내 보았더니 파손됐다고 한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서 목도리와 유자차스틱박스를 보내온 것이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서 마침내 택배를 받게 되었다. 한편으로 미안한 감도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날 그날 글쓰기 하며 생업에 종사하는 보통불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선물을 보낸 것은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글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매일 올리는 글은 경전에 있는 부처님말씀과 제자들의 주석을 옮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성현들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목도리를 걸쳐 보았다. 이제까지 걸쳤던 양모목도리와는 다르다. 두께도 얇고 펼치면 넓직해서 여성용 숄(shawl)을 연상케 한다. 방한이나 장식을 위해 어깨에 걸쳐 덮는 여성용 의류를 말한다. 그런데 남성용 목도리라고 했다. 그것도 염색목도리라고 했다.

 

 

요즘 날씨가 쌀쌀하다. 옷을 여러 겹 입고 두툼하게 입지만 목 부위가 허전했다. 작년에 둘렀던 양모목도리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 찾아보아야 한다. 그런데 마침 목도리가 하나 생겼다. 그것도 갈색 바탕으로 염색된 것이다. 아마 천연염료를 이용해서 만든 것 같다.

 

사람들은 유행따라 사는 것 같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멋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목도리 하나로도 멋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양모목도리만 걸치다가 나플나플한 염색목도리를 두르니 유행을 따라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목이 따뜻하다. 양모목도리 못지 않은 따스함이 있다. 올해 겨울은 따뜻하게 보낼 것 같다. 따끈한 꿀유자차가 부드럽게 넘어 간다.

 

 

 

2020-11-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