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반박자만 느리게 살아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17. 08:18

반박자만 느리게 살아도

 


농구나 축구를 보면 한박자 빠른 선수가 있다. 그 짧은 순간 손이나 발을 뻗쳐 골을 넣는 것이다. 타고난 순발력과 운동감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박자 빠르면 돋보인다. 스포츠스타에게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빨리빨리 하고자 한다. 올림픽 슬로건처럼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나아 가고자 하는 것이다. 한박자가 아니라 반박자만 빨라도 세상은 나의 것이나 다름없다.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

남보다 앞서고 이겨야 직성이 풀린다.” 이 말은 신입사원시절 사원행동수칙에 있는 말이다. 이익을 내야 하는 기업에서 사원을 돈벌기 선수로 보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빨리빨리하라는 것이다. 행동수칙에는 ‘1분에 120보걷기운동도 있었다.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는 중앙대로에 1120보전광판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이 걸어가는 형상을 만들어 놓고 두 발에는 점멸등을 켜 놓은 것이다. 정확히 1분에 120번 점멸하게 해 놓았다. 1분에 120보 걸으라는 것이다. 아마 사원들이 느릿느릿 양반처럼 걷는 꼴을 못 보겠다는 의미로도 읽혀졌다. 1분에 120보 걷듯이 씩씩하고 활기 차게 걸으라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빠릿빠릿 하라는 말과 같다. 개발도 빨리해야 하고 생산도 빨리해야 함을 말한다. 시장이 있을 때 주어 먹자는 것이다. 늦으면 뒤쳐지고 망한다는 절박감이 1120보 점멸등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살아 남으려면 남보다 빨라야 한다. 한템포가 아니라 반템포라도 빨라야 한다. 그래서 조직에서는 빠릿빠릿한 사람이 각광받는다. 민첩하고 감각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다. 반박자라도 빨라야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자연다큐를 보면, 치타는 사냥할 때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한다. 간발의 차이로 먹이를 낚아 챈다. 반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영양은 간발의 차이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한발 차이로 생사가 결판난다. 남보다 한발 앞서야 살아남을 수 있다. 늘 쫓기듯이 살아간다.

생활의 전선에서는 빠른 것이 미덕이다. 마치 결투 장면에서 누가 먼저 총을 뽑는지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것과 같다. 진검승부에서 속도차이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것과 같다. 한템포가 아니라 반템포 차이로, 아니 순간적 차이로 결판 난다. 사람들은 속도에 목숨 건다.

일을 할 때는 속도전이다. 납기에 쫓기면 분치기를 넘어 초치기 할 때가 있다. 컴퓨터처럼 동시에 일을 처리하는 멀티테스킹을 하기도 한다. 머리와 손을 풀 가동시킨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천길 낭떠러지이다. 실수하면 그대로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집중이 최고조에 이르면 무한세계를 질주하는 것 같다. 글을 쓸 때도 그렇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 몰아치기로 쓰는 것이다.

항상 한박자 빠르게 살 수 없다. 한템포 빠르게 사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손해 볼 때도 있다. 특히 말을 할 때 그렇다. 불쑥불쑥 말을 꺼냈을 때가 그렇다. 아무생각 없이 말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해당된다. 그러다 보니 두서도 없고 횡설수설하게 된다. 이럴 때는 한박자 쉬어 가는 것이 좋다. 생각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그 작은 틈새를 이용하여 생각할 여유를 갖는 것이다. 말할 시간을 버는 것이다. 생각을 가다듬어 논리적으로 말 하는 것이다. 반박자만 쉬어도 경솔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생활전선에서는 빠른 것이 미덕이다. 그러나 수행처에서는 느린 것이 미덕이다. 수행처에서는 빨리 걸어서는 안된다. 수행처에서 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아무리 바빠도 천천히 느릿느릿 가야 한다. 그것도 한걸음, 한걸음을 알아차림하며 가야 한다. 사띠하며 걸어야 아름다워 보인다.

수행처에서는 말도 느릿하게 해야 한다. 한템포 죽이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말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논리적인 말이 된다.

어떤 사람은 뛰고 나서 생각한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다. 순발력 있는 운동선수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수행자는 행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한다. 먼저 행위하고 나서 알아차리면 이미 늦다.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과 똑같다. 본능적으로 감각적으로 사는 축생과 다를 바 없다. 사람이 동물과 달리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말하고 사유하고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축생과 구별된다.

수행자는 느릿하게 살아야 한다. 수행자가 빠릿빠릿하면 허물이 된다. 한박자만 느리게 살아도 사람이 달라 보일 것이다. 아니 반박자만 느리게 살아도 삶의 여유가 있다.

 

 

2020-11-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