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진정한 무소유는 어떤 것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18. 07:32

진정한 무소유는 어떤 것일까?


불교박람회장에서의 일이다. 혜민스님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혜민스님의 인기를 짐작했다. 미남형에 젊고 학벌 좋고 더구나 말도 잘한다. 스타스님이 되기 위한 조건을 두루두루 갖춘 것이다.

혜민스님과의 인연이 있다. 한번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글로서 인연이 있다. 그렇다고 댓글이나 메일을 주고받은 것은 아니다. 2004년 정식으로 불교에 입문한 다음 법보신문에서 스님의 칼럼을 보고서 매료되었다. 2005년도의 일이다. 그때 당시 스님은 하바드대 박사과정이었다.

법보신문에 세심청정이라는 칼럼방이 있었다. 혜민스님과 법상스님이 번갈아 가며 글을 올렸는데 불교 초심자가 보기에 주옥같은 글이 많다. 글쓰기 하면서 혜민스님 스타일의 문체를 많이 참조했다.

요즘 혜민스님이 위기에 처해 있다. 발단은 같은 하바드대 출신 현각스님에 의해서이다. 페이스북을 보니 매우 거친 글이 많았다. 청정을 추구하는 수행자가 저렇게 써도 되는지 의구심이 날 정도이다. 팔정도 정어로 따지면 악구에 해당될 것이다. 마치 한 존재를 파멸시켜 버려야 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현각스님의 글로 인하여 혜민스님은 졸지에 파렴치한 스님이 되었다. 먼저 연합뉴스 등 언론 매체에서 때렸다. 일파가 만파가 된 듯하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그다지 심각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시기와 질투가 작렬한 것인지 모른다.

문제는 소유에 대한 것이다. 혜민스님의 부적절한 언행도 문제가 있지만 건물주라는 딱지를 붙인 것이 국민정서에 불을 지른 것이다. 스님은 무소유여야 하고 청정해야 함에도 건물주라고 했을 때 폭발력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스님의 절은 종단에 등록된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무소유를 실천해야 할 출가수행자가 많은 재산을 가진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재가에서는 소유가 미덕이다. 이마의 땀과 팔의 힘으로 정당하게 부를 축적하여 베푸는 삶을 살 때 이를 향유의 행복이라고 했다. 반면 출가자는 소유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소유한 것을 버리고 출가했기 때문에 당연히 무소유지향의 삶을 살게 된다. 출가자가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재가의 삶을 살며 소유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많은 것을 소유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이를 포기하고 출가의 삶을 사는 것은 무소유의 행복을 누리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다름아닌 청정한 삶으로 구현된다. 실천적 방법으로 탁발을 들 수 있다.

탁발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탁발 하는 것이다. 탁발을 하게 되면 무소유와 청정한 삶은 자연스럽게 실현된다. 가진 것이라고는 옷 세 발과 발우 뿐이다. 그래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
어떤 마을이든지 떠날 때는
어떤 것에라도 뒤돌아보지않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Thig.282)

 


어떤 마을에서든지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은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의 헛간이나 항아리나 바구니 속에 아무 것도 모으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찾아 그것으로 계율에 맞게 생활하네.”(S11.20)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하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서 탁발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60년대 중반에 탁발을 금지시켰다. 수행자의 위의를 손상케 한다는 것이다. 탁발이야말로 가장 수행자다운 행위임에도 이를 정반대로 해석한 것이다. 부처님도 평생 탁발하며 사셨는데 이를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님들은 각자도생하며 살고 있다. 소유하며 살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소유하면 청정한 삶과 거리가 멀어진다. 출가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과 열반도 요원해진다. 각자도생하며 살다보니 승가공동체의 삶을 살기 힘들다. 그래서 한국불교에는 승가공동체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한글삼귀의문에서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승가에는 사방승가와 현전승가가 있다. 사방승가는 포괄적이고 현전승가는 현실적이다. 사방승가는 부처님 재세시부터 정법이 유지 되는 한 존속되는 승가로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다. 현전승가는 해당지역에 기반을 둔 현실적 승가이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귀의의 대상은 승가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를 말한다.

재가자는 재보시해야 한다. 그래야 승가가 유지된다. 만약 승보개념을 스님들로 본다면 스님들에게 보시할 것이다. 승보개념을 승가공동체로 본다면 승가에 보시할 것이다.

부처님 재세시 수많은 보시가 이루어졌다. 승원을 지어 기증한 것이 좋은 예이다. 만일 승가공동체가 없었다면 출가자 개인이 받았을 것이다. 아나타삔디까가 제따와나승원을 지어 부처님에게 보시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유권이 부처님에게 있을 것이다. 오늘날 스님이 사유재산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은 승원을 소유하지 않았다. 승가공동체에서 소유한 것이다.

부처님의 양어머니 고따미 비구니가 가사를 만들어 주고자 했다. 이에 부처님은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그대가 승단에 보시할 때에 곧 나와 승단을 공양하는 것이 됩니다.”(M142)라고 말 했다. 이런 전통은 테라와다 불교권 국가에서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지난 11 8일 아산에 있는 스리랑카 마하위하라 사원에서 까티나 가사공양 법요식이 열렸을 때도 승가에 보시하라고 했다.

재가불자들이 보시한 것은 모두 승가공동체의 소유가 된다. 출가자들에게 탁발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보시는 승가에 하는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출가자는 완전한 무소유를 실현할 수 없다. 한국불교에서는 사실상 승가공동체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다보니 각자도생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율장정신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후불식 하는 것 정도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무소유는 어떤 것일까?

무소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협의의 무소유와 광의의 무소유를 말한다. 협의의 무소유는 물질적인 것이고, 광의의 무소유는 정신적인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무소유는 탐, , 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탐진치에서 생겨난 번뇌가 없는 것이 진정한 무소유라는 것이다.

어느 수행자는 가진 것이 없다. 물질적으로 무소유인 것이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번뇌가 가득 하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없어도 정신적으로는 가진 것이 많아서 무소유의 삶을 산다고 볼 수 없다.

출가자는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 간다. 세상사람들은 오욕락으로 살아 가지만 출가자는 오욕락을 여의는 역류도의 삶을 살아 간다. 자연스럽게 무소유의 삶, 청정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 출가자는 부처님 유산으로 살아 간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재가불자의 보시가 있었다. 승가에 보시한 것이다. 모두 부처님의 유산이다. 승가 구성원들은 부처님의 유산으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출가자가 사유재산을 축적하고 부처님의 유산을 사유화한다면 도둑으로 사는 것이다. 승가의 재산을 가로챈 것이나 다름없다. 오늘날 한국불교 권승들에게서 볼 수 있다.

출가자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떠날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무소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탁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설령 한국적 현실에서 완전한 무소유가 불가능하다면 정신적 무소유라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는 것이다.

만족지수는 소유와 관련이 없다. 소유는 그대로 두고 욕망을 최소화했을 때 만족지수 또는 행복지수는 높아 진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어떠한 것이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Dhp.331)라고 했다.


2020-11-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