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남영역 전철소리는 오늘도 요란한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17. 08:15

남영역 전철소리는 오늘도 요란한데


사람들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한다. 어떤 위험한 일도 감수한다. 또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양심에 걸리는 일도 거리낌 없이 자행한다. 돈 앞에 명성이나 체면, 염치는 없는 것 같다.

정평불 집행부 회의가 남영동 중국집에서 열렸다. 11 21일 총회를 앞두고 열린 것이다. 19 시기임에도 9명 참석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영동 대공분실이 가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남영동 인권기념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제까지 수없이 남영역을 들락날락 했는데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모임이 끝난 후에 이희선 선생과 함께 가 보았다. 이희선 선생은 민주화 유공자이기도 하다.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것이 별로 없다. 80 '서울의 봄' 때 시위대열에 합류한 것이 고작이다. 그때 당시 서울역회군도 지켜보았다.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죽었을 때는 회사 다닐 때였다. 그것도 논 가운데 있는 커다란 산업단지였다.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살 던 때이다. 1987년 사람들은 거리에서 최루탄 맞아 가며 시위했지만 공단은 무풍지대였다. 삼저호황으로 거의 매주 회식으로 흥청망청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세상 살다 보면 억울한 일도 많다. 타의에 의해 또는 상황에 따라 운명이 바뀌었을 때 억울한 것이다. 그러나 죽음처럼 억울한 것이 없다. 민주화 운동을 하더 죽은 사람들이다. 그것도 고문 받다 죽었다면 더욱 억울한 것이다. 박종철 열사가 그랬다. 그 역사의 현장에 섰다. 진즉 찾아왔어야 했는데 이제사 여기에 선 것이다.

 

 


홍보영상에서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건물 설계자가 김수근이었다는 사실이다. 김수근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이다. 명성에 걸맞게 곳곳에 작가의 작품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그 악명 높았던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것이다.

과연 김수근은 정말 몰랐을까? 고문실이 있는 건물설계를 요청받았을 때 몰랐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천재적 건축가도 돈 앞에 무력 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고문실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남영동대공분실은 겉으로 보기에 설계가 잘 된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일종의 관공서건물로서 미적감각과 균형미를 감안하여 설계한 듯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하자가 있다. 그것은 5층에 있는 고문실이다.

 

5층을 보면 창이 작다. 다른 층의 경우 창이 넓직넓직 한데 유독 5층만큼은 창이 세로로 작게 설계되어 있다. 이는 밖에서 안을 잘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 뛰어내리지 못하게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 또한 건축가가 의뢰받아 설계했을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건축가가 고문용도의 청사를 알면서도 설계한 것이다. 5층의 작은 세로 슬릿창은 빼도박도 못한 결정적 증거가 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신축되었다. 대공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본래 간첩 잡던 곳이다. 그러나 대학가에서 북한관련 유인물이 발견되어도 연행 대상이 되었다. 박종철 열사뿐만아니라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받았다. 김근태 선생도 고문 받던 곳이다. 영화 '남영동1985'를 보면 김근태 선생이 이근안에게 고문 받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바로 그 장소가 5층 끝방에 있다.

 

 


김근태 선생이 고문 받던 방에 들어가 보았다. 지금은 선생이 보았던 책과 갖가지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영화에서 전기고문 받던 장소이기도 하다. 갑자기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아마 그때도 이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박종철열사가 고문 받던 방에 들어가 보았다. 불과 2평도 안되는 작은 방이다. 물고문 받다 죽은 욕조도 보인다. 남쪽에는 작은 세로창이 보인다. 머리가 들어 가지 않는 슬릿처럼 생긴 창이다. 남향이어서일까 햇살이 틈새로 커튼처럼 비친다. 고문실 전용으로 지은 것이다. 건축가는 고문전용 건물을 설계한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본래 간첩 잡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건축가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첩은 고문해도 되는 것일까? 간첩은 인권이 없는 것일까 ? 우리 헌법 12조를 보면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다. 간첩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간첩 잡는 곳에서 수많은 학생과 민주열사가 이곳에서 고문받았다는 사실이다. 건축가는 이런 용도로 사용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때 고문 받았던 김근태 선생은 장관이 되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영화에서 고문하던 사람은 너희 들 빨갱이들이 아무리 날 뛰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아!”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수구기득권세력이 시대의 흐름에 저항해 보았지만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가고 말았다. 그리고 30여년이 흐른 현재 그 자리는 기념관으로 변했다. 2018 12월에 개관했으므로 딱 2년 되었다.

 


귀가하기 위해 남영역에서 전철을 기다렸다.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다. 철길 바로 옆에 있는 검은 빌딩이다. 5층에 머리 하나 들어가지 않는 세로 슬릿창도 보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남영역 플랫폼에 서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다음 부터는 눈길이 자동적으로 향하게 될 것 같다. 전철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마 그때 그 사람들도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남영역 전철소리는 오늘도 요란하다.

 

 

2020-11-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