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삶을 거듭하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1. 24. 08:28

삶을 거듭하는 것은


자연다큐를 즐겨본다. 그 중에서도 새에 대한 것을 주로 본다. 부화에서 비상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에 대한 것이다.

먼저 암수가 만나 짝짓기를 한다.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듯 하다. 본능에 따르기 때문이다. 마치 모든 것이 프로그램된 듯하다. 전에 부모새가 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척척 해낸다.

생명의 탄생은 놀라운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그 순간 세포분열이 시작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어 기하급수적으로 폭발적 분열이 시작된다. 이는 생식세포의 분열이다.

포유류라면 출산할 때 어느 정도 개체의 형태를 갖추어 태어난다. 세렝게티 초원의 누우라면 태어나자 마자 달리기 시작한다. 새끼를 노리는 포식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아기는 느리다. 덜 완성된 채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생명체이든지 아기 때는 귀엽다. 귀여움을 넘어 사랑스럽다. 눈에 밟힐 정도로 애착을 갖는다. 그래서일까 손자바보가 되나 보다. 새끼가 또 새끼를 낳았으니 오죽할까?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럴 것이다. 강아지도 새끼 때는 귀엽다. 또 한편으로 측은한 생각도 든다. 새끼들이 구물구물 거릴 때 어쩌다가 개로 태어난 운명이 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새의 운명, 개의 운명, 사람의 운명이 있다. 운명을 가르는 것은 어떤 요인이 작용해서일까? 사람의 삶만 살다 보니 외계의 것에 무관심하다. 마치 안락하게 사는 자가 가난한 자나 병든 자의 고통을 모르는 것과 같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사는 환경이 전혀 다르다 보니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귀의 세계도 있고 코의 세계도 있다. 시각의 세계, 청각의 세계, 후각의 세계 등 여섯 감각의 세계는 독립적이다. 마찬가지로 인간계, 축생계도 독립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옥, 아귀, 아수라, 천상 역시 독립적인 세계가 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한다. 같은 병에 걸린 자들은 서로 연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사람 마음 다르고 노인의 마음이 다르다. 같은 인간이라도 정신세계가 다르다. 한지붕 아래 살아도 종교가 다르면 전혀 다른 나라 사람처럼 보인다. 인식능력에 따라 세계가 갈린다.

이 세상은 불가사의한 것으로 가득하다. 엄밀히 말하면 생명에 대한 불가사의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경이롭다. 그러나 생명의 탄생에 대해 잘 모른다. 죽음에 대해서도 모른다. 탄생 이전도 모르고 죽음 이후도 모른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이 세상은 의문투성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 뿐이다. 오욕락에 따른 감각을 즐기는 삶이다.

모르면 답답하다. 아이가 엄마에게 이게 뭐야?”라며 끊임없이 물어본다. 엄마는 최대한 알려 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엄마는 질문 공세에 한계를 절감한다. 엄마 자신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이가 더 자라서 아기는 어디서 나와?”라고 물어보면 어떻게 답 해야 할까? 아마 별걸 다 물어 본다며 짜증낼지도 모른다. 엄마가 궁금한 것에 대해 말 해 주지 않을 때 아이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질서에 편입된다. 감각대로 사는 것이다.

질문 잘 하는 아이가 공부도 잘 한다.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공부를 알 수 있다.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는 것은 공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호기심과 의문이 오늘날 인류문명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생명과 존재에 대한 것이 특히 그렇다.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을 때 막혀 버린다. 그리고 기존질서에 편입되어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간다.

젊을 때는 젊음의 교만으로 산다. 건강할 때는 건강의 교만으로 산다. 그러나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 , 사에 장사 없다. 인생에서 파란곡절을 겪을 때 또 다시 질문하게 된다. 사는게 뭐냐고? 왜 살아야 하느냐고? 삶에 대해 의문 하면 자연스럽게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중병에 걸렸을 때, 죽음이 임박했을 때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속 시원한 답을 듣기 어렵다. 현실과 동떨어진 가르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령 답을 듣는다고 해도 삿된 견해이기 쉽다. 상견이나 단견 같은 것이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말한다.

, , , 사에 대한 해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인류가 궁금하게 생각한 존재의 실상에 대한 모든 해법이 이미 이천오백년 전에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말한다. 오늘날 빠알리삼장 형태로 전승되어 온 가르침이 그것이다.

빠알리삼장을 알게 된 것은 행운이다. 대략 2009년도의 일이다. 논현동에 있는 한국명상원에서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十二緣起)’를 접하고 나서부터이다. 니까야(經藏)와 아비담마(論藏)을 근거로 십이연기를 법문했는데 그 동안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다 들어 있었다. 이후 초기경전과 주석서를 근거로 글쓰기를 했다. 올해로 11년 째이다.

여기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학인이 있다. 그는 궁금한 것이 많다. 그러나 누구 하나 속시원이 말해 주지 않는다. 그는 부처님을 만나 싸끼야시여,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이 거센 흐름를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Stn.1069)라고 말했다. 이런 질문에 차나 한잔 마시게.”라며 동문서답식으로 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과 방, 양구는 상근기 수행자에게나 가능할 것이다. 부처님은 그 사람의 눈높이 맞추어 가르침을 주었다. 근기에 따라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는 가르침을 친절하게 자비롭게 알려 준 것이다. 때로 문답식으로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궁금한 자에게 모든 의문은 해소되었다. 외도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한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이,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재가 신자로서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 (귀의문)


이를 귀의문이라 한다.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미 이천오백년 전에 인생에 대한 해법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모르고 살았을 뿐이다. 이렇게 가까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이런 것이 있는 줄조차 모르는 것이다.

 

종립중학교 다닐 때 불교교과서에서 본 것이 있다. 부처님이 어느 날 석양 때 산 아래 마을을 가리키며 세상이 불타고 있다.”라고 했다. 그때는 이 말의 의미를 몰랐다. 그러나 늘 마음 속에서는 세상이 왜 불타고 있다고 했을까?”라며 궁금해 했다. 일종의 화두가 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40여년 만이다. 초기경전을 접하고서 의문이 해소되었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의 법문에 대한 경’(S35.28)에 해법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S35.28)


세상은 감각영역을 말한다. 눈과 형상과 시각의식 이렇게 삼사가 화합했을 때, 즉 감각접촉이 발생되었을 때 이를 인식하면 세상이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 세상은 시각의 세상, 청각의 세상 등 여섯 가지가 있다. 그런데 각 세상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괴로움의 불이고 절망의 불이다.

탐욕을 내면 낼수록 땔감은 많아져서 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탐욕의 땔감은 내세의 땔감도 된다. 그래서 세세생생 타오르게 된다. 탐욕의 불을 끄지 않는 한 탐욕의 불구덩이 속에서 사는 것이다. 성냄의 땔감과 어리석음의 땔감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배경이 있으면 든든하다. 누구나 뒤를 봐주는 사람, 속된 말로 빽(Background)이 있으면 안전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배경이다. 불자들은 부처님 빽으로 산다. 부처님은 계시지 않지만 남겨 놓은 말씀으로 산다. 빠알리삼장만 있으면 인생이 든든하다.


깨달은 님의 말씀을 행하라.
찰나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찰나를 헛되이 보내는 자는
지옥에 떨어져 비탄해 하기 때문이다.”(Thag.403)


부처님은 찰나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했다. 어떤 찰나를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1) 깨달은 님이 태어나는 찰나, 2) 세계의 중앙지역에 태어나는 찰나, 3) 올바른 견해를 얻는 찰나, 4) 흠없이 완전한 여섯 감역을 획득하는 찰나”(ThagA.II.172)이렇게 네 가지 찰나를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법 만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또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려움을 말한다.

정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 초기경전을 보면 과거불(過去佛) 출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법이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짐을 말한다. 후대로 내려 갈수록 변질되어 사라져 버림을 말한다.

 

정법은 자연의 이법이다. 부처가 출현하건 출현하지 않건 원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 때 부처가 출현하여 정법을 발견하면 정법시대가 된다.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윤회해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이 머무는 기간은 매우 짧다는 것이다, 부처가 억겁만에 출현한 것과 비교하면 섬광처럼 짧은 것이다. 그래서 정법이 머무는 것에 대하여 찰나라고 했다. 정법만나기 어려운 것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좋지 않은 시간의 경’(A8.29)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지옥에서 태어나는 것.
둘째, 축생으로 태어난 것.
셋째,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는 것.
넷째, 수명이 긴 신들의 무리에 태어나는 것.
다섯째, 무지한 야만인들 사이에 태어나는 것.
여섯째,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관점을 가지는 것.
일곱째, 지혜가 없어 둔하고 어리석은 것.
여덟째, 세존이 출현하지 않은 것.


정법이 머무는 기간도 찰나이고 인간의 삶도 찰나이다. 정법을 만나기도 어렵고 인간 몸 받기도 어렵다. 설령 정법시대에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변방에서 태어났다면 정법 만나기가 힘들다. 중앙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조건과 조건이 맞아야 정법을 접할 수 있다.

새끼 새는 입을 찢어지게 벌린다. 어미새는 부지런히 먹이를 나른다. 새끼는 거친 먹이를 꿀꺽 삼킨다. 먹고 싸고 하다보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날개가 나오게 되면 비상이 머지않은 것이다. 마침내 비상하여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짝짓기 부터 시작해서 이 모든 과정이 두 달 이내에 끝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둥지는 텅 비어 있다.

 


새끼 새는 비상함으로 해서 태어남이 완성된다. 태어남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만일 날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날지도 못하는 새를 새로 보아야 할까? 물론 날지도 못하는 새도 있다. 타조 같은 것이다. 몸이 너무 무거워 날지 못하는 것이다. 땅에서 먹을 것이 많으면, 천적이 없으면 굳이 힘들게 날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가?

사람이 삶의 의미를 모르면 날개가 있어도 널지 못하는 새와 같다. 설령 삶의 의미를 안다고 해도 일부만 안다면 날 수 없다.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비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단지 오욕락을 즐기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몸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원대한 원력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언젠가 어느 때 서원을 했는지 모른다. 삶을 거듭하는 것은 날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날개가 생겼을 때 비상(飛上)하는 것이다.

 

 

2020-11-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