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의 나(我)는
오늘 새벽 2시 반에 잠이 깼다. 이렇게 일찍 눈을 뜨면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억지로 잠을 청하기도 쉽지 않고 책을 보기도 쉽지 않다. 그저 멍하게 보내다가 여명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때 가장 좋은 것은 쓰는 것이다.
엄지손가락 가는 대로
요즘은 스마트폰시대이다. 스마트폰에 여러 기능이 있지만 주로 보고 듣는 용도이다. 손 안에 있는 작은 컴퓨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블로거에게는 쓰는 용도로도 활용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치는 용도이다. 자판을 엄지로 쳐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글을 쓸 때에는 엄지손가락 가는 대로라고 볼 수 있다. 펜으로 글을 쓸 때에는 펜 가는 대로라고 있다. 이제 스마트폰이 일상이 되어 버린 시대에서는 엄지손가락 가는 대로 글을 쓴다.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포노사피엔스(Phonosapiens)’ 시대에 살고 있다.
글 쓸 때는 시간이 잘 간다. 전철이나 지하철에서 쓰다가 내려야 할 역을 놓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새벽에 글쓰기도 시간이 잘 간다. 스마트폰 자판을 똑똑 치다 보니 4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것이다. 새벽 2시 반에 시작하여 아침 6시 반에 끝났다. 그 결과 A4로 무려 5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완성했다.
글이 길다고 한다. 글이 길어서 외면 받기도 한다. 초분을 다투는, 시간이 황금인 시대에 5페이지나 되는 글을 읽는다는 것은 왠만한 관심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매일 그만한 분량을 쏟아 낸다. 하루에 두 번, 세 번 쓰기도 한다. 아마 글의 양에 질려 버려서 멀리 하는지도 모른다.
PC글쓰기와 스마트폰글쓰기
스마트폰으로 글쓰기는 일종의 진검승부처럼 느껴진다. 마치 시험 보는 것 같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이나 경험했던 것을 따박따박 표현해 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천천히 치게 된다.
치면서 동시에 쓸거리를 생각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조는 유지해야 한다. 만족할 때까지 쓰다 보니 시간이 금새 지나가 버린다. 침침한 곳에서 작은 자판을 치다 보니 눈이 몹시 피곤 해진다. 가능하면 스마트폰 자판을 치지 않으려 하지만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충동을 억누를 수 없다.
PC글쓰기와 스마트폰글쓰기는 다르다. PC글쓰기는 경전을 활용한 글쓰기가 된다. 그러다 보니 경전이나 주석 인용임 많다. 그러나 스마트폰글쓰기는 집에서 쓰기 때문에 경전을 활용할 수 없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써야 한다. 마치 논술시험보는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스마트폰 글쓰기는 자신의 실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 반면 PC글쓰기는 일종의 오픈북시험 글쓰기와 같다.
글을 쓰고 나면 인터넷에 올린다. 블로그에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린다. 올리고 나서 교정을 본다. 오자와 탈자를 바로 잡고 표현이 어색한 것도 수정한다.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 글의 구상에서부터 쓰기, 그리고 교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 거쳐야 한다. 날자와 이름을 서명하면 글이 완성된다.
글을 쓸 때는 형식을 갖추고 의미 있는 글을 쓰고자 한다. 이런 노력은 글을 처음 쓸 때인 2006년부터 해 오던 것이다. 날자와 서명을 남기는 것은 글에 대한 무한책임을 의미한다.
2009년 하반기 때 쓴 글
길이길이 남을 글을 쓰고자 한다. 하루하루 쓴 글이 쌓이고 쌓여서 사이즈가 엄청나게 커졌다. 이제 이를 책으로 내고자 한다.
이번에 책 낸 것은 제목을 ‘진흙속의연꽃 2009 II’라고 정했다. 2009년 7월부터 12월에 쓴 것에 대한 기록이다. 일상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블로그 ‘진흙속의연꽃’방에 있는 것에서 모은 것이다. 총 62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고 총 416페이지에 달한다. 16번째 책이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출산장려를 축산장려 하듯이
2. 아름다움에 성(聖)스러움이
3. 베트남참전기념탑 설치를 보고
4. 연꽃의 바다 관곡지에서
5. 기묘하게 생긴 색동호박을 보면서
6. 안양천과 학의천의 집중호우 전후 광경
7. 그래피티 퍼포먼스를 보고
8. 한국불교 포대기론
9.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를 보며
10. 2등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11. 열대야 모기와의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
12. 블로그개설 4주년을 맞이하여
13. 호연지기를 기르려면
14. 상실의 시대에 왜 연기법인가
15. 올 것이 왔다 창작불보살론
16. 담마스쿨을 만들어야
17. 대한민국 최전성기는
18. 아까운 김대중 분한 노무현
19. 만(卍)자 붙은 점집을 보면
20. 꽃 속의 또 꽃이
21. 스리랑카 예불의식을 보니
22. 컴퓨터를 포맷하며
23. 삼보는 없고 이보만 있는
24. 원수 같은 남편
25. 블로그 에티켓 실종
26. 불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끌어내리려는
27. 9월에 피는 꽃
28. 무엇을 위해 글을 쓰는가
29. 신대승운동보다 신불교운동을
29. 불교학을 난자하는 기독교학자들
30. 신대승운동보다 신불교운동을
31. 원두커피 맛을 알게 되면서
32. 아침 햇살에 보는 나팔꽃
33.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
34. 가을 꽃과 가을의 정서
35. 오이도에서 고단한 일상의 회포를
36. 불자가 본 크리스천의 전도행태
37.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자들에게
38. 10만명의 전법사와 10만명의 블로거를 양성해야
39. 비구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라는데
40. 불교학를 연구하는 기독교학자들
41. 전도의 황금어장을 공략해야
42. 추억 속의 중학교 교법사
43. 일본인이 확대지향으로 나갔을 때
44.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키워드를 보면
45.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
46.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47. 각묵스님의 상윳따니까야 완간 소식을 듣고
48. 서양에서 불교가 꽃 피울 수 있을까?
49. 4부 니까야 요약편찬분을 기대하며
50. 왜 느낌으로 그쳐야 하는가
51. 아직도 대소승 편가르기인가?
52. 한국명상원에서 일년
53. 몰라서 욕심부리다 후회하고
54. 테라와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55. 오체투지와 전체투지는 어떻게 다른가?
56. 우학스님의 포교방법론을 보고
57. 주부(Jewish-Buddhist)와 카부(Catholic-Buddhist)
58. 일아스님의 강원교육에 대한 특별기고를 보고
59. 다음과 네이버 크리스마스 배너를 보면
60. 눈매와 입매는 그 모습 그 대로
61. 재가불자들 손에 달린 한국불교
62. 엠비는 왜 정치적 순교자가 되었을까?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저자와 대화하는 것이다. 고전을 읽는 다면 오래 전 저자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마치 저자를 면전에서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이 쓴 글은 어떨까? 마찬가지로 자기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11년전인 2009년의 자신과의 대화이다.
11년 전의 나(我)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11년 전 글을 썼을 때와 현재 2020년 나는 어떻게 다른가? 분명히 변화가 있다. 겉모습으로는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늙은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것은 어떨까? 분명한 사실은 그때 당시의 마음이 지금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행위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라고 한다. 이런 나는 변치 않는 나가 아니라 조건발생에 따른 나를 말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그는 이와 같이 분명히 안다. 과거의 업을 조건으로 존재의 다발이 생겨났다면, 그것들은 모두 그곳에서 소멸한다. 그리고 과거의 업을 조건으로 이 생에서 다른 것들이 생겨나고, 과거의 생으로부터 이 생으로 온 것은 하나의 사실도 없다. 또한 그 생에서 업을 조건으로 생겨난 존재의 다발은 소멸할 것이고, 내생에서는 다른 것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 생에서 내생으로 하나의 사실도 가지 않을 것이다.”(Vism.19.22)
이는 현생과 내생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반드시 일생윤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찰나윤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11년전 글쓴 나와 현재 글 쓰고 있는 나는 동일한 나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나도 아니다. 그때의 나에서 조건발생하여 상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11년 전의 나는 내가 아니면서도 동시에 나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용기가 없을까?
11년전 쓴 글에서 12번 항목에 ‘블로그개설 4주년을 맞이하여’라는 글이 있다. 2005년에 블로그를 개설했으므로 개설된지 만 4년 되었을 때 쓴 글이다. 글에서“무엇이 그토록 집착하는 요인이 되었을까 스스로 자문해 보면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네티즌에게 불교를 알리고 싶은 욕구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009-08-03)라고 썼다. 인터넷에서 글을 보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힘으로 쓴 것이다. 누적조회수가 133만명 되었을 때 쓴 글이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글이 있다. 그것은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에 대한 글이다. 61번 ‘눈매와 입매는 그 모습 그 대로’라는 제목의 글이다. 그때 당시 국어선생님은 처녀선생님이었다. 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십대 중후반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추억속의 선생님이다.
어느 날 검색창에 이름을 넣었더니 선생님이 조선일보에 쓴 글을 하나 발견했다. 사진을 보니 그 선생님이었다. 글의 제목은 ‘생(生)은 눈물의 힘으로 깊어진다네’이다. 연탄불 작가 이철환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선생님은 자신의 글에서 “34년 만에, 28살의 처녀 선생과 15살의 앳된 남학생이 61살의 노교사와 48살의 장년의 나이로 대면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선생님을 인터넷시대에 글로서 보게 되었다.
선생님의 사진을 보고서 “글을 보니 틀림없는 그 선생님이었다. 사진도 올려져 있었는데 나이가 들은 모습이지만 눈매와 입매는 그 모습 그 대로이었다.” (2009-12-26)라고 블로그에 적어 놓았다.
선생님과 댓글로 소통했었다. 선생님을 한번 찾아 뵙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찾아 뵙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용기가 없는 것일까?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한해, 두해 미루고 미루다 보니 벌써 11년이 지났다. 언젠가는 용기를 내서 인사드려야 겠다.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글을
매번 긴 글을 쓴다. 쓰다보니 자꾸 길어진다. 그만큼 쓰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읽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될 것이다. 시간낭비가 되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유익한 글을 쓰고자 노력한다. 이를 요즘말로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이나 주석을 인용한다. 이번 글도 길어졌다.
2020-11-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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