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노예나 하는 것
“인류의 미래는 백수이다.” 이 말은 고미숙선생이 한 말이다. 백수가 왜 인류의 미래인가? 이에 대하여 유튜브 ‘세바시 418회 백수의 정치경제학’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고미숙선생의 유튜브 강연에 매료되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 본 것 같다. 어떤 것은 두 번, 세 번 들었다. 장거리 운전할 때 일없이 들으면 좋다. 들으면 들을수록 좋다. 그것은 건질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고미숙선생의 엑기스 강연
수많은 고미숙선생의 강연에서 엑기스를 뽑으라면 단연 ‘세바시 418회 백수의 정치경제학’을 들 수 있다. 마치 반야심경 같은 것이다. 반야심경을 대승경전의 정수라 하듯이, 고미숙선생의 유튜브 강연의 정수는 이것이다.
백수는 인류의 미래라고 했다. 이런 파격적인 제안에 동의할 만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강연을 듣다 보면 수긍하게 된다. 이는 백수의 윤리적 강령에서 드러난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화폐로부터 벗어나기
둘째, 스위트홈에서 벗어나 삶의 지도 다시 그리기
셋째, 우정과 지성을 통해 소통과 순환의 기예를 터득하기
이와 같은 세 가지 사항은 고미숙선생이 유튜브 강연에서 늘 강조하던 것이다. 마치 변주곡처럼 살을 붙여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 그러나 결국 이 세 가지를 근간으로 한 것이다.
고미숙 선생은 백수의 윤리 세 가지에 대하여 성현들이 몇천년 동안 갈고 닦고자 했던 삶의 경지라고 말한다. 심지어 공자, 소크라테스, 부처도 백수출신이라고 했다. 정규직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백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화폐로부터 벗어나기는 돈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말한다. 백수는 취업이 안되기 때문에 수입이 없다. 당연히 놀고 먹는 것이다. 그런데 노는 시간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이 될 수도 있고, 역사도 될 수도 있다. 그 밖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백수의 삶임을 말한다. 고미숙 선생도 그런 부류였음을 말한다.
고미숙선생의 백수예찬을 보면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는 것 같다. 이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고 그 만큼 전달효과가 있다. 고미숙선생은 정규직이 되지 못하여 백수로 살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음을 말한다. 백수로 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때 스스로 ‘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을 창조해 냈음을 말한다.
철철 남는 시간에
고미숙선생의 강연을 듣고 매우 공감했다. 그것은 나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때 정규직이었으나 세월이 흘러 감에 따라 퇴물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퇴출되었기 때문이다. 백수가 되기 싫어도 중년백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번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블로그에 글 쓰는 것을 말한다.
고미숙 선생은 박사출신 백수이다. 무려 십년동안 학교를 다녀 국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아무 데도 받아 주는데 없어서 사십 가까이 되었을 때 중년백수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후 삶은 백수로서의 삶이다. 그렇다고 밥벌이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굶지 않은 것이다. 백수가 되었다고 해서 굶어 죽을 염려는 없는 것이다. 비록 수입은 작아도 연명한 것이다. 다만 큰 돈은 벌지 못한다. 재산축적은 되지 않는 것이다.
백수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 모르지만 시간만큼은 부자이다. 백수는 시간부자인 것이다. 이 주체할 수 없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미숙 선생은 책을 읽고 글을 썼다고 한다. 특히 고전을 읽었다고 한다. 가장 감명 깊었던 고전은 ‘열하일기’였다고 한다.
열하일기 저자 연암 박지원 역시 백수였다고 한다. 관직에 나갈 수 있었지만 글이나 읽고 책이나 쓰면서 평생 백수로 산 것이다. 만일 박지원이 관직에 나가 정규직으로 한평생 살았다면 오늘날 열하일기와 같은 고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또 관직에 있었다면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가거나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사십대에 중년백수가 되었다. 개인사업자등록증을 교부 받아 일인사업자로 살고 있지만 ‘반백수’나 다름없다. 일이 있으면 하고 일이 없으면 철철 시간이 남는다.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다.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궁리한 끝에 글쓰기를 한 것이다. 블로그에 일없이 쓴 것이다. 그랬더니 시간이 잘 갔다. 한번 글쓰기를 하면 오전이 금방 지나간다. 그래서 ‘블로거’가 되었다.
일은 노예나 하는 것
백수는 정규직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측은하게 본다. 고미숙선생에 따르면 소크레테스 시절 정규직은 노예들이 맡았다고 한다. 그것도 평생 정규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은 노예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오늘날 정규직을 보면 하루 종일 일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있어야 한다. 때로 주말도 없고 휴가도 없다. 실제로 그랬다. 직장생활 20년이 그랬던 것이다.
직장생활 할 때 오로지 집과 직장밖에 몰랐다. 직장을 잃으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두려워했다. 그러나 아무도 받아 주는 곳이 없었을 때 비로서 놓아 버렸다. 동시에 부자가 되겠다는 꿈도 버렸다. 노후를 염려하여 노후대책으로서 얼마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바닥에 떨어졌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허황된 욕망에서 일단 벗어난 것이다.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 하나만 내려 놓아도 이렇게 삶이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백수가 되었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절대 굶는 일은 없다. 돈은 벌지 못해도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사실 먹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소의 비용만 있으면 생존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것은 포기했어도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시간이다. 정규직이라면 꿈도 꾸지 못하는 자유시간을 말한다. 어쩌면 돈보다 더 귀중한 것이 시간이다. 천만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만일 공무원이 되어 정년을 꼭꼭 다 채우고 정년백수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 세월만큼 시간이 아깝다고 본다. 돈 주고 바꿀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한평생 정규직으로 살면서 정년퇴직 했을 때 소크리테스 시절 노예나 다름없을 것이다.
길에서 길을 찾아야
고미숙선생은 어쩔 수 없이 중년백수가 되어 이제 고전평론가로 거듭났다고 한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찾아 볼 없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직까지 누군가 ‘나는 고전평론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백수는 철철남는 시간에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살아 간다. 그것이 고전평론가가 될 수도 있고 그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블로그에 매일 글쓰는 블로거가 될 수도 있다.
고미숙선생은 철철 남는 시간에 고전을 읽어서 삶의 방향을 찾았다. 열하일기와 같은 고전을 말한다. 그런데 고전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통적인 키워드는 ‘길’이라는 것이다.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부처도 백수출신인데 모두 길에 있었다는 것이다. 집 바깥으로 나가 길에서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길에서 길을 찾은 것이다.
빠알리 삼장은 지혜의 보고
블로거에게 있어서 고전은 감히 말하건데 빠알리삼장이다. 부처님의 원음이 생생하게 실려 있는 빠알리삼장이 고전이다. 니까야(經藏), 위나야(律藏), 아비담마(論藏)로 이루어져 있는 빠알리삼장이야말로 고전 중의 고전이다.
방대한 빠알리 삼장은 지혜의 보고와도 같다. 지금 니까야 아무 곳이나 열어 보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마음이 심난할 때 법구경 게송 몇 개만 읽어 보아도 치유가 된다. 우울증 치료약을 먹지 않아도 치유가 되는 것이다.
“경구는 외우지 않음이 티끌이요
집은 보살피지 않음이 티끌이다.
용모는 가꾸지 않음이 티끌이고
수호자에게는 방일이 티끌이다.”(Dhp.241)
“정숙하지 않음은 여인의 티끌이고
인색한 것은 보시자의 티끌이다.
그리고 악한 것들이야말로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티끌이다.”(Dhp.242)
“그 모든 티끌 보다 더욱 더러운 것,
최악의 티끌은 무명이다.
이러한 티끌을 버리고
수행승들이여, 티끌을 여의어라.” (Dhp.243)
알면서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말한다. 이는 실정법과는 다른 것이다. 고의적 살인은 중죄로 처벌받지만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것은 정상을 참작해 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간다. 세상 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아 갈 때 수행자들은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추구하는 역류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도 알면서 지은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를 더 크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 대죄이다.”라고 볼 수 있다.
모르고 짓는 죄는 크다. 어떤 죄를 또 저지를지 모른다. 그것이 죄인줄도 모르기 때문에 또 죄를 짓는 것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불선법이다. 이를 모르고 행위를 하면 불선업이 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은 무지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선업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멈출 것이다. 그래서 무탐, 무진, 무치의 역류도 삶을 살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최악의 티끌은 무명이다.(avijjā paramaṃ malaṃ)”(Dhp.243)라고 한 것이다.
최악의 티끌은 무명이라고 했다. 더 자세하게 알려면 주석을 보아야 한다. 여덟 갈래의 무지가 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 네 가지와 윤회의 시작을 모르는 것, 개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윤회의 종식을 모르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건발생에 대해 모르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것은 주석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백수전성시대에
요즘 백수전성시대이다. 백수에는 크게 청년백수, 중년백수, 정년백수가 있다, 누구나 한번쯤 백수가 되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취업이 안되는 시기에는 청년백수가 많다. 취업이 되어서 일을 하긴 하지만 퇴물이 되면 도중에 용도폐기 된다. 그때 중년백수가 된다. 정규직으로 들어가 용케 정년을 꽉꽉 채우지만 결국 정년백수가 된다. 고미숙 선생에 따르면, 백수는 일찍 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만큼 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과 달리 이제 모두가 백수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성장의 시기에서는 정규직이 되어 일터에 나가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일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특히 사차산업혁명시대에 접어 들면서 사람들은 점점 일자리가 줄어 들고 있다. 그렇다고 굶어 죽을 염려는 없다.
옛날과 달리 국가의 부는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공유될 것이다. 또 기본소득이 일반화될 것이다. 그 철철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전 만한 것이 없다. 백수가 되었을 때 고전을 공부하는 것이다. 고전에서 지혜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고전으로서 경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불교경전이다.
한때 작은 방 삼면에 책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필요한 책만 가지고 있다. 꼭 필요한 책은 경전이다. 빠알리삼장을 말한다. 빠알리삼장만 있으면 서가에 책이 가득한 것 부럽지 않다. 빠알리 삼장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백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이것 만한 것이 있을까? 블로거에게 고전은 빠알리삼장이다.
2020-11-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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