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괴로움중의 괴로움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괴로움이 있지만 아마 생사를 모르는 괴로움이야말로 괴로움중의 괴로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몇주전 TV에서 실종자 가족에 대한 방송을 보았다. 안산에 사는 어느 60대 부부는 30년 전 사라진 딸을 못잊어 하고 있다. 그때 당시 13살이었다고 한다. 부부는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안해 본 것이 없다고 했다. 지금도 혹시나 해서 딸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기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사회자도 숙연하고 참석자들도 눈물을 흘린다. 자식을 키워 본 사람들은 그 심정을 알 것이다. 차라리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보았다면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자식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맨다는 것은 극심한 괴로움이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죽어서나 끝나는 고통이다.
누구나 괴로움이 있다. 누구나 말 못할 괴로움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척할지 몰라도 사실을 알면 말 못할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이 있어도 표를 내지 않고 사는 것이다. 지금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괴로움이 있다. 누구나 괴로움을 안고 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설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
흔히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말한다. 사고는 생, 노, 병, 사에 대한 것이고, 팔고는 여기에다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와 오취온고를 더한 것이다. 어느 괴로움이든지 사고팔고 안에 들어간다. 그런데 니까야를 보면 추가된 것이 있다. 그것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을 말한다. 이것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그것도 사고팔고와 동급이다.
사고팔고의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잘 다가오지 않는다. 관념적 구호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현실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생생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고팔고와 함께 사용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고팔고가 괴로움인 줄 잘 모른다. 태어남이 괴로움이라 했는데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니 실감나지 않는다. 죽음이 괴로움이라 하지만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늙음이 괴로움이라 하지만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절감하지 않는다. 병드는 것이 괴로움이라 하지만 건강할 때는 알지 못한다.
팔고중에 생노병사는 관념적이다. 현재진행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사고는 현실적이다. 일상 삶속에서 겪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원증회고(怨憎會苦),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이 있다.
원증회고는 매일 겪고 있는 것이다. 매순간 겪고 있을 수 있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사고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언제 어느때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전화 한통으로 지금 이 행복이 깨질 수 있다.
지금 이 행복이 깨질까 봐 늘 조마조마한 삶이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 일상의 삶이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업생(業生)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원증회고와 애별리고를 피해 갈 수 없다. 다만 모른 척 하고 살아갈 뿐이다. 또 안그런 척하며 표나지 않게 살고 있는 것이다.
열열히 바라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구부득고(求不得苦)이다. 그럼에도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내 뜻대로 하고자 한다. 돈도 내 뜻대로 벌려야 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 뜻대로 되고자 하는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롭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오온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고팔고의 결론은 오취온고(五取蘊苦)로 귀결된다. 이 모든 괴로움은 이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잘 다가오지 않는 말이다. 지금 이렇게 괴로운데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라는 말을 추가했을 것이다.
지금 안락한 삶을 사는 사람은 서민의 괴로움을 잘 모른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치 천상의 존재가 지옥존재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천상락을 누리면 깨닫기 힘들다고 말한다. 괴로움을 겪어 보아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는 인간만이 깨닫기 좋은 환경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에 대해 설했다. 그래서 “이것이 행복이다.”라 하여 낙성제(樂聖諦)를 설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 괴로움을 알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행복으로 본 것이다.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이라는 언표를 사용하여 진리를 설했다. 낙성제를 설하지 않고 고성제를 설한 이유라고 본다.
만약 누군가 오로지 행복에 대해서만 얘기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 할 수 없다. 심산유곡에서 나홀로 신선처럼 사는 사람이 행복을 말한다면 고통받는 중생에게 도움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사고팔고를 설했다. 더구나 괴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 대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여, 괴로움을 진리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는 매우 현실적이다. 동문서답식 선문답 하는 것과는 다르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삶의 현장에 대한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먼저 괴로움을 아는 것이다. 부처님은 누구나 겪고 있는 괴로움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 절절한 표현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다섯 단어이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말은 니까야 도처에서 복합어로 발견된다. 이 다섯 단어를 하나라 합하여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라고 한다. 이 말을 분해하면 소까(Soka)는 슬픔으로, 빠리데와(parideva)는 비탄, 둑카(dukkha)는 고통, 도마낫사(domanassa)는 근심, 우빠야사(upāyāsā)는 절망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이 되는 것이다.
괴로움을 사고팔고라 하지만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 중에 비탄이 있다. 비탄은 빠리데와(parideva)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는 lamentation이라 한다. 이는 ‘애가, 비탄의 소리’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비읍(悲泣)’이라 하는데, 이는 "음~"하고 신음을 한다든가, 너무 슬퍼서 흐느껴 우는 것을 말한다. 가슴이 찢어 지는 듯한 괴로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사고팔고는 오취온고로 귀결된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은 괴로움 그 자체가 된다. 이는 오취온고가 괴로움의 원인이 아님을 말한다.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에 따른다. 고성제는 결과에 대한 것이고 집성제는 원인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고성제를 먼저 설했다. 이는 인과(因果)에서 과를 먼저 설한 것과 같다.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라는 것이다. 마치 문제가 무엇인지 알라는 말과 같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의 인과법에서는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할 때 거꾸로 설했다. 과보로서 나타난 괴로움을 먼저 설하고 이어서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설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름아닌 우리가 오취온적 존재임을 말한다.
우리는 이미 구조적으로 괴로운 존재이다. 태어난 모든 존재는 괴로움 그 자체임을 말한다. 왜 그런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태어남을 유발하여 이 세상에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로서 나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는 운명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괴로움 그 자체 존재로서 나는 사고팔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항상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나타난다. 결국 절망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복합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는 고성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십이연기 정형구에서도 발견된다. 무명에서부터 시작되는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말미에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1)”라고 정형화 되어 있다. 고성제에서의 구조와 같다.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다.
모든 존재에게 있어서 태어남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 이는 절망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절망이다. 그렇다면 운명적 파탄으로 귀결되는 괴로움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모르는가?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는 것이다. 가르침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일어나는 원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
우리는 몰라서 여기 있게 되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여기 있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몰라서 여기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성제를 모른 것이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無明)이다. 무지에 무지를 모르는, 또 그 무지에 무지를 모르는 중층무지(重層無知)를 말한다. 마치 깜깜한 밤길을 걷는 것 같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보이지 않으니 무서운 것이다. 알지 못하니 답답하고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사성제를 알면 갑자기 환해지는 것과 같다. 깜깜한 방에 불이 켜지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본래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또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운명적 파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의 삶을 살아간다.
2020-11-2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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