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루나복지센터가 번영하기를!
일기일회(一機一會), 지금 이 기회가 지나면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 여행 갔을 때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특히 해외여행이나 해외성지순례가 그렇다. 그래서 더욱 더 집중하고자 한다. 사람과의 만남도 그렇다.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중에는 이른바 영양가 없는 만남도 있고 이익이 되는 만남도 있다. 옷깃만 한번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언젠가, 어느 전생에서인가 옷깃 한번 스친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만날 인연이 되어서 만난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악연일지라도.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인연은 선연이 되어야 한다. 되돌아보면 과거에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 또는 내생에 어떤 인연이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른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지금 악연이라면, 지금 사랑하지 않은 것과의 만남으로 괴롭다면 언젠가 어느 때인가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건이 익어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블친 두 명이 있는데
과거는 지나갔다. 앞으로의 일이 중요하다. 새로 맺은 인연은 선연이 되게 해야 한다. 블로그에 글쓰기 하면서 이런 저런 인연을 만났다. 그 중에 블로그 글로 맺어진 친구도 있다. 이를 블친, 블로그 친구라 해야 할 것이다.
지난 11월 8일 아산에 있는 마하위하라 까티나축제에 참여했다. 담마끼띠 스님과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가는 김에 아는 사람과 함께 하고자 했다. 생각 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충청남도에 블친 두 명이 있다. S선생은 공주에 살고 있고 L선생은 천안에 살고 있다. 두 블친 모두 안양 사무실에 놀러 온 바 있다. 또한 두 선생은 정평불회원이기도 하다. 정평불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회원확보 과정에서 끌어 들인 것이다. 순순히 따라 주었다. 아마 얼굴 보고서 회원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자주 보게 되었다. 정평불 하계수련회에서도 연말송년회 때도 끌어 들였다.
블로그를 인연으로 맺은 친구도 친구이다. 반드시 학교친구만 친구가 아니다. 흔히 사회친구는 오래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특히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20년 동안 여러 회사에서 회사생활 했지만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람은 딱 한사람을 제외하고 없다. 그것은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익이 되면 붙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회사다닐 때 전자제품을 개발했었다. 주요한 개발업무 중의 하나는 부품을 승인하는 일이다. 이때 부품업체 영업사원들의 타겟이 된다. 그들은 승인을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한번 승인이 나면 안정적으로 물건이 공급되기 때문에 회사의 사활을 거는 것이다. 그러나 퇴사하면 전화한통 갈려 오지 않는다. 이익이 되면 들러붙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다.
블로그를 매개로 하여 맺은 인연은 오래 간다. 공주 S선생도 천안 L선생도 10년 가까이 된다. 나이는 모두 두세 살 많지만 친구처럼 지낸다. 학교친구들처럼 이해관계에 있지 않다. 그래서 만나도 부담이 없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
친구의 조건은 무엇일까? 디가니까야 31번 경에 명백히 나와 있다. 부처님의 우정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우정의 가르침에 따르면 좋은 친구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 즐거우나 괴로우나 한결같은 사람, 유익한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연민할 줄 아는 사람”(D31.16)을 말한다.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좋은 친구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취했을 때 보살펴 주고, 취했을 때 재물을 돌보아 주고, 두려울 때 피난처가 되어주고, 요청한 것의 두 배로서 시물을 주는 사람”(D31.16)라고 구체적 설명이 있다. 여기서 네 번째 항목에서 시물을 두 배로 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친구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돈이 필요할 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대부분 피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필요한가?”라고 물어볼 것이다. 십만원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이십만원을 주는 것이다. 기대한 것보다 더 주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감동할 것이다. 친구감동이라 해야 할 것이다.
기대한 것 이상을 주었을 때
기업광고에서 고객감동이라는 말이 있다. 고객을 감동시켜야 사업이 성공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도 고객감동에 대하여 말 했다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사업의 경’(A4.79)에 따르면 “그리고 그가 약속한 것을 의도한 것 이상으로 보시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이 수행자나 성직자를 찾아가서 “존자여, 필요한 것을 말씀하십시오.”라며 약속한다. 절에 가서 불사에 동참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화장실 가기전과 갔다오고 난 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두 배로 보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가 약속한 것을 의도한 것 이상으로 보시한다.”(A4.79)라고 말한다. 스님감동이 될 것이다. 고객감동도 똑 같은 원리에 해당된다.
요즘 마트에 가 보면 ‘원플러스원(1+1)’ 상품을 종종 볼 수 있다. 마치 노점에서 사과를 살 때 하나 더 주는 것과 같다. 이는 고객을 만족시키는 행위이다. 그런데 두 배를 주었다고 한다면 고객감동이 될 것이다. 고객이 기대한 것 이상을 주었을 때 고객감동이 된다. 이런 논리를 사업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일을 하다 보면 품질사고가 종종 난다. 대부분 본인 실수에 따른 것이다. 이런 경우 두 말없이 다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함과 함께 발로 뛰어야 한다. 먼 거리까지 달려 가서 최대한 빨리 직접 전달해 주었을 때 감동이 있을 것이다.
의도한 것 또는 기대한 것 이상 해 주어야 감동이 일어난다. 친구사이에서도, 스님에게도, 고객에게도 “그가 약속한 것을 의도한 것 이상으로 보시한다.”(A4.79)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적용되는 것이다. 친구감동, 스님감동, 고객감동이다.
키보드워리어
공주에 사는 S선생은 막 퍼주는 스타일이다. 언젠가 영지버섯을 택배로 보내 주었다. 산에서 채취한 것이라고 했다. 한눈에 보아도 고급이다. 더구나 각종 약재까지 곁들였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 먹으면 좋을 것이라고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이번 아산 마하위하라 까티나축제를 앞두고 S선생과 통화했다. 염치불구하고 혹시 남은 것이 있으면 조금만 달라고 했다. 아내가 영지버섯 끓인 물을 마시고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속이 뻔하게 보이는 짓이다.
S선생은 작은 박스 가득 영지를 주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이런 것을 예상해서 꿀을 준비했다. 마트에서 꿀을 사서 선물로 준 것이다. 그러나 영지의 가치에 비하면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S선생은 개성이 강하다. 나쁘게 말하면 싸움닭 같다. 논쟁이 붙으면 지지 않는 것이다. 블로그에서 댓글 논쟁이 붙으면 장문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이를 ‘키보드워리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다 보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악의적으로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일체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때 S선생이 나선다. 대신 싸워 주는 것이다. 말은 거칠다. 글도 거칠다. 그러나 정법에 대한 의지는 강하다. 개성이 강해서 모나 보이지만 인정 많은 사람이다. 정평불회원으로도 끌어 들였다. 얼굴 보고서 참여해 준 것이다.
공주 까루나복지센터
마하위하라 까티나 행사가 모두 끝난 후 사원 근처에서 식사했다. 천안 L선생도 함께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S선생이 계산을 다 한다. S선생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공주에 가자고 했다. 아산에서 공주까지는 40여키로 거리로 40여분 걸린다.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가기로 결심했다. 일기일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언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S선생은 공주에서 복지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공주 근교에 사무실도 있다. 사무실 간판을 보니 ‘까루나복지센터’라고 되어 있다. 왜 까루나라고 했을까?
이름을 짓는데 도움을 주었다. S선생이 복지센터 설립 꿈을 품고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이다. 전화를 걸어서 복지센터 이름을 무엇으로 하는 것이 좋은지 물어본 것이다. 별 생각 없이 ‘까루나’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그런데 2년 만에 까루나복지센터라는 간판을 보게 된 것이다.
S선생은 공주에서 복지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요양원은 아니다. 찾아 가는 서비를 말한다. 이제 본 궤도에 올랐다고 한다. 현재 30명을 방문서비스를 하고 있고 서비스해 주는 사람은 20명이라고 한다. 한사람이 1.5명을 맡는 것이다. 사업은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 수입도 안정적이라고 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2년 걸렸다고 한다. 총 준비 기간을 합하면 4년 되었다고 한다.
S선생의 명함을 보니 자격증이 세 개 있다. 사회복지사, 평생교육사, 심리상담사(1급) 자격증이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나름대로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노인인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서비스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선 자격증부터 따게 된 것이다.
S선생은 방문서비를 하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지원금이 나온다고 했다. 큰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사업임을 알 수 있다. 그 동안의 노력으로 사업은 안정궤도에 오른 것 같다. 지역을 더 확대하면 더 많은 서비스를 하게 될 것이다. 그에 따라 수입도 증가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서로서로 좋은 것이라고 했다. 노인들을 돌보아서 좋고 그 대가를 받아서 좋은 것이다. 세상에 이것처럼 좋은 일이 없어 보인다. 더구나 복지센터 간판 이름이 ‘까루나’이다.
병든 아들을 대하듯
사람들은 까루나라는 말을 잘 모른다. 초기불교 공부한 사람들이나 일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무량심에 나오는 ‘연민’을 말한다. 그래서 ‘까루나복지센터’를 우리말로 하면 ‘연민복지센터’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을 잘 지은 것 같다. 연민이라는 말이 노인들 복지서비스와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사무량심은 자애, 연민, 기쁨, 평정에 대한 것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멧따(metta), 까루나(karuṇā), 무디따(mudita), 우뻭카(upekkha)라고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 네 가지를 네 아들의 비유로 설명했다. 그래서 “어린 아들에게는 성장하기를 원하고, 병든 아들에게는 치유되길 바라고, 청년이 된 아들에게는 젊음의 행복이 오래가길 바라고, 자립한 아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처럼”(Vism.9.108) 하라고 했다.
사무량심에서 핵심은 자애와 연민이다. 자애 대해서는 사랑스런 막내아들을 대하듯 하라고 했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듯이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라며 바라는 것이다.
연민에 대해서는 병든 아들을 대하듯 하라고 했다. 병고에 시달리는 중생을 볼 때 하루 빨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늙고 병든 자에는 자애보다 연민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S선생의 복지센터 간판을 까루나복지센터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별 생각없이 “까루나로 하면 어때요?”라고 말한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가련한 늙음이여!
요즘 고령화시대이다. 앞으로 갈수록 노인인구는 늘어날 것이다. 이에 비례하여 요양원 등 노인관련시설도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S선생은 선견지명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비심이다. 늙고 병든 사람에 대한 자비심이다.
부처님도 늙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윳따니까야 ‘늙음의 경’(S48.41)을 보면 “그때 세존께서는 홀로 고요히 명상하다가 저녁 무렵에 일어나 서쪽의 양지에 앉아 등을 따뜻하게 하고 계셨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더구나 아난다가 “이제 세존의 안색은 청정하거나 고결하지 못하고 사지가 모두 이완되어 주름이 지고 몸은 앞으로 기울고 시각능력, 청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의 모든 능력의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서럽다고 한다. 그리고 외롭다고 한다. 아무리 노후준비를 잘 했다고 하더라도 오래 살게 됨에 따라 대부분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은퇴후에 자금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다. 자녀들이 가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배우자가 먼저 가 버리면 그야말로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노인이 되면 무엇보다 감각능력의 쇠퇴하는 것이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에게도 그런 조짐이 보였다. 그래서 아난다가 “시각능력, 청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의 모든 능력의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했다.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네.
백 세를 살더라도 결국
죽음을 궁극적인 것으로 할 뿐
누구도 예외로 하지 않고
그것은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네.”(S48.41)
까루나복지센터가 번영하기를!
젊다고 자만해서 안된다. 언제나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A5.57)라고 사띠해야 함을 말한다. 또 건강하다고 자만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나는 질병에 종속되었으며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A5.57)라고 사띠해야 함을 말한다.
지금 늙고 병든 자들은 최악의 삶을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가련해 보인다. 스스로도 추악한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노인들을 멀리하려 한다. 노인 특유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았을 때 누가 돌보아야 할까?
S선생의 까루나복지센터는 이 시대에 적합한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까루나라는 뜻을 몰라도 연민의 뜻이기 때문에 이름을 잘 지은 것이다.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이 하루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까루나복지센터가 번영하기를 기원한다.
2020-11-1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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