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을 받았는데
용돈을 받았다. 봉투를 보니 5만원짜리 네 장이다. 아들이 준 것이다. 생일돈이라 볼 수 있다. 처음 받는 돈이다. 그 중에 두 장을 아내에게 주었다.
어제는 생일이었다. 성도절날이 생일인 것이다. 음력으로 따져서 그런 것이다. 불교에 입문하기 전에는 12월 초파일의 의미를 몰랐다. 불교를 접하고 나니 생일날이 성도절인 것을 알았다.
성도절이 생일인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연의 일치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 한편 성도절이 생일날인 것에 대하여 불교와 인연이 있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고귀한 일이 된다. 법우중에 상수도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세상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고 했다. 이처럼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훌륭한 일이 된다. 생일날이 성도절인 것에 대하여 부처님과 인연이 있다고 의미를 두면 역시 가치 있는 날이 될 것이다.
좀처럼 가족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내가 가족이야기를 절대로 쓰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을 알고 나서 들은 말이다. 이후 가족얘기는 글에 없다. 그럼에도 용돈을 받은 것에 대하여 자랑하고 싶었다. 속된말로 자랑질하고 싶은 것이다.
처음으로 받아 보는 용돈이다. 그동안 들어가기만 했다. 초중고 때는 물로 삼수할 때도 돈이 들어 갔다. 카투사 복무할 때도 상당 금액이 들어 갔다. 대학다닐 때 역시 돈이 들어갔다. 공무원시험 준비한다고 노량진에 다닐 때는 매달 백만원 가량 들어갔다. 다행이 일년만에 합격하여 돈 들어갈 일에서 해방되었다.
아들은 서울시 공무원이다. 말단으로 들어가서 삼사년되었다. 일이 힘든 모양이다. 월급이 작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그럴 때 마다 설득하기 바쁘다. 요즘은 뜸하다. 그런 아들이 봉투를 내민 것이다.
무언가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다. 받는 것 못지않게 주는 것도 기분 좋은 것이다. 그것이 선물이 되었건 돈이 되었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내도 기분 좋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까지 주기만 했었다. 남에게도 주고자 했다. 절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주는 것을 보시라고 말한다. 더 좋은 말은 나눔이다. 보시하고 나누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행위이다. 그래서 “조금 있어도 나누어 주는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도 죽지 않는다.”(S1.32)라고 했다.
나눔이 왜 죽지 않은 행위일까? 그것은 상대방의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이 기억하고 있는 한 죽지 않는다. 그런데 보시공덕은 금액과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적게 가진 자가 능력껏 베푸는 행위에 대하여 “조금 있어도 주는 보시는 천 배의 보시와 동일하게 헤아려지네.” (S1.3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큰 재산을 가진 자의 큰 보시나 작은 재산을 가진 자의 작은 금액의 보시는 동등함을 말한다. 큰 재산을 가진 자가 인색하여 조금 베풀었다면 비록 그 금액이 작은 재산을 가진 자의 금액보다 천배나 많을지라도, 작은 재산을 가진 자는 능력껏 보시를 했기 때문에 천배의 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보시라 하여 반드시 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보시도 있고 무외시도 있다. 그 밖에 많은 종류의 보시가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먹을 것을 베풀어 힘을 주고
옷을 베풀어 아름다움을 주고
탈 것을 베풀어 안락을 주고
등불을 베풀어 밝은 눈을 주네.”(S1.42)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보시이고, 입을 것을 주는 것도 보시이다. 탈 것을 베푸는 것도 보시라고 했다. 요즘 카풀 같은 것이다. 불을 밝혀 주는 것도 보시라고 했다. 이는 법보시를 의미한다.
주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보시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동산과 숲에 나무를 심고 다리를 놓아 사람들을 건네주며 우물을 파 목마른 이를 적셔주고 우물가에 정자를 세우는 사람이 있네.”(S1.47)라고 했다. 다리를 놓아서 건너 가게 하는 것도 보시이고, 목마른 자들을 위하여 우물을 파는 것도 보시라고 했다. 보시라 하여 반드시 돈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청정도론 자애수행편을 보면 자애수행 최종단계는 주는 것이다. 그래서 “보시는 길들여지지 않은 자를 길들이고 보시는 일체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는 것, 보시하는 것과 사랑스런 말로써 머리를 들고 그리고 머리를 숙인다.”(Vism.9.39)라고 했다. 여기서 “머리를 들고 그리고 머리를 숙인다.”라는 말은 “시주(施主)는 머리를 들고, 시물을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인다.”라는 말이다. 선물을 받을 때 고개를 빳빳이 하며 받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여 받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처음으로 가족얘기를 하고 자랑질을 해 보았다. 주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돈을 받아 보았기 때문이다. 가족간에도 주고받는 행위는 기쁜 것이다. 하물며 남에게는 어떨까?
2021-01-2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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